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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과 베트남 학살 흔적을 찍다
[단비인터뷰] 근현대사의 희생자 기록하는 사진작가 이재갑
2015년 08월 03일 (월) 17:28:11 오소영 기자 pangkykr@naver.com

“우리의 고향은 경상북도인데 나는야 어째서 숯 파러 왔느냐. 일본 땅 좋다고 누가 말했느냐. 일본 땅 와보니 배고파 못 살겠네. 숯을 팔 때는 배고파 죽겠는데 그 말만 하면은 몽두리 맞았네. 배가 고파요! 어머니 보고 싶소! 고향에 가고 싶소!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썼네.”

일본 후쿠오카 현 지쿠호 지역 다다구마 탄광 인근의 연고자를 알 수 없는 묘지. 강제징용 조선인 2세인 배래선 선생(작고)이 묘 위에 막걸리를 뿌리며 ‘신세타령가’를 불렀다. 당시 조선인은 광산에서 강제노역을 하다 목숨을 잃어도 제대로 장례를 치를 수 없었다. 밤늦은 시간 동료들이 유골을 수습해 근처에 묻고, 폐광석으로 조선인의 묘지를 몰래 표시해 두었다고 한다.

   
▲ 서울 종로구 견지동 스페이스99에서 <단비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는 이재갑 작가. ⓒ 오소영

열혈 사진학도, 제국주의와 전쟁의 상처에 주목하다 

2008년 1월 배 선생과 함께 강제징용자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 사람이 이재갑(49) 사진작가다. 그는 1996년부터 10여 년 동안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조선인 강제징용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가 다녀온 일본 나가사키현의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 하시마 섬의 하시마 탄광, 후쿠오카 현의 미이케 탄광 등은 최근 유네스코(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결정돼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 작가는 강제징용 조선인 외에 주한미군과 한인 여성 사이의 혼혈인 1세대, 한국전쟁 직후 민간인 2천여 명이 학살된 경북 경산시 코발트 광산 사건, 꽝응아이(Quang Ngai) 성 등 베트남 전역에서 일어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까지 ‘근현대 비극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지난 5월 12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의 전시장 스페이스99에서 이 작가를 만났다.

   
▲ 이재갑 작가는 인화 작업에 매료돼 사진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 오소영

이 작가가 처음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구의 한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닐 때였다. 당시 그가 동아리활동을 하던 응용미술반 바로 옆에 사진반의 암실이 있었다. 하루는 사진반 교사가 그에게 사진 인화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교사는 종이를 집은 집게를 건네며 책상 위 네모난 그릇에 담그라고 했다.

“흰 인화지를 약품 섞인 물에 담그니 글자가 올라왔어요. 얼마나 신기했겠습니까. 그때 사진에 반하게 됐죠. 지금도 인화작업이 재미없어지면 사진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해요.”

인화작업의 매력에 빠진 그는 계명전문대 사진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사진을 배웠다. 그리고 1991년 ‘무대 뒤의 차가운 풍경’을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연극, 무용, 음악 등 화려한 공연 무대 뒤 분장실에서 초조하게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단원들의 모습에 매료돼 그 ‘이면의 모습’을 한 컷 한 컷 사진으로 담은 것이었다.

그해 겨울 그의 시야엔 또 다른 ‘이면’의 세계가 들어왔다. 아침 TV방송에 흑인혼혈 가수 박일준(61)씨가 나와 “우유를 마시면 (피부가) 하얗게 되는 줄 알고 많이 먹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방청객들은 모두 웃었지만 그는 충격을 받았다. 그날 이후 그는 경기도 파주와 동두천, 제주도 일대를 다니며 혼혈 1세대를 찾았다. 주한 미군과 한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나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방인처럼 살아온 사람들. 그들에겐 독특한 사연과 많은 아픔이 있었다. 그 작품들로 ‘혼혈인-내 안의 또 다른 초상’이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오키나와 ‘한의 비’에서 할아버지 동네의 청년을 만나다

그는 “혼혈 1세대에 대해 공부하고 나니 6.25 전쟁이, 이를 거슬러 올라가니 일본이 보였다”고 말했다. 먼저 일본이 우리나라에 남긴 근대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때부터 그의 관심은 적산가옥(일본인이 소유했다가 두고 떠난 집)에 쏠렸다. 그는 1910년부터 1945년 사이 세워진 우리나라의 근대 건축물을 찾아 카메라에 담았다. 다음으로 일본이 노동력 동원을 위해 조선인을 강제로 끌고 갔던 징용지를 찾아 나섰다. 2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군이 원자폭탄을 투하한 히로시마의 평화교육연구소에서 활동하는 이승훈(48) 선생이 도움을 줬다. 후쿠오카, 나가사키, 히로시마, 오사카, 오키나와 등에서 강제징용 노동자의 흔적을 찾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오사카 인근의 토굴이었어요. (수도인) 도쿄가 공습을 받으면 천황이 대피하려 만들었다고 해요. 한 10킬로미터(km) 되는 긴 굴이었어요. 그 굴을 만드는 데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 4,000명이 동원됐어요. 굴을 다 파고 난 뒤엔 모두 학살됐죠. 천황이 피신할 곳인데 이들 중 한 명이라도 밖에서 동굴 구조를 발설하면 안 되니까요.”

일본과 한국을 4년 정도 오가자 그는 반복되는 작업에 지치는 느낌이었다. 그때 오키나와에서 ‘한(恨)의 비(碑)’를 발견했다. 그 비에는 강제 동원으로 힘겹게 살다 간 조선인들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는데, 그는 거기서 그의 원적지인 경북 상주시 낙동면 수정리를 발견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의 비를 보자마자 일본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마을 청년들이 많았다는 할아버지의 말이 떠올랐어요. 이 작업(조선인 강제 노동자에 대한 기록)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죠. 내가 와야 하는 곳이라고 느꼈어요.”

그는 긴 작업 끝에 지난 2011년 일본의 강제징용지를 사진과 글로 기록한 책 <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을 펴냈다.

아기 분유가 떨어질 만큼 생활고를 겪던 시절도

이 작가는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사진 작업을 위해 국내와 외국 곳곳을 다닌다.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지난 2002년 결혼해 초등학생 딸과 아들, 유치원생 막내아들을 둔 그는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는 아니다”며 멋쩍게 웃었다. 사진작업에 몰두하는 동안 경제적 어려움도 있었다. 첫 딸을 낳고 3개월쯤 지났을 때, 아내를 대신해 아이를 돌보고 있는데 밤에 아이가 울었다. 배가 고픈가 싶어 찬장에서 분유통을 찾았더니 텅 비어 있었다.
 
“내가 행복하면 가족도 행복해야 되잖아요. 근데 내가 (좋은 사진을 찍어)행복하면 가족은 더 불행해지는 거예요. 그때 처음으로 돈을 벌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잘 팔리는 사진을 찾다보니 풍경사진밖에 없더라고요.”

그는 풍경사진을 찍긴 했지만 전시회에는 결국 풍경이 아닌 다른 사진을 골라 걸었다. 풍경 사진에 마음이 가질 않으니 손도 안 가더라고 했다. 지금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책도 출판하면서 형편이 나아졌다고 한다.

   
▲ 전시회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한쪽 벽면에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사진이 걸려있다. ⓒ 오소영

그는 지난 4월 7일부터 5월 7일까지 스페이스99에서 베트남전 민간인 피해자의 모습 등을 담은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이란 전시회를 열었다. 베트남전 격전지 곳곳에 세워진 60여 개의 한국군 증오비, 한국군에 의해 부모와 형제가 모두 살해되고 홀로 살아남은 피해자의 모습 등이 전시됐다. 베트남에 파병됐던 퇴역군인들로 구성된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는 전시장 인근에서 “월남참전용사 모욕하는 사진전 개최를 반대한다”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역사의 상처가 아물기 위해선 치유의 과정 필요

 “저는 잘못을 고발하려는 게 아니에요. 제 작업에 권력 혹은 이념의 문제는 없어요. 제 작업의 근간은 사람이에요. 제도권의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죠. 미군과의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 조선인 강제징용노동자, 코발트광산 민간인 학살 피해자,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 모두 마찬가지죠.”

그는 “상처를 준 자들은 쉽게 잊지만 상처를 입은 자는 그렇지 않다”며 “상처가 아물기 위해선 치유의 과정이 필요하고, (나는) 치유의 매개체로 사진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역사에서 잊힌 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기억함으로써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그의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의 이야기로 지난번 전시회에서 일부러 비워 놓았던 한쪽 벽면을 마저 채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관심을 가졌던 모든 근현대사의 희생자들에 대한 기록을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작업을 끝내면 이 작업은 과거에 머물게 돼요. 작업이 의미를 가지려면 이후에도 계속되어야 하죠. 지난 10년 동안 (혼혈인을) 찍었다고 지금은 안 한다면 그것은 과거에 머무는 거죠. 과거로 끝나지 않고 현재가 되고 미래가 되려면 지금 내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소영 기자]
단비뉴스 청년팀, 시사현안팀 오소영입니다.
남도 나와 같이, 겉도 속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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