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지민 기자

중세시대, 지동설은 허위였다. 코페루니쿠스가 지동설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때까지 사람들은 하늘이 돌고 있다고 믿어야 했다. 그 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했던 한 이탈리아 수도사는 화형에 처해졌다. 요즘으로 치면 ‘허위사실유포죄’ 판결을 받은 셈이다.  틀린 말이라고 해서 개인을 사법적으로 처벌한다면 몇 백 년 동안 천동설을 진실로 믿어야 했던 대가를 또 치러야 한다. 틀린 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틀리다는 이유로 개인을 단죄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조희연 교육감에 대한 허위사실유포죄 실형 판결은 가치 ‘있는’ 표현과 ‘없는’ 표현을 국가가 정의한 것과 같다. 보호받아야 할 표현의 자유는 ‘남자들의 평균키는 여자보다 크다’와 같은 당연한 진실이 아니다. 선거 과정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보다 근력이 세다’처럼 반박가능성이 높은 표현도 발언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이를 통해 후보들은 다양하게 검증받게 된다. 선거과정에서 상대 후보를 향한 의혹 제기를 폭넓게 보장해야 하는 까닭이다. 판결을 내린 사법부와 기소를 한 검찰은 이를 간과했다.

 

▲ 가치 ‘있는’ 표현과 ‘없는’ 표현을 국가가 정의하는 것이 옳을까. ⓒ pixabay

표현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로 규제될 때 가장 바람직하다. 표현 수단에 제약이 사라져 누구나 SNS와 같은 매체로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있는 시대다. 조희연 교육감과 고승덕 후보 간 공방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사회적 지위도 크게 다르지 않기에 발언의 파급력도 누가 더하거나 덜하지 않다. 고 후보의 미국 영주권 보유 의혹에 대한 조 후보의 해명 요구는 고 후보가 자신이 가진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방식으로 반박하도록 했어야 옳다. 국가가 나서서 ‘의도적인 흠집내기’로 판정 짓는다면 이는 수없이 제기될 수 있는 다양한 의견들을 침묵케 하는 효과를 낸다. 반박당하지 않는 사상과 생각만이 표출되는 사회는 닫힌 사회다.

개인의 명예훼손도 문제고, 후보 검증 미비로 왜곡된 민의를 대표하는 후보를 선출하는 것도 문제다. 두 가지 폐해 중 후자가 더 큰 부작용을 낳는다. 이번 사례처럼 검찰이 편의적으로 기소해 법원이 잘못된 판결을 내리면 선거에서 후보 검증을 누구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선거의 역동성이 사라지고 정치적 무관심도 심화된다. 개인의 명예도 중요하다. 그러나 검찰이 기소 종료 하루 전 기소를 해 법의 심판대에 조희연 교육감을 올리는 방식으로 상대방의 인권을 지켜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와 선거 제도의 후퇴를 개인의 명예와 맞바꿔서는 곤란하다.

“권력자에게 질문할 수 없는 사회는 민주사회가 아니다.” 백악관 출입 기자였던 헬렌 토마스는 말했다. 무릇 권력을 쥐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수많은 질문에 응답해야 하고, 질문을 받을 의무가 있다. 조희연 교육감에게 내려진 판결은 이 명제를 부정하고 있다. 보호해야 하는 표현과 그렇지 않은 표현을 구분할 때 ‘권력자에게 질문할 수 없는 사회’가 된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의미를 제대로 실현해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제도를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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