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의 미디어 속 이야기]

▲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장

유아독존, 아전인수, 교언영색, 당동벌이, 객반위주…. 지난 16일 박근혜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을 듣고 ‘도대체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고심하며 떠올려본 사자성어들이다.

유아독존(唯我獨尊). 세상에서 자기만 존귀하다고 생각하는 태도다. 왕조 시대 군왕의 태도인데, 민주주의 시대 지도자라면 가져서는 안될 기질이다. 잘난 체하기로 제일 유명한 왕은 루이14세쯤 될 것이다. ‘짐은 곧 국가’라고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비슷한 말을 했다.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은 국민에 대한 모독이다.” 설훈 의원의 말투에 개인적으로 기분이 나빴을 수 있다는 점은 이해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자신을 국민과 동일시하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것을 알고 기분 나빠진 국민도 있을 것이다.

같은 군 출신이지만 전두환·노태우 두 대통령은 결이 꽤 달랐다. 전 대통령은 자기를 많이 닮은 탤런트조차 출연을 금했지만, 노 대통령은 “나를 코미디 대상으로 삼아도 좋다”고 말했다. 권위주의에 길들여진 언론은 그런 대통령을 ‘물태우’라고 조롱했다. 고졸인 노무현 대통령은 보수언론이 아예 대통령 대접을 하지 않았다.

한국 언론의 병리를 드러낸 보도 태도였지만 대통령이 탈권위주의로 나가는 방향은 옳았다. 약간의 금도만 지켜진다면 정치인에 대한 국민과 언론의 풍자는 폭넓게 인정돼야 한다. 우리나라 예전 탈춤도 그랬지만 정치 선진국에서는 신랄한 풍자를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 때 검찰이 풍자만화나 걸개그림까지 처벌하기 시작하더니 요즘 들어 우리의 풍자문화는 박정희·전두환 시대로 퇴행하는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에는 대통령뿐 아니라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까지 선거가 끝나면 ‘공복’이 아니라 큰 ‘벼슬’로 여기고 뻣뻣해지는 이들이 많은데, 말 속에서 그런 태도가 배어 나온다. 진해야구장 건립 취소로 16일 달걀 투척 세례를 받은 안상수 창원시장도 발표문에서 “110만 창원시민의 수장에게 테러를 가한 것은 시민을 모독한 행위”라며 시민의 ‘수장’을 자임했다.

아전인수(我田引水). 자기에게만 이롭도록 생각하거나 행동함을 이르는 말이다. KBS 여론조사에서도 세월호 재협상과 수사권·기소권 보장이 훨씬 우세했는데 반대 의견만 수렴해 재협상을 걷어차버렸다. 세월호법으로 설치될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달라는 유가족 요구를 삼권분립에 위배된다며 5개월간 침묵하더니 “여야의 2차 합의안이 마지막 결단이었다”며 입법권을 침해했다. 삼권분립을 내세우거나 내팽개치는 것이 자신의 유·불리에 달렸다.

박 대통령은 “국회가 국민에 대한 의무를 행하지 못할 경우 그 의무를 반납하고 세비도 돌려드려야 한다”고 말했다. 삼권분립 체제에서 헌법 위반 소지가 있는 대통령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행정부를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이 입법부의 권능을 무시하는 것은 탄핵감 아닌가? ‘말도 못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면 대통령 하야 발언에는 여권이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했나? 박정희 대통령이 10월유신 때 국회를 해산한 것도 국회를 시녀로 여긴 사고방식의 연장선에 있었다.

내각책임제라면 총리는 의회를 비판하고 해산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권한은 총리 자신의 퇴진을 전제로 한다. 함께 책임을 지도록 제도를 발전시켜온 것이다. 세비 반납 발언도 아전인수식이다. 한나라당 대표 시절 사학법에 반대해 두 달간 국회에 나오지 않았을 때 세비를 반납했다면 말발이 선다. 박 대통령은 국회의원 시절 민생법안은커녕 법안 제출 건수와 출석일수가 모두 꼴찌였다.

교언영색(巧言令色).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꾸며서 하는 말과 꾸며서 짓는 낯빛을 일컫는다. 박 대통령은 5월19일 눈물을 흘리면서 세월호특별법 제정과 진상규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때의 말과 눈물이 교언영색이 아니었다면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눈물이 턱까지 흘러내리면 가려워서라도 닦기 마련인데 그러지 않은 것은 역시 꾸민 행동이었나?

 

▲ 일러스트 | 경향신문 김상민 기자

▲ 유아독존, 아전인수, 교언영색, 당동벌이…
우리는 어쩌다 이런 대통령을 ‘모시게’ 됐나
 
▲ ‘짐은 곧 국민’ 권위에 대한 도전 용납 안해
원칙도 유·불리 따라 변하고 꾸며서 하는 말 수시로 바꿔
보수신문·방송이 부추기면 대립국면 조성해 난국 돌파

정부의 교언영색 중 최신판은 국민 건강을 위해 담뱃값을 올린다는 발표였다. 국민 건강이 그렇게 걱정된다면 정부가 금연운동을 벌이든지 부탄 왕국처럼 아예 흡연을 금지하면 될 일이다. 노무현 정부 때 담뱃값을 500원 올리려 하자 박근혜·최경환 의원은 반대했다. 그때는 국민 건강을 조금만 위하는 수준이어서 반대했나? 서민 부담이 큰 간접세이지만 세수 확보와 국민 건강을 위해 담뱃세를 올렸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더라면 애연가들이 뒤틀린 심사를 달래기 위해 애꿎은 담배를 또 태우지는 않았을 터이다.

‘민생 타령’을 하며 세월호 국면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전형적인 교언영색이다. 대선 때 박근혜 후보가 내걸었던 경제민주화와 복지 강화도 알고보니 ‘감언이설’이었지만, ‘민생’은 공약을 지키는 게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다. 서민들의 삶이 총체적으로 붕괴되고 있는데 일부 서비스업과 부동산의 규제를 푸는 걸로 민생을 해결하겠다는 발상이야말로 무능 정권의 밑천을 드러낸 것이다. 학교 근처에 호텔을 짓겠다는 관광진흥법과 의료법인의 영리자회사 설립을 허용하는 의료법 개정안 등은 ‘민생법안’이 아니라 ‘민폐법안’이 될 가능성이 높다.

보수신문과 ‘정권방송’이 ‘우리 경제가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다’는 보도를 쏟아내자 정부도 맞장구 치며 세월호 정국 탈출에 십분 활용하고 있다. 세월호처럼 갑자기 침몰했나, 한국 경제에 느닷없이 골든타임이 닥친 이유를 모르겠다. 집권하고 1년반도 넘은 때에….

박 대통령의 재래시장 방문은 박정희 대통령 이래로 써먹어온 교언영색의 수법인데도 먹혀 들어가는 건 왜일까? 정치적으로 대립국면이 고조될 때마다 시장에 가는 건 ‘정치와 초연하게 경제만 생각하는 대통령’이란 이미지를 부각시켜 주기 때문이다. 청와대 사진기자단이 주범이다. 재래시장을 찾는 것은 사주는 상품값만큼만 민생에 도움이 될 뿐이다. 정치를 통하지 않고 경제를 살릴 방도는 없다. ‘경제’란 말 자체가 경세제민(經世濟民), 곧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 아닌가.

당동벌이(黨同伐異).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끼리 한패가 되고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물리친다는 말이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특별법에 ‘순수한 유가족’들의 마음을 담아야 하고 ‘외부 세력’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을 아군과 적군으로 구분하고 대결국면을 조성해 난국에서 빠져나가려는 발상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100%를 위한 대통령이 되겠다던 ‘국민대통합’ 약속을 완전히 저버리고 절반가량 지지층만 확실히 안고 가겠다는 태도다. 보수신문과 종편방송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다 지상파 방송도 극우인사들을 방송통신위원회와 KBS 이사회 등에 대거 포진시킴으로써 대국민 심리전 준비를 끝낸 상태다. 이름만 남은 ‘공영방송’의 사장과 요직도 친여 인물로 채워졌다.

객반위주(客反爲主). 손님이 도리어 주인 노릇을 한다는 뜻이다. 세월호 유족들도 국민이지만 국민을 돌봐야 할 대통령은 그들이 헌법체계를 흔들고 경제의 발목을 잡는 ‘국가의 공적’이나 되는 것처럼 매도했다. 박 대통령은 유족들에게 “진상규명에 여한이 없도록 하겠다”더니 오히려 대못을 박았다.

박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과 처세술이 체득한 것이든, ‘호가호위’하는 참모들의 농단에 따른 것이든, 언론이 부추긴 것이든, 아니면 합작품이든, 최종 책임은 대통령에게 돌아간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정국에 대한 국민 피로도가 점증하고 야당이 지리멸렬한 틈에 승부수를 잘 던졌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성역 없는 진상규명으로 유족들의 한을 풀지 못한다면, 진심으로 서민을 위한 정책들을 내놓지 못한다면, ‘정신적 내전’ 상태라고 불릴 만큼 편가르기가 심한데 그걸 더 부추긴다면, 언론에 의해 일정 부분 ‘만들어진’ 지지율을 믿고 일방적으로 국정을 밀어붙인다면, 박근혜 정권은 임기말에 참담한 ‘일패도지’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 그때 가서는 어떤 사자성어를 떠올릴까?

자승자박, 소탐대실, 인과응보, 진퇴유곡…. 그래도 국민을 위해 ‘사필귀정’으로 끝났으면 좋겠다. 악담이 아닌 쓴소리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 이 기사는 <경향신문>과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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