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이름’

▲ 장환순 기자

나이키와 아디다스는 못 신어도 르까프나 아식스는 신어야 했다. ‘시장표 운동화’의 쪽팔림을 중학생이 되고서야 알았다. 시골 초등학교에 드물던 메이커 신발이 시내 중학교에서는 아이들 대다수가 신고 있었다. ‘이름’ 없는 운동화를 신었다고 놀림 받은 건 아니지만, 남들과 다르다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3선(線)이 아닌 4선이 새겨진 운동화는 거의 새것인데도 애물단지가 됐다. 조르고 졸라 브랜드 매장에서 운동화를 샀다. 선 하나 줄었을 뿐인데,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우리가 하는 수많은 선택에서 타인의 앞선 결정은 무엇보다 중요한 기준이 된다. 머리가 커지면서 그런 방식을 체화한다. 메이커 운동화의 매력은 친구들과 비슷한 걸 신는다는 동질감이었다. 그것이 주는 안도감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유사한 심리실험도 있다. 누가 봐도 A가 정답이지만 모두가 B를 지목하면 내 의견도 그쪽으로 기운다. 이른바 ‘동조효과’를 보여주는 실험은 이외에도 많다. 그만큼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가 생각보다 어렵다.

낯선 이름은 미심쩍어도, 널리 알려진 이름에는 신뢰가 간다. 베스트셀러와 박스오피스는 단순한 집계를 넘어 많은 이들이 ‘선택의 잣대’로 삼아온 지 오래다. 베스트셀러에 여러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남들이 사니 나도 사보는 단순한 심리의 반영일 수 있다. 쓰임새나 취향보다 타인의 수요가 선택을 이끈다. 몇몇 출판사들이 사재기에 몰두했던 이유다.

타인을 평가하거나 정치적 태도를 취할 때도 우리는 대세에 편승하곤 한다. 지역주의를 이용해 손쉽게 표를 얻으려는 정치인도 한심하지만, ‘묻지마 투표’를 하거나 ‘바람’에 마냥 흔들리는 유권자도 정치를 병들게 하는 공범이다. ‘비판적 지식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황우석 사태 때 많은 지식인들이 글과 말로 그를 옹호하며 대세를 좇았다. 문제는 동조와 편승이 폭력으로 변질될 때다. 홀로코스트는 대다수 독일인들이 자각하지 않고 나치에 동조해 빚어진 참혹한 역사다.

▲ 한국 사회에서는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하기에 쉽게 '동조'할 수 있다. 하지만 단체가 주는 편안함에서 벗어나 개인이 주관을 가질 때 자기발전에 가까워질 수 있다. © Pixabay

사회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서 보듯, 사람들의 동조는 자존감 등 개인의 성격 못지않게 사회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는다.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타인에 쉽게 동조하는 이들이 많았다. 집단주의 문화가 뿌리 깊은 한국사회에 쏠림 현상이 유별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대세에 편승하는 편리함이 자기 발전을 어렵게 하고, 사회적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미국 프로야구팀 오클랜드의 단장인 빌리 빈은 새로운 선수 평가기준을 도입했다. 그는 타율이나 홈런이 아닌 출루율과 장타율 등 다른 구단이 눈여겨보지 않던 기록을 따져 선수를 영입했다. ‘머니볼’이라는 저비용·고효율 구단 운영방식이다. 이름 없는 선수들이 모인 팀의 미래를 우려하는 시선이 많았지만, 그해 오클랜드는 20연승의 기적을 이뤘다. 통념과 대세를 따르지 않았기에 거둔 성과였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건 ‘이름’에 휩쓸리는 동조가 아닌 개개인의 주관이다. 이름은 껍데기에 불과할 때가 많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 제6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에서 마감 날짜를 어겨 응모하는 바람에 수상작으로 뽑히지는 않았으나 소개할 만한 글이라고 보아 <단비뉴스>에 싣습니다. 글쓴이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2학년생입니다.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