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박진우 기자

▲ 박진우 기자

“내가 준 표 내놔!”

요즘은 불법정치자금 수수혐의로 검찰에 불려다니는 신세가 됐지만, 한 때 ‘차기 대권주자’로서 ‘보수 표 다지기’에 열을 올리던 홍준표 경남지사에게 이 지역 일부 학부모들이 외친 말이다. 홍 지사의 무상급식 철회 선언으로 경남 학생들만 전국에서 유일하게 급식비를 내야하고,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은 ‘가난을 입증해야’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자 도청에 몰려가 이렇게 항의한 것이다. 지난 2012년 보궐선거 합동 TV 토론회에서 “무상급식이 국민의 뜻이라면 그대로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던 홍 지사였기에 학부모들의 배신감은 더 컸다.

‘줬다 뺏는 것만큼 기분 나쁜 일도 없다’고 했던가. 무상급식이라는 작은 혜택을 맛본 시민들의 복지 갈증은 갈수록 커지는데 선거 때 ‘복지 팔이’로 표를 모았던 정치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을 바꿔 유권자들의 복장을 뒤집고 있다. 홍 지사는 “무상급식은 좌파들의 잘못된 논리에 국민들이 놀아난 것”이라고 말했고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복지가 국민을 나태하게 만든다”며 본심을 드러냈다. 지난번 대통령선거에서 ‘복지를 통해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고 입을 모아 외치던 그 사람들은 다 어디 갔는지 궁금하다.

정부여당의 인식수준이 이렇다 보니, 우리의 복지는 국제적으로 부끄러운 수준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사회복지지출은 10.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28위에 불과하다. OECD 평균치가 21.6%이니, 얼마나 뒤떨어진 처지인지 한 눈에 비교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OECD 최고 수준의 노인빈곤율과 자살률, 최저수준의 출산율 등 부끄럽고 아픈 기록을 줄줄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복지라는 사회안전망이 이처럼 취약한 것과 직결된다. 그런데도 일부 정치인과 관료, 학자들은 ‘복지병’과 ‘재정파탄’을 거론하며 우리나라가 과잉 복지로 그리스처럼 위기를 맞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 박근혜 대통령이'국민행복 업무 보고' 회의에 참석한 모습 ⓒ 청와대 공식 홈페이지

이런 주장은 조금만 사실관계를 살펴보면 말이 안 되는 얘기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는 유럽국가들 중 복지 수준이 하위권에 불과한데, 광범위한 지하경제와 취약한 세정으로 세금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상황에서 글로벌금융위기에 대응하느라 재정위기를 맞았다. 만일 복지 과잉으로 재정위기를 맞는다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복지를 자랑하는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등 북유럽국가들이 먼저 망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나라들은 글로벌금융위기 와중에서도 가장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복지가 늘면 국민들이 게을러져 일을 안 한다며 ‘복지병’을 걱정하는 이들은 북유럽 국가들의 고용률이 대부분 70% 이상으로, 60%대인 우리나라에 비해 훨씬 높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입을 다물었으면 좋겠다. 

북유럽이나 서유럽은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부자나라니까 충분한 복지를 할 수 있고, 우리는 아직 그럴 형편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역사는 대다수 유럽 복지선진국들이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 남짓일 때 복지제도를 대대적으로 확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들 나라가 ‘잘 살아서’ 복지를 늘린 것이 아니라 ‘잘 살기 위해’ 복지를 확충했다고 설명한다. 보육과 교육, 의료, 주거, 노후 등 민생의 핵심영역에서 보편적 복지를 통해 저소득층과 중산층의 생활안정성을 높이고 구매력을 키워줌으로써 ‘복지와 성장의 선순환’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지난해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이 2만8천 달러에 달하는 우리나라가 돈이 없어 복지를 확충하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1000조원을 훌쩍 넘은 가계부채 부담과 불안한 일자리 등으로 내수가 얼어붙은 우리 경제에 불을 지피기 위해서라도 과감한 복지 확충이 필요하다.

‘증세 없는 복지’라는 불가능한 구호에 얽매여 복지공약을 후퇴시키거나, 선거 때의 주장을 뒤집으며 복지를 ‘악’으로 매도하는 정치는 모두 유권자에 대한 기만이다. 담뱃세 인상 등 ‘꼼수’가 아닌 당당한 증세 논의를 통해 ‘국민행복시대’에 한 발이라도 다가가려는 진심어린 노력을 보여야 한다. “내가 준 표 내놔”하는 분노가 꼭 홍준표 지사에게만 향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정부여당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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