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 첨삭후기]

▲ 이봉수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장터에 좌판을 벌이는 장돌뱅이들의 소망은 고객이 많아 즐거운 비명을 질러보는 것이리라.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은 사정이 좀 다르다. 명색이 ‘선생’이라는 이름을 걸고 첨삭을 해준다고 약속했으니 응모자가 많다고 ‘뜨내기 손님’처럼 소홀히 대할 수는 없는 노릇. 46편의 응모작들을 첨삭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행복했다고 말해야겠다.

평론가 김현이 1990년에 작고한 뒤 <행복한 책읽기>라는 ‘문학단평 모음’집이 나왔을 때 부러우면서도 제목이 불편했다. 책 읽는 게 행복하다고? 그럼 난 뭔가? 문학과지성사 중심의 ‘문지 패거리’와 문학담당기자들이 김현을 ‘신화’ 속으로 끌고 들어갈 때도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다, 1974년 공릉동의 기억과 함께.

서울대가 관악으로 모이기 전 교양학부가 있던 공릉동은 을씨년스러웠다. 동네 이름에 무덤이 들어있기도 하지만 긴급조치가 내려진 암울한 시대상황과 맞물렸기 때문이리라. 만원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벌판 가운데로 난 도로를 한참 걸어 들어가야 덩그러니 서있는 교양학부 건물에 도달할 수 있었다.

김현의 본명은 김광남. 강사가 누군지도 모르고 신청한 개론 강의였지만, 그의 강의는 불성실했다. 아무리 불문학 전공학생이 아닌 교양학부생들이지만 이럴 수가! 불원천리 허위허위 등교한 학생들은 휴강한 시간을 잡담으로 때우며 불평하곤 했다. 우리는 뜨내기인가? 평론가나 문학담당기자들이 그의 꼼꼼한 책 읽기와 성실한 비평태도를 존경해마지 않을 때도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진 않았다. 나중에 그의 독자가 돼 16권의 <김현문학전집>을 사면서도 기억의 앙금들이 떠올랐다.

책 읽기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뒤늦게 알았다. 내가 터득한 ‘행복한 책읽기’는 ‘읽고 싶은 책만 본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뉴욕타임스>의 북 섹션 슬로건도 바로 그거(Pick books you like)였다. 신문의 책 리뷰를 보고 책을 사는데, 가끔 출판사와 기자들의 농간에 돈이 아까울 때도 있다. 그러나 나의 ‘행복한 책읽기’ 두 번째 요령은 바로 ‘읽다가 싫으면 집어 던지라’는 거다. 책 읽기가 불행할 이유가 없다.

학생들 글을 첨삭하는 건 힘든 일이지만 내용 자체는 책보다 더 재미있을 때가 많다. 이번 백일장 응모작은 숙제가 아니라 순전히 자발적으로 써낸 것들이어서 읽는 재미가 더 컸다. 기성 언론인들의 글은 제목과 필자만 보고도 대개 결론을 알 수 있지만, 응모작 중에는 뜻밖의 반전이 짜릿한 게 많았다. 갖 특허출원된 시제품이라고 할까, 약간 조악한 구석도 있지만. 착상이 기발하고 필력이 상당한데도 당선작으로 뽑히지 못한 '작품'이 많았는데, 뽑는 이의 취향 탓으로 돌리기 바란다.

장원으로 뽑은 ‘길음시장 블랙홀’은 끝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콩트이면서 그런 짓이라도 하고 싶은 약자의 심정을 잘 대변했다. 그러나 콩트가 칼럼 양식의 본령은 아니기에 ‘원숭이 실험의 역설’을 또 하나 장원으로 삼았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인터넷을 통해 ‘관계 맺기’를 시도하지만 그것이 스킨십 없는 가상공간에서는 한계가 있음을 잘 드러냈다.

수상작들은 앞으로 <단비뉴스>에 연재될 예정이어서 여기서 더 이상 내용을 소개하는 스포일러 노릇은 피하고자 한다. 그 대신 ‘시간, 공간, 인간’을 제시어로 내놓으면서 내가 상상했던 프레임 몇 개를 소개하고 싶다.

‘시간’과 ‘인간’을 제시어로 택한다면, 상대하는 사람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달라지는 경험을 얘기할 수도 있으리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모르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시간의 경과가 일정하지 않다고 느낀다. 강의 잘 못하는 교수의 수업시간은 지겹기 짝이 없지만, 연인과 함께 하는 시간은 얼마나 빨리 흐르던가?

시간의 누계인 나이에 따라서도 시간에 대한 인식은 달라진다. 나이 든 어른들이 “세월 참 빠르다”고 말하는데, 나 또한 나이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 같다. 엊그제 한 해가 시작된 것 같은데 3월 개학이 코앞이다. 남녘에선 벌써 매화꽃 소식이 들리고 모두들 봄이 오고 있음을 반기는데, 저 꽃을 몇 번 더 보면 아름다운 이승을 하직하게 되는 걸까?

나이 들수록 생체시계의 속도가 느려지고 행동이 둔해져서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낀다는 가설도 있다. 글을 쓰려 해도 단어가 금방 생각나지 않고 운동을 해도 신체가 즉각 반응하지 않으니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고 시간이 모자라 늘 허둥대는 건 아닌지 스스로 걱정이다. 주자가 청소년을 위해 쓴 시가 나이 들어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소년은 쉽게 늙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짧은 시간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마라
연못가 봄풀이 꿈에서 채 깨기도 전에
계단앞 오동잎 가을소리를 전하는구나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언어들은 또 얼마나 부정확한가? ‘새롭다’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퐁 뇌프의 연인들’이란 영화의 무대가 된 파리의 퐁 뇌프(Pont Neuf)는 ‘새 다리’란 뜻이지만 실은 세느강에 걸린 가장 오래된 다리다. 옥스포드대학의 38개 칼리지 중 뉴 칼리지(New College)는 가장 오래된 칼리지 중 하나다. 신촌은 ‘새마을’, 신설동은 ‘새로 세운 마을’이란 뜻이지만, 거기 어디에 그런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공간’과 ‘인간’을 제시어로 택한다면 ‘공간의 민주주의’에 대해 쓸 수도 있으리라. 도시나 공공건물들을 관찰해 보면 곳곳에서 민주적이지 못한 구조물들을 만나게 된다. 정부청사나 국회를 드나들어보면 높은 분은 정문으로 들어가고 민원인은 쪽문으로 들어가게 돼 있고, 높은 분을 위한 전용 엘리베이터가 한가롭게 서 있는데도 주권자인 '국민'은 혼잡한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 1인을 위한 기관장실은 카펫이 깔려있는데 민원실은 대개 콘크리트 바닥이다.

'시간'과 '공간'을 제시어로 택한다면, '장소 의존 학습'(Field-dependent learning)으로 접근해보는 건 어떨까? 사람의 기억력은 시간이 흐르면서 망각곡선을 타고 떨어지는데 공간과 결합되면 기억을 되살리기 쉽다. 애인과 헤어졌던 애틋한 추억은 늘 장소와 함께 떠오른다. 스포츠팀의 승률이 평소 훈련을 하던 홈구장에서 더 높은 게 응원 덕분만은 아니다. 토익시험도 공부하던 모교에서 쳤을 때 점수가 더 높게 나온 경험은 없었던가? 개념어와 자신의 경험을 결합하는 건  좋은 글쓰기 수법이다.  

상상력은 청춘의 특권이다. 책 읽기와 언어에 대한 성찰, 다양한 경험, 관찰하고 기록하는 습관은 그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조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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