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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되는 삶’ 위해 원전 거부하기
[마음을 흔든 책]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의 ‘발언Ⅱ’
2016년 03월 12일 (토) 20:40:40 김민지 기자 mgone357@naver.com

“헌법에 보장된 시민, 주인으로서의 국민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언론의 자유를 누려야 되고 표현의 자유를 누려야 하며 어떠한 억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운명을 자기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달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10시간 넘게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이어간 더불어민주당 은수미(53) 의원은 ‘억압’이라는 단어에서 잠시 멈췄다. 물을 한 잔 마시고 가슴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은 의원은 이때 ‘청년 아르바이트생,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 일용직 아저씨’를 떠올렸다고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말했다.

   
▲ 10시간 넘게 필리버스터를 이어간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의원은 ‘억압’이라는 단어에서 가슴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 <오마이TV> 화면 갈무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동영상, 카드뉴스 등으로 편집된 은 의원의 이 발언에는 “국민을 주인이라 칭하는 발언에 울컥했다”는 등의 댓글이 많이 달렸다.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사회를 지옥이라 부르고, 자신을 ‘금수저’에 대비되는 ‘흙수저’로 비하하는 이 땅의 청년들이 스스로를 나라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또 각자가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이 되기도 쉽지 않다.

소설 ‘돈키호테’를 무료로 나눠준 베네수엘라 정부

생태인문지 <녹색평론>의 발행인 김종철이 최근 출간한 <발언I>과 <발언Ⅱ>는 ‘각자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세상’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저자가 2008년 5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시사인>, <한겨레>, <경향신문>에 쓴 글들을 2012년 9월을 기준으로 나눠 묶은 두 책은 ‘성장 없는 시대에서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한다. 김종철 발행인은 1972년 ‘역사관과 상상력’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에 당선된 후 문학평론집 <시와 역사적 상상력>(1978), <신동엽론>(1989) 등을 펴냈고 영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를 지냈다. 그는 여러 칼럼을 통해 대안에너지와 생태적 생활방식 도입으로 ‘핵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다.

   
▲ <녹색평론>의 발행인 김종철이 최근 출간한 <발언I>과 <발언Ⅱ>는 ‘각자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세상’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 녹색평론사

<발언II>에서 그는 특히 환경과 정치가 ‘국민이 주인 되는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두 요소임을 강조한다. 저자는 1999년부터 2013년까지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지내다 임기 중 암으로 숨진 우고 차베스의 예를 들어 국민 각자가 주체가 되는 삶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가난한 사람은 밥만 먹여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위 엘리트들이 가장 흔히 범하는 착각이다. 민중에게는 밥도 중요하지만 개개인은 각기 인격적인 존재로서 자기 인생의 주체로 살고자 하는 깊은 욕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차베스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무상교육을 시행하는 베네수엘라는 문맹률 제로(0) 국가다. 정부는 스페인어로 쓰인 소설 <돈키호테>를 100만 부 넘게 발간해 무료로 배포하기도 했다. 차베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이 문맹퇴치 운동이었다. 차베스 치하에서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정부 정책에 따라 글을 배우고 문화를 즐기게 되었으며 대학에 진학했다. 국민들은 농촌과 도시 등 지역에 따라 20세대부터 200세대 정도의 가구를 1개 단위로 묶은 ‘공동체 평의회(communal councils)’를 결성해 자기 동네와 관련된 문제를 토의, 결정했다. 그야말로 ‘풀뿌리 민주주의’를 경험한 것이다. 정치에서 소외됐던 가난한 사람들이 공부하고 책을 읽으며 자기 동네를 바꿔나갔다.

저자는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차베스를 통해서 모처럼 민주주의를 체험한 민중을 다시 노예 시절로 되돌리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차베스 이전의 베네수엘라는 1958년까지 10년간 군사독재를 경험했으며, 석유산업에 지나치게 의존한 정부가 펼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1980년대에 국가부채 위기를 겪기도 했다.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바닥이었다. 차베스는 서방언론 등으로부터 ‘독재자’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지만 사실 석유를 바탕으로 형성된 기득권세력과 피나는 투쟁을 통해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시행한 정치인이었다고 저자는 설명했다.

지난달 국회에서 9일 넘게 이어진 필리버스터가 의미 있었던 것은 여당의 독주에 질리고 무력한 야당에 실망했던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의 본회의장 폭력 사태 등으로 조롱받던 국회가 부모·자녀들이 함께 찾아와 방청하는 학습의 장으로 바뀌었다. 대화의 가치와 소통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저자를 흉내 내어 말한다면, 이렇게 민주주의를 체험한 이들을 권력자의 이익을 위해 억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공동체 속의 조화로운 관계를 중시하는 것이 ‘좋은 삶’

   
▲ 에콰도르와 볼리비아의 ‘좋은 삶과 자연의 권리’는‘어머니 대지’라는 뜻의 ‘파차마마(Pachamama)’에 기초한 개념이다. ⓒ flickr

저자는 남미의 에콰도르와 볼리비아가 신헌법에 ‘좋은 삶과 자연의 권리’를 넣었다는 사실을 소개한다. 이는 ‘어머니 대지’라는 뜻의 ‘파차마마(Pachamama)’에 기초한 개념으로 국민이 자연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좋은 삶이란 소유와 소비를 기반으로 한 개인주의적 삶이 아니라 공동체 속의 조화로운 관계를 중시하는 검소한 삶이며, 인간끼리의 관계를 넘어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지난달 27일 전남 영광의 한빛원전 1호기가 터빈과 복수기를 이어주는 고무소재의 이음관 파손으로 가동 중지됐다. 자칫하면 방사능 누출과 전력 수급 차단으로 이어질 뻔한 사고였다. 1986년 처음 상업운전을 시작한 한빛 1호기는 2025년 설계수명 만료를 앞두고 있다. 노후 원전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이 갈수록 커지고, 실제로 이런저런 사고가 일어나고 있는데도 정부는 원전을 줄이는 대신 2029년까지 12기를 더 짓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저자는 책에서 이런 정책을 지켜보는 절망감을 토로한다.

“지난 20여 년간 녹색운동과 직접 간접으로 인연을 맺어왔지만 아마도 유일한 성과는 국가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시민사회의 힘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통감한 것이었다.”

변화는 쉽게 오지 않는다. 그러나 명확한 현실인식은 앞으로 나아갈 동력이 된다. 저자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원자력에 기반 한 사회경제체제를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2012년 3월 녹색당 창설에 동참하게 됐다고 밝혔다.

희망의 조짐도 있다. 지난해 11월 원전 유치 여부를 주민투표에 부쳤던 삼척시는 ‘주인 되는 삶’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투표율이 70퍼센트에 육박했고 원전 유치 반대표가 85퍼센트에 달했다. 저자는 “투표율 60퍼센트, 지지율 50퍼센트 정도로 당선된 대통령이 누릴 수 있는 수준보다 월등한 민주적 권위를 인정받아 마땅한 결과”라고 말했다. 자연의 혜택을 이용해 성장만 추구하다 어느새 삶의 주인 자리에서 밀려난 우리. 책을 덮으니 “환경과의 관계를 바로잡고, 경제적 소외를 벗어나려면 코앞에 다가온 4월 총선에서부터 주인 된 책임감을 갖고 한 표를 행사해야 한다”고 저자가 말하는 것만 같다.


편집 : 서혜미 기자

[김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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