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배지열 기자

▲ 배지열 기자

그의 가방 속에 들어있던 컵라면은 부모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다. 밥 한 끼 편히 먹을 시간 없이 종종걸음 치며 스크린도어 수리에 매달려야 했던 열아홉 살 김 군. 이제 ‘구의역 청년’으로 기억될 그가 평소 꿈꾸던 직업은 기관사였다고 한다.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고 고달픈 오늘을 참아내는 비정규직 청년들은 김 군이 컵라면을 사러 들렀을 편의점 계산대에도, 출근하며 지나쳤을 카페와 주유소에도 있다. 또 다른 열아홉 살의 김 군은 외식업체에서 5개월간 고작 이틀을 쉬고 ‘매일 욕먹으며’ 하루 11시간 이상 일하다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아직 피지 못한 꽃봉오리 같은 청년들이 비정규직이란 꼬리표를 달고 ‘열정 페이’를 강요당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다.

지난 4월 청년실업률은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이래 최고치인 10.9%를 기록했다. 규모 있는 기업들은 툭하면 정규직 신규채용을 줄인다. 갈 곳 없는 청년들은 불안정하고 푸대접받는 일자리라도 붙잡을 수밖에 없다. 한국노동연구원의 ‘비정규직 노동시장 변화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15~29세 청년 5명 중 3명(64%)이 기간제, 시간제, 파견 등 비정규직으로 사회에 진출했다. 한 걸음이라도 꿈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될까 해서, 목표를 이룰 때까지 버틸 생계비를 벌기 위해, 그들은 설움과 고단함을 견딘다. 그러나 ‘잘 키워서 쓸 인재’가 아니라 ‘싸게 쓰고 쉽게 버릴 소모품’이 필요한 기업들에게 그들은 그저 절약해야 할 비용 항목일 뿐이다.

▲ 청년들이 소모품이 아니라 인재로 대접받을 수 있다면 사고는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 배지열

생산비를 최소화하고 이윤은 극대화하겠다는 기업 논리는 비정규직의 인권과 복지를 침해하는 것을 넘어 목숨까지 위협한다. 스크린도어 수리는 최소한의 안전을 위해 ‘2인 1조 작업 원칙’을 지켜야 하지만 수익에 눈먼 하청업체는 열아홉 청년을 밥 먹을 시간도 없이 혼자 돌렸다. 무엇보다 책임 있는 관리가 필요한 안전 업무에서 인력을 줄이고, 하청 등으로 값싸게 외주화하는 추세는 대기업은 물론 정부와 공공기관에서도 폭넓게 나타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선임 숙련공이 꺼리는 위험한 작업에 아르바이트생을 투입했다가 목숨을 잃거나 장애를 입게 만드는 사고도 종종 일어난다.

지난 12일 서울시청에서는 ‘구의역사고 해결을 위한 시민토론회’가 열렸다. 지하철에서 일한다는 한 노동자는 “지하철에는 (일할) 사람이 모자라고 청년들은 일자리가 모자란 데, 두 가지 요구가 만나서 해결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말했다. 정부와 기업은 현장의 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인건비를 아끼겠다고, 매일 수백만 명의 안전을 책임지는 기관사, 정비사를 격무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은 사회적인 자해(自害)행위다. 세월호를 겪고도 언제까지 생명과 안전 문제에 돈 계산을 앞세울 것인가. 더구나 일자리가 절실한 청년들이 수두룩한 현실에서.

인력을 적게 뽑은 뒤 법정 근로시간을 무시하고 ‘저녁 없는 삶’을 강요하는 기업에서는 창의적 발상이 나오기도 어렵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저소득 비정규직과 실업자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경제를 지탱할 구매력이 커질 수도 없다. 필요한 수만큼 충분히 뽑아 정당한 대우를 해줘야 세계 시장을 치고 나갈 혁신도 나오고 성장 엔진도 힘차게 돌아간다. 사회에 첫걸음을 내디딘 청년들이 소모품 아닌 인재로 대접받을 때, 우리 경제에도 희망이 보일 것이다.


 편집 : 박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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