[단비월드] 청년 허브 컨퍼런스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던 지난 9일 오후 3시 30분. 직선거리 7km 떨어진 시청광장에서는 폭죽이 터졌다. 14km 거리의 서울혁신파크 다목적 홀에서는 중국어, 일본어, 영어, 한국어가 통역기로 오가는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일본과 대만, 홍콩에서 날아온 청년 정치인들이 주인공이다. 서울시가 주최한 <청년허브 컨퍼런스>. 주제는 [정당정치의 새 지형: 변화의 정치]다. 아시아 각국의 청년 운동가들은 왜 기성세대 정치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는지. 열정적으로 쏟아내는 그들의 현장 경험은 우리가 촛불민심으로 일궈낸 대통령 탄핵안 가결의 시민 혁명과 같은 선상에 놓였다. 탈정치시대를 참여 정치시대로 바꾸는 아시아 청년들의 도전기를 일본, 대만, 홍콩 순으로 3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는 어디선가 그것을 들었다. 대지가 흔들렸다. 손에 가득 쥔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씨앗이 점점 커졌다. 그날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싸움은 시작됐다. 씨앗이 생명으로 싹트기 시작했다. 씨앗을 뿌리려 한다. 혼자서라도.”

스와하라 타케시(24)는 일본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Students Emergency Action for Liberal Democracy-s‧SEALDs)’의 활동가다. 그가 영상을 통해 보여준 나레이션. 혼자서라도 씨를 뿌려야 한다는 그 결기에서 변화의 길이 보인다.

▲ 연단에 서서 발표하는 스와하라 타케시의 모습. ⓒ 청년허브

일본인들이 정치에 무관심해진 이유

다케시는 “일본사람들은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유는 이렇다.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한 일본은 평화헌법을 만들어 전쟁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1950년대 정부는 이에 역행하는 정책을 폈다. 재무장 움직임. 일본과 미국은 국민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무장안을 통과시켰다. 노부스께 총리는 책임을 지고 총리에서 물러나는 제스쳐를 보였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이때 “큰 공통의 목적을 상실했다"고 다케시는 들려준다. “일본사람들은 이후 차츰 사회운동에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이후 이케다 하야토 후임 총리가 ‘정치계절에서 경제계절로’라는 슬로건으로 일본인의 관심사항을 경제로 바꿨다.

그리고 고도경제성장을 이뤘다. 사람들은 정치에 점점 더 무관심해졌다. 일본사람들은 시위, 집회 파업은 위험하다고 여겼다. 사회운동은 힘을 잃었다.

▲ 아베 신조 총리는 2016년 4월 2일 '핵 안보 정상 회의'에서 "일본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다시 리드하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고 원전 재가동 추진을 선언했다. 후쿠시마 원전의 현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 동경신문

일본인이 다시 정치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다케시는 “동일본 대지진 원전사고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정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전환점에 대해 애기했다. 대지진은 동시에 사회 불안감을 키워 내셔널리즘이 확산되는 계기도 만들었다. 이 때 자유민주당이 선거에서 승리해 아베 신조가 총리가 됐다.

다케시는 “착각하지 마라. 자유민주당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다케시는 아베 신조가 “전후 체제에서 탈피해 일본의 내셔널리즘 되찾으려 한다”는 평가를 내놓는다. 아베 정부는 2013년 특정 비밀보호법을 통해 2014년 이후 재무장을 강화해 나갔기 때문이다.

다케시는 “그전까지 정치에 관여할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더 이상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일본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취지로 ‘사스플(특정비밀보호법에 반대하는 학생의 자발적 모임‧SASPL)’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고 한다.

다케시는 “이미지 구축을 위해 많은 비용이 필요해 정당들에 부탁해서 이런 어려움 극복했다”며 청년 정치조직으로서 갖는 한계와 이를 뛰어넘는 방법을 동시에 들려준다. 이후 사스플은 ‘실즈(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 SEALDs)’라는 전국조직의 새 이름을 얻는다.

새 정치문화의 장, 집회에서 자유발언

실즈는 집회를 통해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광장을 만들었다.

”금요일 밤에 아무나 참가해달라고 홍보했고 집회에서는 슬로건을 만들기보다 연설시간 확보에 힘을 쏟았다“ 다케시의 말이다. 그랬다. 핵심은 참가자들의 발언이었다. 가령 ”왜 전쟁 참가의 길을 열어주는 안보법안을 만들면 안 되는 지 이유를 말하라"고 이끌었다. 촛불집회에서 박근혜 탄핵이 왜 필요한지 자유발언을 연상시켜주는 대목이다.

▲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연설하는 타케시. ⓒ SEALDs

실즈의 연설 한 토막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쟁을 일으켜서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누가 이득을 봅니까? 우리 국민은 희생될 뿐입니다. 중국이 자꾸 전쟁을 걸어오는 것 같다고 한다면 또 한국과의 외교관계가 순탄치 않아서 걱정이라면, 우리 청년들이 한국, 중국 청년들과 대화하고 함께 놀고, 술 마시고, 사이좋게 만들겠습니다. 우리가 억지력(抑止力)이 되겠습니다. 억지력에는 군사력이 아닌, 끈끈한 인연이 필요합니다."

쉽고 간결한 메시지다. 젊은 층에 익숙한 방식이다. 쉴즈는 SNS를 통해 적극적으로 알려 나갔다. 집회 현장팀, 디자인팀, 집회를 촬영해 SNS를 통해 전파하는 홍보팀 등 10개 정도의 팀으로 나눠 활동했다.

▲ 아베 정부의 안보법안에 반대하는 일본인 청년들의 조직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SEALDs)' 전후 70년 선언문. ⓒ SEALDs

2015년을 기점으로 일본 정치문화를 바꾼 집회

2015년 8월 30일. 일본 국회 앞을 시위대가 가득 메웠다. 일본 경찰은 공간을 나눠 바리케이트를 쳐 사람들이 한 장소에 많이 모일 수 없도록 했지만 참가자들은 그걸 뚫고 모였다. 집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경찰관이 더 많아졌다.     

▲ 일본 국회앞을 가득 채운 안보법 반대 시위 모습. 타케시는 이를 보여주며 "저기 버스를 차벽으로 세워서 사람들이 많이 없다고 하려고 한 것 같은데 보시다시피 사람들이 가득찼다"고 말했다. ⓒ 일본 반핵 법률 협회

2015년 9월 19일 안보법안이 가결될 때 실즈는 ‘선거에 가서 선거를 통해 바꾸자’고 외쳤다. 교육학자 사토 마나부는 이를 두고 “나는 매우 놀랐다. 옛 활동가들은 자신들이 뭔가 했을 때 실패하면 그다음 단계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세대는 선거를 통해 바꾸자고 한다. 이 대목이 진보한 모습”이라고 들려준다.사회학자겸 페미니스트 우에노 치즈코는 “일본의 정치문화는 2015년 계기로 크게 변화했다”고 진단한다. 철학자인 가리타니 고진 역시 "일본은 데모해도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일본사회가 데모가 가능하도록  바뀌었다”고 2015년 이후 집회문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국민 개개인의 생활 증진할 정치를 위해

다케시는 “앞으로 4개 야당의 협력 체제를 강화해 일본 국민 개개인의 생활을 소중히 하는 정치를 실현해 가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다케시가 참여 중인 시민 연합은 각 정당의 정책과 선거 캠페인에 대해 영향을 미칠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즈에서 정당을 직접 만들려는 움직임은 아직 없다. 정치가가 되거나 정당을 만들기 위한 장애물이 많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입후보 자격은 25살이다. 실즈 멤버는 대부분 그보다 어리다. 25살이 돼도 300만 엔 이상 돈이 있어야 입후보 자격이 생긴다. 따라서 다케시는 “정치적 도전을 계속할 예정이지만, 앞으로 몇 년간은 사회 운동 참여가 기본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정치를 바꾸고자 하는 사회운동가 다케시는 친할아버지 말씀 인용으로 발언을 마무리 지었다.

“12월 8일 어제는 일본인에게 특별하다. 1941년 진주만을 공격한 날이다. 많은 사람은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날이라고 본다. 매년 할아버지가 이날에 전화를 주신다. 가미카제 특공대 일원이셨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으셨다. 할아버지는 전쟁에는 미래가 없고,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새로운 평화와 민주주의 구축이 정말 중요하다. 동아시아, 세계도 마찬가지다. 여러분과 함께 앞으로 나가고 싶다.” 


편집 : 박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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