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김봉기 기자

▲ 김봉기 기자
지난달 박근혜 정부 2기 경제사령탑으로 기용된 최경환 부총리가 ‘경기부양을 위한 총력전’을 외치고 있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다짐은 역대 모든 경제팀이 하나같이 했던 것이지만, 최 부총리는 특히 진보적 경제학자들이 주창해온 ‘소득주도성장론’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모았다. 1960년대 고속성장 시기 이후 정부가 내세웠던 ‘선성장 후분배’의 낙수효과, 즉 대기업이 잘 되면 중소기업과 가계도 저절로 혜택을 본다는 원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다수 국민들의 소득이 늘어야 소비가 늘고 경제도 살아난다며, 세제개편 등을 통해 기업과 가계소득의 불균형을 바로잡겠다고 공언했다. 최 부총리의 강력한 경기부양 의지에 주식시장은 연일 상승세를 보이며 환호했다.

그러나 최 부총리가 뒤이어 발표한 정책들은 그가 거론한 소득주도성장론과 결이 안 맞는 것들이어서 당혹감을 주고 있다. 최경환 경제팀이 내놓은 경기활성화 대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부동산 규제완화다. 집을 잡히고 돈을 빌릴 때 적용하는 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 등의 규제를 완화하고, 전세소득이 있는 2주택자에게 세금을 물리려던 계획을 철회하는 등 부동산 경기를 최대한 살리겠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가계부채가 이미 1000조원을 훌쩍 넘었고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자금순환표 기준)이 2008년 149.7%에서 2012년 163.8%로 급증한 우리 현실에서 이런 정책은 무책임하다고 할 수 있다. 금융위기로 혼쭐이 난 미국, 영국 등 주요국이 모두 가계대출을 줄여가고 있는데, 우리정부는 ‘빚 얻어 집사라 정책’으로 이미 위험수위에 이른 대출을 더 늘리겠다고 나선 셈이기 때문이다.

▲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경제정책 방향에 대해 말하고 있다. ⓒ sbs화면 갈무리

대출규제를 풀면 부동산 거래가 활발해질 것이고 그러면 집값이 올라 ‘부의 효과(wealth effect)가 생기기 때문에 소비도 살아날 것이라고 새 경제팀은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빚을 안고 집을 산 뒤 대출금을 갚느라 ’하우스푸어(집가진 빈민)‘가 된 사람들이 수두룩한 현실에서 이는 가능성이 낮은 시나리오다. 특히 인구가 줄고 가구당 평균가족수도 줄어 중장기적으로 집값 상승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출규제가 풀렸다고 너도나도 집을 살 것이란 전망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소비를 살리려면 최 부총리 스스로 언급한 것처럼 대다수 가계의 실질소득을 올려주는 정공법을 택해야 한다.

그러나 가계소득증대를 위해 추진한다는 새 경제팀의 세제개편안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사내유보금을 투자, 배당, 임금지급 등으로 쓰도록 유도하기 위해 도입한다는 기업소득환류세제는 대기업들의 반발을 의식해 이런저런 예외규정을 두느라 이미 ‘실효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임금을 늘린 기업에 세금 인센티브를 주는 근로소득증대세제는 임금인상 여력이 없는 대다수 중소기업의 노동자와 대기업 노동자간 간극을 더 벌이는 결과만 낳을 것이란 지적이다. 배당소득증대세제는 고배당기업에 투자한 해외주주와 고소득층이 주된 수혜자들이고, 보유주식이 거의 없는 대다수 중하층 가계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의 저자 로버트 라이시는 미국 등 각국이 서브프라임사태 등 경제위기에 거듭 빠지는 이유가 ‘소득불균형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경제의 외형은 커지지만 자산과 소득이 일부계층으로 몰리다보니, 소득이 정체되거나 줄어든 중하층은 빚을 내야만 소비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반면 부유층은 넘쳐나는 자산으로 금융투기를 일삼다보니 자산거품의 형성과 붕괴가 반복된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 역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시장만능주의 정책을 본격화하면서 수출주도 대기업들에게 경제력이 더욱 집중됐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부유층과 중하소득층의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중하층은 집 사고 생활하느라 빚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됐고, 가계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 경제가 만성적인 내수 침체에 시달리는 것도 대다수 국민들이 정체된 소득으로 빚을 갚느라 소비할 돈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최 부총리의 소득주도성장론이 가게 물건과 상관없는 ‘가짜 간판’이 되지 않으려면, 빚을 더 늘리고 거품을 더 키우는 경기부양이 아니라 중저소득층의 지갑을 채워주는 실질적인 소득증대정책을 선택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임금노동자의 88%가량을 고용하는 중소기업들이 대기업과의 관계에서 정당한 이윤을 확보하도록 거래질서를 바로잡아 준다면, 상당수 노동자의 소득이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하위권에 머물고 있는 최저임금을 단계적으로 현실화하고 감독을 강화한다면 취약노동계층의 실질소득이 개선될 것이다. 기업들이 인건비절감을 위해 악용하고 있는 비정규직에 대해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등의 보호조치를 강화한다면 수백만 비정규직 노동자의 소득이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 평소 빠듯하게 사는 저임노동계층은 늘어난 소득을 소비하는 성향이 매우 높기 때문에 이들의 수입을 늘려주면 내수도 그만큼 살아나게 돼 있다. 이렇게 눈앞에 ‘가야 할 길’이 빤히 보이는데도 ‘지도에 길이 없다’며 엉뚱한 해법에 매달린다면 최 부총리는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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