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밥'

▲ 구은모 기자

꽤나 오랜 기간 식판에 밥을 먹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 고등학교를 나올 때까지, 입대해서 제대할 때까지, 나는 대학원에서도 식판에 밥을 먹었다. 수없이 많은 끼니를 식판 위에서 해결했건만 여전히 식판 위의 식사는 우울하다.

나는 사람이 붐비는 걸 좋아하지 않고, 자연히 부산스러운 것도 싫다. 그런 곳에서 음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는 것이 탐탁지 않고, 받아 든 음식을 흘리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도 내키지 않는다. 이보다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모두가 똑같은 그릇에 똑같은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이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내 앞 사람과 내가 구분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꺼림칙하다.

그럼에도 난 끊임없이 식판 더미를 향해 걸어갔고 식판을 집어 들었다. 식판에 이물질이 묻지 않았는지 살펴보는 버릇도 생겼다. 밥 한 끼 먹는 것조차 ‘관성의 노예’가 됐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우울함을 넘어 비애감에 잠긴다. 식판 보급은 인류를 식판으로 만들려는 자의 계략이다. 식판에 밥을 먹다 보면 식판이 되는 것 같은 감정에 사로잡힌다. 내가 식판에 있는 음식을 먹는 건지 식판이 나를 삼키는 건지 헷갈린다.

식판에도 나름대로 미덕이 있다. 식판에 밥을 먹는 시간, 그 시간만큼은 그 공간에 있는 모두가 하나다. 식판은 평등인가, 아니면 박애정신의 산물인가? 그렇다면 내가 식판을 집어 들며 우울해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식판에 담긴 밥은 평등의 상징이 되기에는 이미지가 너무 손상됐다. 식판은 분명 평등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동시에 획일성, 선택의 자유 침해, 하층계급의 전유물 같은 각종 부정적 이미지도 강하게 덧칠돼 있다.

▲ 식판에 담긴 밥은 평등의 상징이 되기에는 이미지가 너무 손상됐다. ⓒ Flickr

식판의 밥이 평등의 상징으로 자리 잡기에는 세상이 만만치가 않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돈으로 사람의 ‘급’을 나누는 세상이다. 급의 차이는 대개 소비로 드러난다. 어떤 집에 사는지, 어떤 차를 타는지, 어디서 무엇을 먹는지가 자신을 증명한다. 끝없는 증명대결은 대다수에게 열패감을 안겨준다. 결국 자기보다 못한 이들과 차이를 부각시키는 것만이 대안이자 위안이 된다. 인간은 남을 열등하게 만들어 자신의 위신을 세우려는 경향이 있는 걸까? 이런 상황에서 차이를 없애려는 식판의 밥은 인간 본성에 어긋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귀해지고 싶은 나는 식판 따위에 밥을 받아 먹는 게 불편했다. 식판은 무료급식소의 노숙인, 전쟁 통의 난민, 게토의 유대인들이나 사용하는 천한 물건 아니던가? 그런데 식판 따위가 그들의 방식으로 나에게 식사를 강요하다니! 이건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 굴욕적인 일이다. 모두가 같은 그릇에 같은 식사를 하다니! 내가 사라지는 것 같다. 식판 보급은 인류를 식판처럼 규격화하려는 자의 계략이다.

바야흐로 식판의 시대가 도래했다. 나보다 급이 높으신 부잣집 도련님도 식판에 밥을 먹는 시대가 온 것이다. 식판이 돌이킬 수 없는 대세라면 식판의 급이라도 나눠야 한다. 차이는 차별이 아니다. 평등은 고귀한 이념이지만 식판의 평등은 사절하고 싶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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