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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줄이는 문학의 힘
[인문교양특강] 신형철 조선대 교수
주제 ② 비폭력적 삶을 위하여
2016년 04월 02일 (토) 21:45:41 김근홍 이수진 홍연 기자 rmshddl1@hanmail.net

“남성, 특히 제 또래 분들이 소설을 잘 안 읽어요. 진지한 거 읽어봤자 남는 게 없다고들 하시죠.”

문학평론가인 신형철 조선대 교수는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 ‘문학’에 대해 어떻게 말할지 항상 고민스럽다. 2005년에 계간지 <문학동네>를 통해 등단한 그는 문학만큼 한 인간의 내면에 대해 깊이 있게 얘기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했다. 문학의 매체는 언어다. 영화나 연극도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작가의 묘사만큼 등장인물의 내면을 절절하고 정확하게 표현하기 힘들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위로하는 법 가르쳐주는 건 소설뿐”

신 교수는 “위로하는 걸 가르쳐 주는 건 소설밖에 없다”며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학창시절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은 어떤 구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배워본 적이 없다며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슬픔에 빠진 친구를 위로하는 법에도 무지했는데, 소설을 통해 그 방법을 익힐 수 있다고 말했다.

   
▲ 신형철 교수가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 김근홍

“오죽 답답하면 알랭드 보통이 ‘인생학교’를 만들었겠어요.”

'인생학교'는 일, 사랑, 관계, 죽음 등 인생을 살면서 부딪치는 여러 문제를 문화‧인문학‧철학‧심리학 등과 연관 지어 살펴보고,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곳이다. 인생학교 소속 교수들은 ‘직장에서 짜증이 날 때 어떤 책을 읽나요’ 식의 일상적 질문과 그 대답인 소설 처방전을 묶어 <소설이 필요할 때>를 출간한 바 있다. 그는 문학을 통해 인간에 대해 잘 알수록 폭력적인 실수를 덜 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말했다. 더 조심스럽고 섬세해진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톨스토이가 법률‧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문학적 판단을 한다”고 말했다. 문학적 판단은 인물이 누구이며, 왜 그렇게 됐는가를 최대한 섬세하게 묘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 교수는 세상 사람들이 안나 카레니나를 ‘외도를 하다 자살한 여자’라고 요약할 때 톨스토이는 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2천 쪽이 넘는 소설을 썼다고 말했다. 동일하지 않은 상황을 창조하고, 오로지 그 상황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선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문학이라고 그는 정의했다.

신 교수는 집단으로 묶거나 일반화하는 것에 ‘딴지’를 거는 것이 문학이라고 말했다. 문학은 일반화에 저항하며,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구체적인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한 인간이 이럴 수 있다’는 보편적인 깨달음을 준다. 그의 말마따나 가장 특수한 사례로 가장 깊이 있고 보편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문학인 셈이다.
 
무죄추정을 하며 남의 말을 들어라

그렇다면 일반론에 저항하여 비폭력적인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 신 교수는 먼저 ‘필요하다면 충분히 길어질 것’을 말한다.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와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공통점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두 영화의 주인공인 로렌스와 아델이 성적 소수자인 점에서 일치한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신 교수는 이 ‘성적 소수자’라는 단어가 틀리지는 않지만 무신경한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폭력 없이 말하기 위해서 더 정확하게, 더 길게 표현해야 한다. 로렌스는 ‘본래 여자로 태어났으므로 여자가 되기를 원하는 남자’, 아델은 ‘여자를 사랑할 때만 진실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여자’라고 말이다. 이 말도 너무 짧아 감독들은 세 시간짜리 영화를 만들었다.

“길게 이야기한다는 건 그 사람의 말을 길게 듣는다는 것과 같아요. 남의 이야기를 성의껏 듣는 사람들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일 거예요.”

‘무죄추정의 원칙 고수하기’는 비폭력적인 삶을 위한 두 번째 태도다. 사람들은 타인이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 믿으면서 쉽게 유죄추정의 원칙에 몸을 싣는다. 신 교수는 좋은 서사는 언제나 이런 성급한 유죄추정의 원칙을 부끄럽게 만든다고 말했다. 가령 우리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한마디로 <롤리타>의 험버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험버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방법밖에 없다. 단언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무죄추정의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우리는 험버트가, 나아가 모든 사람이 단순하게 나쁜 게 아니라 복잡하게 나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케빈은 정말 괴물일까?

다음으로 신 교수는 ‘선의 악과 악의 선을 생각하기’를 들었다. 신 교수는 선과 악의 경계 지점에 대한 성찰이 없는 영화는 깊지 않다고 판단한다 말했다. 악당을 너무 단순하게 그리면 작가가 인간을 보는 깊이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악을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악의 구조를 제대로 인식하고 비판해야 한다는 뜻이다. 선과 악을 가르는 일은 판사의 일이지 작가의 일이 아니다. 작가는 선과 악을 정말 명확히 나눌 수 있는지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해야 한다.

   
▲ '둘 중 누가 괴물일까'가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 영화 <케빈에 대하여> 공식 포스터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케빈을 소시오패스로 규정했어요. 엄마 에바는 그냥 저주받은 사람이고요. 저는 이 의견에 회의적이에요.”

<케빈에 대하여>에서 케빈은 치밀한 계획으로 학교 친구들, 아빠와 동생을 죽인다. 에바는 케빈 대신 죗값을 치르겠다며 마을에서 수난을 겪는다. 케빈이 괴물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케빈 쪽에서 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에바는 케빈을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 케빈은 “네가 없을 때 더 행복했다”고 말하는 엄마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받는다. 에바 때문에 케빈이 살인을 저질렀다면 결국 괴물은 엄마이면서 모성애를 느끼지 못하는 에바가 아닌가?

신 교수는 둘 중 누구도 괴물은 아니라고 말한다. 케빈은 엄마의 사랑을 원했을 뿐이고 에바는 그저 아이를 잘 키울 수 없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영화는 쉽게 말하지 않고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두고 천천히 두 사람의 내면을 보여준다. 케빈이 에바에게 상처를 받고 에바가 그럼에도 케빈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말이다. 이런 장면들을 보며 우리는 주인공들을 이해하게 된다.

신 교수는 앞서 좋은 서사는 사람들에게 선의 악, 악의 선을 생각하게 한다고 말했다. 좋은 서사는 나아가 ‘단순한 기소에 실패’한다. 주인공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이야기 내부에 있다. 일단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는 한, 누구도 법적 혹은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성찰할 뿐이다.

마지막은 ‘타인의 불행을 유일무이한 것으로 기억하기’다. 신 교수는 많은 이야기의 원천이 인간의 불행이기에 비평이 타인의 불행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일이 되고 만다고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폭력 행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먼저 텍스트를 섣불리 이론과 개념으로 쉽게 분류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인물의 불행과 상처가 유일무이한 것으로 남을 수 있도록 해석해야 한다.

문학은 복잡한 진실을 끈질기게 지켜보는 것

신 교수에 따르면 자신의 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되는 모든 존재는 억울하다. 이 억울함이 폭력의 결과다. 신 교수는 점점 폭력적인 존재가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고, 단편적인 정보로 판단을 내리면서 즐거워한다. 인터넷 뉴스의 댓글에, 트위터에, 각종 소문 속에 이들이 존재한다. 신 교수는 그렇기에 문학이 귀하다고 말한다. 문학은 가장 끝까지 듣고 가장 나중에 판단하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는 말하기가 편하고 정신적으로는 글쓰기가 편해요. 글쓰기는 고칠 수 있으니까 폭력을 쓸 가능성을 줄일 수 있거든요. 그런데 글쓰기를 시작한 시절에는 말하기처럼 글을 썼어요. 문장들은 아무리 수색해도 끝까지 없앨 수 없어요. 그래서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진부한 말을 실감하죠.”

모두가 자신만의 매체를 갖게 된 시대, 신 교수는 이 시대가 선사한 축복보다 부정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에 따르면 SNS에 매일 새로운 기사를 업데이트하는 많은 이들은 너무 쉽게 펜을 휘두른다. 그들의 펜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폭력으로 다가간다. 그들은 진실의 복잡성에 대한 두려움과 존중이 없다. 진실은 단순한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복잡한 것이라는 말도 맞다. 문학은 단순해 보이는 진실이 실은 복잡한 것임을 끈질기게 지켜보는 일이다.

“세상은 점점 빨라지고 있고, 글과 말은 점점 섞이고 있어요. 빠른 속도로 깊게 생각하는 법을 저는 모릅니다. 저는 어쩌면 이 세계 자체가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문학에 적대적인 곳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과 싸우고 있습니다.”

처형되는 아들보다 포로가 된 신하를 슬퍼한 이유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명칭 안에 전령사 헤르메스(Hermes)의 이름이 섞여 있는 것은 해석의 본질이 전달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신 교수는 “해석자는 이미 완성된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잉태하고 있는 것을 끌어내 전한다”며 해석은 일종의 창조라고 설명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지만 잠재적 유에서 현실적인 유를, 감각적 유에서 논리적 유를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해석은 무한할 수 있지만 모든 해석이 평등하게 옳은 것은 아니다.

“정답과 오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더 좋은 해석과 덜 좋은 해석은 존재합니다. 저는 이를 가르는 기준이 생산된 인식의 깊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석으로 생산된 인식이 심오할 때 그 해석은 거꾸로 대상 작품을 심오한 것이 되게 합니다. 이러한 선순환이 가능하면 좋은 해석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해석은 작품을 다시 쓰는 일로 볼 수 있습니다. 작품을 까는 것이 아니라 낳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해석을 ‘인식의 산파술’이라고 부릅니다.”

신 교수는 좋은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의 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집트 왕이 페르시아에 패해서 붙잡혔을 때 페르시아 왕은 포로가 된 이집트 왕에게 모욕을 주고자 했다. 그는 승리한 페르시아의 개선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이집트 왕을 세워둘 것을 명령했다. 먼저 그의 딸인 공주가 하녀가 되어 물동이를 지고 우물로 가는 모습을 지켜보게 했다. 모든 이집트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슬퍼했지만, 이집트 왕은 눈을 땅 위로 떨어뜨리고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그다음에는 그의 아들이 처형을 당하기 위해 행렬 속에서 끌려가는 것을 보게 했다. 이번에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나 뒤이어 왕의 하인인 늙고 불쌍한 남자가 포로 행렬에 섞여 있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이집트 왕은 손으로 머리를 치면서 가장 깊은 슬픔을 나타냈다.

“이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의 힘을 보여줍니다. 왕이 가족에서는 안 울고 하인에서는 울었는지 너무 궁금하지만 말하지 않습니다.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회자되면서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 발터 벤야민의 세 가지 해석을 들려주는 신형철 교수. ⓒ 김근홍

독일 평론가 발터 벤야민은 저서 <이야기꾼과 소설가>에서 이 이야기를 해석한 프랑스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의 해석을 소개했다. 몽테뉴는 이집트 왕이 딸과 아들이 지나가는 동안 슬픔을 꾹 참았다가 하인이 지나갈 때 슬픔이 정점에 올라 운 것이라고 말했다. 신 교수는 이러한 몽테뉴의 해석에 대해 “말은 되지만 인식을 생산해 내는 좋은 해석은 아니”라고 평가했다. 벤야민도 신 교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몽테뉴와 다른 세 가지 해석을 제시했다.

첫 번째 해석은 공동운명체인 가족이 전쟁에 패해 비참한 상황에 놓인 것은 특별히 충격적인 일이 아니지만, 주인을 잘못 만난 하인이 고생하는 모습에 죄책감을 더 느낀다는 것이다. 두 번째 해석은 사람의 감정은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을 때 더 강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가족 때문에 운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펑펑 우는 것처럼 나와 거리가 없는 존재인 가족보다 거리가 있는 하인의 상황이 더 슬펐을 것이라는 의미다.

세 번째 해석은 슬픔이라는 감정은 긴장 상태에 있다가 이완됐을 때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아들과 딸이 비참한 상황에 부닥친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상황이라서 극도의 긴장 상태이지만 하인은 덜 고통스럽기 때문에 긴장이 이완되면서 통곡한 것이라는 뜻이다. 신 교수는 “어떤 해석도 틀렸다고 할 수 없다”면서도 “첫 번째 해석보다 두 번째 해석이, 두 번째 해석보다 세 번째 해석이 더 깊이 있는 인식을 생산하기 때문에 더 좋은 해석”이라고 말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대학원 때 벤야민을 통해 접했습니다. 원문인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을 생각을 안 하다가 올해 펼쳐봤습니다. 벤야민에게 15년 동안 속았습니다. 원문에는 이집트 왕이 운 이유에 대해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하인이 아니라 술친구였습니다. 왕은 ‘집안의 불행은 울고불고하기에는 너무 크지만 제 친구의 고통은 울어줄 만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아무리 유명해도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으면 안 된다는 것과 왕이 대답했다고 하더라도 원작보다 인식이 깊은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연습

신 교수는 100개의 해석이 있으면 글쓴이가 100위를 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해석이 심판 없는 게임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장 깊이 있다고 평가되는 해석이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된다고 말했다. 어처구니없는 해석은 사라지는 반면, 깊이 있는 해석에 대한 생각은 모인다는 뜻이다. 신 교수는 “여기서 자연스럽게 비폭력적인 삶의 방식을 배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폭력적인 단언과 반대편에 서는 것이 좋은 비평의 조건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에 대한 폭력적인 단언을 즐기는 사람들도 당사자 앞에서는 그러지 못합니다. 어떤 작품을 써도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면 작품 앞에 섬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2학기 <인문교양특강>은 정연주 조효제 정희진 김혜원 이문재 이택광 신형철 선생님이 강연을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 : 서혜미 기자

[김근홍 기자]
단비뉴스 영상부, 전략부, 미디어팀 김근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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