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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다시 필요한 이유
[마음을 흔든 책] 수전 J. 더글러스의 '배드 걸 굿 걸'
2016년 06월 12일 (일) 00:49:11 계희수 기자 ellie_0714@naver.com

"예쁘고 섹시하되 헤퍼 보여선 안 되고, 
유능하지만 남자에게 위협적이어선 안 된다."

나는 20대 막바지의 평범한 여성이다. 지금까지 화장을 거의 하지 않고 살아왔다. 대학 때 강의실에서 친구가 가져온 샘플 로션을 얻어 바를 정도였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나름대로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예뻐지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내가 화장을 시작한 것은 대학원에 진학한 뒤부터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면서 내 맨얼굴이 초라해 보였다. 무엇이든지 척척해내는 ‘커리어우먼’과 꾸미지 않은 수수한 모습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다. 화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가꾸는 재능도 없고 게으르기까지 한 내가, 결국 27살 봄에 고소영이 광고하는 에어쿠션(파운데이션의 한 종류)에 입문하게 된다.

   

예쁜 여자가 성격도 좋다. 사랑을 많이 받아봤기 때문에 남들에게 관대하단다. 못생긴 여자는 사랑을 주고받지 못해서 늘 예민하고 까칠하다. 남자들로부터 많이 들었던 말이다. 나이 먹은 여자가 화장을 하지 않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다. 일찍 일어나 풀메이컵과 헤어 드라이를 해야 한다. 아, 아침에 대중교통 안에서 화장을 하는 건 더더욱 지양해야 한다. 신문사 부장이 즐겨 이용할 만한 지하철 같은 장소 말이다. (조선일보 칼럼 ‘지하철에서 화장하는 여자’ 참고) 화장도 않던 내가 실현 불가능한 고소영의 백옥 피부를 부러워하게 된 이유다.

교묘하게 평등을 가장한 ‘진화된 성차별’

<배드 걸 굿 걸>에서 미국 여성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인 수전 J. 더글러스는 여성에 대한 미디어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현대 미디어는 여성을 원하는 모든 것을 성취하는 능력 있고 강한 주체로 묘사한다. 여성은 언제나 날씬하고 예쁘고 아름다워야 여성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결실인 멋진 남자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미국 페미니즘의 부흥기인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대중매체가 만들어낸 ‘여성’과 ‘여성성’이 여성에게 어떤 굴레를 생산해냈는지 낱낱이 분석한다.

저자는 미디어의 이중성을 ‘진화된 성차별’이라고 진단한다. 진화된 성차별주의는 강요된 여성성을 근거로 가혹하고 모순된 이중 잣대를 여성 앞에 들이민다. 그리고 여성들에게 이제 힘과 권력, 자유를 얻었으니 페미니즘을 쓸모없는 구닥다리로 치부해도 좋다고 속삭인다. 대신 각자의 시간과 노력을 외모에 신경 쓰고, 남자를 기분 좋게 하며, 다른 여성들과 경쟁하는 데 할애하라는 것이다. 저자는 현대의 여성들이 유능하면서도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술에 걸렸다고 분석한다. 여성이 공존 불가능한 대중문화 속 여성 이미지들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하면서 이 멍에를 벗어던지는 것이 모든 해방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또한 진화된 성차별은 여성들에게 완전한 평등을 실현했으니 성적인 고정관념을 농담이나 즐거움으로 부활시켜도 괜찮다고 강요한다. 저자는 이런 영향으로 현재의 대중매체에서 여성을 비하하고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콘텐츠가 더욱 횡행하는 것이라 말한다.

   
▲ 진화된 성차별주의는 강요된 여성성을 근거로 가혹하고 모순된 이중 잣대를 여성 앞에 들이민다. ⓒ 글항아리

전투 중에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주술

1990년대 중후반 미국에서는 ‘제나’와 ‘뱀파이어 해결사’가 큰 인기를 끌었다. 영화 ‘매트릭스’, ‘미녀삼총사’가 흥행에 성공했고 ‘툼레이더’ 영화와 비디오 게임도 인기였다. 이들 콘텐츠에는 능숙하게 주먹을 날리고 화려하게 무기를 다루는 매력적인 여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남성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을 구해내야 하는 캐릭터다. 이들의 성공 비결은 비현실적인 ‘힘의 환상’이다. 등장인물들은 가장 우세한 형태의 남성성을 지닌 동시에 한결같이 날씬하고 아름다우며 가슴이 풍만한 8등신의 미녀들이다. 대중매체는 힘과 능력 그리고 아름다움을 동반하도록 요구한다. 아름다워질수록 더 많은 것을 쟁취할 수 있다는 주술을 끊임없이 여성들의 귓가에 흘린다.

한편으로 TV에서 방영되는 각종 서바이벌 쇼나 드라마는 착하고 청순한 여자주인공과 함께 그를 골탕 먹이고 괴롭히는 악녀 캐릭터를 무한히 생성해냈다. 여자들은 강한 힘으로 경쟁자를 제치고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이 모든 등장인물들의 얼굴과 몸매는 아주 가냘프고 아름다웠다. 변호사든 형사든 회사원이든 가정주부든 옷을 대충 입은 사람은 없다. 저자는 이들이 힘 있고 능력 있지만 늘 연인이나 남편이 그들의 삶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주목했다. 매체 속 캐릭터들이 여성들에게 협소한 여성성에 근거를 둔 특정한 결핍과 행복을 계속해서 주입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과 여성성을 완벽하게 융합해 탄생한 이 캐릭터가 과연 페미니즘의 본보기인지 아니면 협소한 미의 기준을 부합시킨 시대 역행적 인물들인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됐다.

‘걸 파워’는 매체가 왜곡한 착시현상

저자는 대중매체 속 ‘걸 파워’의 행진이 현실을 왜곡한다고 주장한다. 1997년 미국에서는 ‘스파이스 걸스’가 ‘걸파워’를 내세우며 음반 시장을 휩쓸었다. ‘Wannabe’라는 노래는 여자들에게 잘 보이지 않을 거라면 당장 꺼지라며 남자들을 향해 당차게 외친다. 많은 예능과 음악 프로, 드라마에서 여성들은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자신들을 드러내고 사회적으로도 완전한 평등을 이룬다. 입이 험한 여성 경찰국장, 유능한 외과의, 변호사 또는 유명 뉴스 앵커나 각 분야 여성 전문가들이 미국 대중매체 화면을 누빈다. 대통령, 부통령 선거에도 출마한다.

   
▲ 아름다운 여자 형사(오른쪽, 김혜수)가 역시나 아름다운 여자 법의학자(왼쪽, 정한비)에게 발굴된 백골사체의 DNA검사를 의뢰한다.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이다. ⓒ tvN드라마 <시그널> 갈무리

저자는 그 무렵 미국 사회에서 여성이 차지한 직업들 대다수가 돌봄 서비스나 감정노동 같은 직업들이었다고 지적한다. 순서대로 열거하면 비서, 상점 판매원 및 개인 판매자, 관리자 및 행정 담당자, 초등학교 교사, 간호사였고 CEO나 고소득 전문직, 고위층 직업은 찾아볼 수 없었다. 10년 후에도 사정은 비슷했다. 대학 졸업 1년 후 여성은 남성의 80% 수준의 임금을 받았으며 연령이 올라갈수록 그 격차는 더 크게 벌어졌다. 저자의 지적처럼 대중매체와 현실과의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던 것이다. 저자는 과거의 매체가 현실에 뒤처졌던 반면, 오늘날의 매체는 현실을 너무 앞서 나간다고 분석한다. 대중매체가 여성의 업적과 성취를 과장한 결과, 여성들의 ‘힘의 환상’은 더 뚜렷하게 강화되고 여전히 여성운동에 필요한 페미니즘은 해로운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환상은 여성들에게 성차별쯤은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만들면서 페미니즘을 무력화했다.

자유를 만끽하라! 단, ‘여성의 자리’에서만

저자는 대중매체 속 진화된 성차별의 궁극적인 목표가 여성을 '여성의 자리'에 머물게 만드는 것이라 주장한다. '걸 파워'가 달성된 시대임을 대중에게 주지시키면서 여성들이 남성들의 자리를 넘보지 못하도록 길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빌 클린턴 정권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재닛 리노를 예로 설명한다. 재닛 리노는 국가적 사건에 대해 책임 있는 태도와 훌륭한 직무 수행을 보여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키는 185cm였고, 외모나 몸짓은 사회가 규정하는 여성성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대중매체에 의해 평가받았다. 리노에 관한 농담은 정치적 유머를 가장했지만 실상은 그의 얼굴에 벗은 여성의 몸을 합성하는 등 외모를 깎아내리는 것이었다. 8년간의 재직 기간 동안 ‘여성성’에 도전한 이 여성은 지속적으로 ‘레즈비언’ 의혹에 시달렸고, 각종 쇼에서 희롱과 농담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능력 있는 지도자라도 여성성으로 치장 않는 여성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여성의 자리’가 강조되기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국민을 대표하는 여성 국회의원이 여성 예비후보자들에게 선거 운동에 대해 조언하면서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밉상’이라는 발언을 한다. 20대 여성 예비후보는 청년정책에 대한 비전보다 ‘얼짱 정치인’이라는 타이틀로 대중들에게 더 많이 소비된다. 여성이 여성의 자리에만 머물기를 소망하는 대중매체는 남성 운전자가 여성인 초보운전자를 가르치는 장면만 계속해서 보여준다.

   
▲ 자동차보험 광고에서 정웅인은 운전대를 잡고 쩔쩔매는 초보운전자 손연재에게 “밥 안 먹는 손 깜빡이~”를 외치며 운전을 가르친다. 스포츠 선수 손연재의 애칭은 그의 성적과 기량에 상관없이 늘 깜찍한 ‘체조요정’이다(위). ⓒ KB손해보험광고 갈무리 ▲ 신입 경찰 차수현(김혜수)은 기동차량을 운행하지 못해 선배 이재한 형사(조진웅)에게 호되게 혼나면서 운전을 배운다(아래). ⓒ tvN드라마<시그널> 갈무리

강남역 여성들을 향한 수전 J. 더글러스의 제안

저자는 대중매체 속에서 여성들은 페미니즘과 여성성의 기준 두 가지 모두를 만족시켜야 하고, 여성성의 기준이 조금 더 중요하다고 덧붙인다. 매체가 만들어낸 여성을 대하는 이중 잣대는 매체 밖으로 흘러나와 현실 세계를 떠돈다. 섹시한 여자를 소비하고 높이 평가하면서도 헤프다고 손가락질하며, 모성을 찬양하는 한편 ‘아줌마근성’을 비하한다. 예쁘고 어려보이는 외모를 찬양하면서 외모에 투자하는 여성을 비난한다.

   
▲ 강력계 형사인 고윤정(김성령)은 푼수 아줌마 여형사로 등장한다. 범인을 잡은 포상으로 과장에게 백을 사달라고 요구해 시청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었다(위). ⓒ SBS <미세스캅2> 갈무리 ▲ 변호사 혜성(왼쪽, 이보영)과 검사 도연(오른쪽, 이다희)은 같은 백을 맸다는 이유로 법원에서 신경전을 벌인다(아래). ⓒ SBS 드라마<너의 목소리가 들려> 갈무리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대중매체가 여성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 날로 커지고 있다. <배드 걸 굿 걸>의 목차만 보면 이 책이 미국 대중매체를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만큼, 대중매체 속 ‘진화된 성차별’은 오늘날 한국을 닮았다. 대중매체 속 여성을 방송제작에서 여성을 다루는 콘텐츠를 생산하고 규제하는 주체들과 함께 살펴봐야 한다. 한국의 공영방송사(KBS, MBC, EBS) 이사 28명 중 여성은 이인호 KBS이사장을 포함해 단 2명(모두 KBS)이다. 방송과 통신의 정책, 규제를 총괄하는 정책기관인 방송통신위원회 위원 5명과 방송 내용을 규제하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 9명도 모두 남성이다.

뉴스 기사에서 범죄 피해 여성을 ‘XX녀’라 칭하고, 집단 성폭행 사건 제목을 ‘만취한 20대 여교사 몸 속 3명의 정액’으로 뽑는 것이 우리 언론의 현주소다. 대중매체 속에서 여성들은 왜곡되고 성적 대상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중매체는 여성들을 향해 스스로 내미는 이중 잣대를 외면하며 여성상위시대가 열렸다고 외친다.

저자는 대중매체가 여성들이 그들의 자리에서만 자유롭길 원한다고 말한다. 대중매체는 협소한 의미의 ‘여성성’ 만들고, 그 경계를 벗어나는 여성은 위험하다고 암시한다. 사회적으로 용인된 경계를 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려움을 마스크로 감춘 채 강남역에 나서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이 있다. 수전 J.더글러스는 이 여성들과 이들과 함께 연대하는 남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우리는 아직도 목마르지 않은가? 이제는 진화된 성차별이라는 거대한 짐승의 심장에 커다란 말뚝을 박아버릴 때가 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는 페미니즘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그 열정, 그 대담함, 그 올곧은 정의를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디 한 번 시작하러 가볼까?"


편집: 김평화 기자
 

[계희수 기자]
단비뉴스 영상부
힘 써야할 때 쓸 줄 아는 무서운 괴물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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