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이세돌VS알파고 아닌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

교환학생으로 체코에 있을 때다. 영어를 잘 모르는 러시아 룸메이트와 소통할 때 구글 번역기로 필담을 나눴다. 러시아어를 모르는 나로서는 번역기를 사용한들 제대로 의미전달이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 말을 단문으로, 그것도 영어로 표현하기 어려워서 난처한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관용적인 한국어 표현을 대신할 말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을 때 구글 번역기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구글 번역기는 통계적 모델을 학습하며 개발된다고 한다. 이것을 고려하면 내 경험은 번역기에 한국어 데이터베이스가 부족해서 일어나는 특수한 사례이기는 하다. 하지만 번역은 단순히 단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다루는 문제다. 오히려 보디랭귀지로 룸메이트와 소통이 더 잘 되었던 것을 경험하면서 기계가 인간을 대신할 순간은 아직 멀었구나 생각했다. 이 추억을 떠올리면 요즘 세간에 유행하는 ‘정신 승리’에 빠진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이 1승 4패로 끝나면서 언론은 여러 각도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 각기 다른 관점에서 미래를 점치는 기사들이 흥미롭기도 했지만 이세돌, 즉 인간을 기준으로 승수와 패수를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했다. 인공지능이라는 것이 결국 인간이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과 기술은 단순한 경쟁 상대로 두기에는 서로 너무 다른 존재다. 다른 출발선 상에 있는 두 대상을 같은 경쟁구도 속에 밀어 넣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서로 특기가 다른 사람을 두고 외나무다리 위에서 줄다리기를 하라는 것 같지 않은가?

‘한스 모라벡의 역설’은 인간과 기계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명제다. 인간에게 쉬운 것이 기계에게 어렵고 기계에 쉬운 것이 인간에게 어렵다는 이 명제는, 이번 대국에서 바둑을 두는 컴퓨터는 있지만 바둑알을 직접 놓는 로봇이 나오지 않은 이유를 잘 보여준다. 인간의 뇌는 직관과 융통성, 유연성을 가졌지만 합리적인 판단만을 내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이타심 때문에 고전경제학의 관점에서 인간이 하지 않을 선택, 손해 보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학습을 토대로 통계학적인 결론만 내리는 기계가 인간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인간과 기계를 단순하게 1:1의 경쟁 상대로 관계 설정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르는 이유다.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는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의 근본 원리를 확립한 데카르트. ⓒ Flickr

기계와 인간이 공존하는 시대를 비관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적 가치마저 위협하는 무기력이다. 이런 때일수록 ‘이과 망했으면’이라는 말로 함축되는 자조적 유머를 던지기보다 기술을 이해하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지혜롭다. ‘알파고는 어느 학군이냐?’는 시중의 유머가 있다. ‘베타중’, ‘감마초’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입시∙학벌 위주의 과학교육에서 기술 친화적인 교육환경 조성이 시급해 보인다. 기술 적용에 있어 인문∙사회학자의 역할도 요구된다. 과학자는 설명하고 인문학자는 설득한다고 하지 않는가. 인공지능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사용할지가 문제라면 인간과 기술이 공존하는 시대 인문∙사회학자가 고민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할 공간이 커진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 통계적 확률을 찾는 인공지능 알파고를 넘어, 생각하는 인문사회학자의 존재이유(Raison d'etre)가 이세돌의 밝은 웃음에 디졸브 된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 1학기에 개설되는 인문교양수업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담당교수 김문환)].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한 서양 문명사 강의가 펼쳐집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 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박경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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