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사전] ‘길’

▲ 홍연 기자
“여기는 지하철 5호선. 우리 칸 대부분 애들이 SSAT 책 본다. ㅋㅋ 수능 보러 가는 기분.”

삼성직무적성검사(SSAT)가 치러진 지난 13일, 친구로부터 받은 문자다. 올해 취업 삼수생인 그녀를 진심으로 응원했지만 한편으로 씁쓸한 뒷맛이 느껴졌다. SSAT가 끝나고 동네 중학교 교문에서 물밀 듯 쏟아지는 취업준비생들을 보며 ‘삼성수능’을 실감했다. 연간 대졸자 40%인 48만 명이 삼성에 지원한다고 하니 ‘취업수학능력시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하반기 공채시즌마다 대형서점 인·적성 교재 코너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설계도로 다면체의 모습을 추리하고, 소금물 농도를 잘 구하는 것이 과연 직무능력과 얼마나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떨어뜨리려는 시험은 기업에게도, 취업준비생에게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비’처럼 가고 싶은 데로 날아가 앉아야 할 청춘이 대기업이란 빛만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 늘 좋은 길은 아니다. 한국인은 유난히 ‘큰 길’이나 ‘가본 길’에 집착한다. 골목길에 들어서면 길을 잃을까 불안하고 새로 개통한 길보다는 늘 다니던 길이 편하다. 모두가 목적지를 향해 대로(大路)만 다니는 사회다.

성공의 목적지는 ‘사(士)’자로 끝나는 직업들이며, 밟아야 할 길은 ‘영어유치원-사립초-국제중-특목고-명문대’다.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것도 돼보고 싶은데, 그런 일탈은 용인되지 않는다. 모두가 차를 끌고 대로에 나오니 아무리 큰길이라 해도 별 수 없다. 차는 정체되고 마음은 급한데 목적지는 요원하다.

정체된 차량행렬은 성장 동력이 멈춘 한국사회를 닮았다. 획일화의 비극과 길들여진 청춘의 따분한 미래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모두가 같은 목표를 향해 같이 달려야 성공할 수 있는 산업사회는 지나갔다. 이제는 지식이 기반이 돼 개인의 창의성과 아이디어로 먹고사는 시대다. 그런데 정부가 들고 나온 ‘창조경제’조차 산업화 시대의 추진방식을 따르고 있다. 창의성을 존중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대신 정부 부처마다 구호를 만들고 지원금도 정부가 요구하는 기준과 규격에 맞춰야 따낼 수 있다.

구글과 페이스북은 개인의 창의성으로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접목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했다. 그것이 바로 지난해 598억 달러의 매출을 올린 구글의 원동력이다. 우리도 대로로 가라고 종용할 게 아니라 샛길로 빠지는 것도 권장해야 한다.

잘 모르는 골목길을 걷다 보면 호젓한 찻집을 발견할 수도 있고 생각에 잠길 수도 있다. 때로는 막다른 골목에 부닥치기도 하겠지만 돌아나오면 그뿐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은 목표지상주의를 부추기는 ‘악담’이다. 오히려 모로 가는 젊은이도 말리지 말아야 한다.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원의 중심에서 몇 개라도 반경을 그을 수 있듯이, 마음만 먹으면 창조적 인생은 누구나 설계할 수 있다”고 했다. 창조적 인생은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데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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