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무임승차'

▲ 조창훈 기자

지난해 9월 서울 광화문 세월호 유가족들의 단식장에서 보여준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 회원들의 행위는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40여 일 굶은 유가족 앞에서 피자와 치킨을 먹었다. 음식을 유가족 텐트 앞에 던지기도 했다. 그들은 이 반인륜적인 행위에 명분을 붙여 ‘폭식 투쟁’이라 이름 붙였다. 일부는 ‘906 광화문 대첩’이라 자찬까지 했다.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이코패스나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단지 세상의 관심을 끌기 위해 퍼포먼스를 벌인 것도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시위방식의 하나로 택한 일이었다. <시사인> 367호는 일베가 자신들의 논리로 ‘일베식 정의구현’을 실천한 것이라 분석했다. 일베의 눈에 세월호 유가족은 ‘다른 교통사고 유족과 같은데 대학 특례입학과 보상금을 달라며 떼쓰는 무임승차자’다. 세월호 사고가 사회적으로 주목을 더 받았다는 이유로 천안함 유족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바라고, 천문학적 세금이 투여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나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폭식 투쟁에 참가한 이들은 욕을 먹지만 정의구현을 위해 앞장선, 용기 있는 전사로 추앙된다. 일베 회원들은 이들을 ‘애국시민’이라 불렀다.

▲ 일베는 폭식투쟁에 참가한 이들을 정의구현을 위해 앞장선 용기 있는 전사로 추켜올렸다. 이들을 ‘애국시민’이라 불렀다. ⓒ 오마이TV 갈무리

일베에겐 세월호 유가족만 ‘산업화(일베 이용자들이 진보·개혁성향의 사람들을 보수적으로 전향하도록 하는 일) 대상’이 아니다. 일베의 대표적인 적(敵)이자 산업화 대상은 한국 사회에 상대적으로 소수자로 분류되는 이들로 여성, 개혁·진보세력, 호남 출신이다. 일베에게 이들은 남성, 산업화 세력, 영남 출신처럼 경제발전에 기여한 바도 없으면서 특별한 대우와 과도한 보상을 바라는 무임승차자다. 그래서 욕을 먹더라도 ‘광화문 대첩’처럼 이들을 응징하는 것이 정의를 구현하는 용기이고, 그런 행위로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일베 논리가 무서운 이유는 ‘무임승차’라는 개념이 공감하기 쉬운 가연성 소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조직에서 일은 하지 않고 점수를 받는 팀원, 명절에 세뱃돈을 주진 않으면서 자기 자식 세뱃돈만 챙기는 친척, 부하 직원들이 성취한 일을 가로채는 부서장 등에 쉽게 분노한다. 이런 일상적 무임승차에 대한 분노가 일베식 논리를 받아들이는 촉매제가 되는 것이다.

일베식 논리의 문제는 소수자에게 무임승차자란 딱지를 붙여버린 것이다. 소수자는 무임승차자가 아니다. 무임승차자가 다른 사람의 공적에 묻어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존재라면, 소수자는 주류 중심의 사회구조가 만들어낸 이 사회의 피해자다. 자신의 능력과 조건으로는 균등한 기회를 얻지 못하기에 국가가 도움을 주어야 한다. 여성, 호남, 개혁·진보세력 등은 장애인이나 노인처럼 명백한 약자로 볼 순 없으나 상대적 소수 세력이란 이유만으로 주류 세력만큼 기회를 얻지 못한다. 세월호 유가족은 정부의 총체적 부실로 일시적인 약자가 됐다. 일베는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이들이 나라 전체에 기여하지 않는 사례에만 주목해 혐오를 뿜어낸다. 일베처럼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끊임없이 무임승차자란 딱지를 붙인다면,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한 소수자와 무임승차자를 구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미 지금도 구분하지 못하거나 구분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소수자를 무임승차자로 규정하고 이들에게 분노를 쏟게 되면 이 사회가 응당 감당해야 할 배려는 잊게 된다. 오히려 이들을 거리낌 없이 차별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첨예한 복지 논쟁에서 우리가 선별 복지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선별적 복지를 받는 사람을 무임승차자로 낙인찍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일베식 정의구현’에서 이미 그 징후를 뚜렷하게 보았듯이, ‘복지를 받지 않는 자’들이 ‘복지 받는 자’들을 적극적으로 차별할 수 있다. 복지 받는 자들에 대한 혐오는 물론, 이들을 사회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날 수 있다. 한국은 이미 ‘증세 없는 복지’의 한계에 봉착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인 복지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 세금을 내기 싫어하는 사람들과 무임승차논리가 결합한다면 폭발적인 파급력을 갖게 된다. 세금을 내고 복지혜택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무임승차를 탓하며 세금을 낮추려 할 것이고 우리가 꿈꾸는 보편복지는 요원한 꿈이 될 것이다.

선별적 복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는 것이 부의 재분배에 효과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무상급식을 없애고 그 예산으로 가난한 학생에 대한 지원을 늘리기로 한 것처럼 선별 복지는 조금 더 많은 지원을 약자에게 몰아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겐 ‘복지 시혜를 받는 2등 시민’, 나아가서는 ‘국가 재정을 거덜 내는 무임승차자’란 꼬리표가 붙을 것이다. 이 주장은 경제적 측면에서 분배의 효율성에 집착한 나머지 사회적 측면에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선별 복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누가 복지혜택을 받는지를 모르게 하면 된다고 주장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아이들은 급식비 내느냐 안 내느냐만이 아니라 옷차림, 사는 동네만 봐도 경제수준을 안다. ‘가난한 집 아이=복지 시혜를 받는 아이’라는 등식은 필연적이며, 이들은 일베류 아이들로부터 ‘척결해야 할 무임승차자로 간주될 것이다.

▲ 아이들은 급식비 내느냐 안내느냐만이 아니라 옷차림, 사는 동네만 봐도 경제수준을 안다. ‘가난한 집 아이=복지 시혜를 받는 아이’라는 등식은 필연적이며, 이들은 일베류 아이들로부터 ‘척결해야 할 무임승차자로 간주될 것이다. ⓒ MBC경남 캡쳐사진

소수자, 피해자, 약자에 사회구조라는 공식을 대입해보면 무임승차자가 아닌 다른 답이 나온다. 이들이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면 노력 여하에 상관없이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운 좋게 중산층으로 시작했어도 질병과 불운이 닥치면 언제든지 약자로 전락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를 보라. 참사 희생자가 가장 많은 안산시는 경기도 31개 시·군 중 1인당 GDP 7위 수준의 대한민국에서 유별나지 않은 공업도시다. 유가족들은 이 도시에서 자식 낳아 고등학교에 보내며 지극히 평범한 삶을 꾸려왔다. 지난해 4월 이들에게 갑자기 날벼락이 떨어졌고, 가족을 잃었다. 이들에게 ‘당신이 무임승차자인지 따져보자’고 덤벼드는 게 온당한가? 명백한 정부의 구조실패임에도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정부를 보며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 사고를 당했어도 정부는 나 몰라라 할 것’이라 인식하고 정부에 분노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가?

물어보자. 프로젝트가 떨어지면 야근을 밥 먹듯 하고, 밤이면 소주 한 잔 사며 후배달래기 바빴던 당신에게. 어느 날 회사로부터 명예퇴직 당하고 갑자기 수입이 사라져 아이들 급식비 지원을 신청한 당신을 세상이 ‘일자리도 없는 2등 시민’이라고 평가한다면? 묻겠다. 아버지의 노후자금을 등록금으로 사용한 당신에게. 당신이 부모님을 부양하기엔 벅차고 부모님의 연금은 부족해 기초연금을 신청한 당신에게 세상이 “이기적으로 노후자금 다 쓰고는 세상에 무임승차하려 한다”고 손가락질한다면? 평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당신이, 당신의 아들이 나라를 좀먹는 2등 시민, 무임승차자로 낙인찍힌다면, 어떡할 것인가?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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