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119기금’ 마련 위한 일일주점 ‘인권, 안녕!’

지난 22일 서울 을지로입구역 앞 국제빌딩 지하의 호프집 레벤브로이. 술자리를 시작하기엔 아직 이른 토요일 오후 4시 무렵인데도 크고 작은 테이블 50여개 중 절반 넘게 손님이 차 있다. 자식 풍년인 대가족이 오랜만에 모인 명절날처럼 시끌벅적하고 정겨운 분위기가 물씬하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 중 아는 이가 있으면 마시던 맥주잔을 놓고 반갑게 손을 흔들거나 서로 얼싸안고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 

▲ '안녕, 인권!' 일일주점에 참여한 사람들은 신이 난 모습이다. ⓒ 최선우

무대 바로 앞 중앙테이블에 모여 있던 백발의 노인과 20대 청년 등 8명은 열띤 토론을 벌이다 갑자기 흥이 나는지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했다. 이들은 인권재단 사람이 현장 활동가 지원 ‘119기금’ 마련을 위해 이날 오후 3시부터 연 일일주점 ‘안녕, 인권!’에 ‘돈을 쓰러 온’ 후원자와 활동가들이었다. 주점에는 밤 11시 무렵까지 후원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119 기금' 재정 기반 약한 현장활동가 지원

“우리나라에는 인권전문(시민)단체가 100개 정도밖에 없어요. 이들 단체는 회원도 별로 없고 재정적 기반도 별로 없어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힘들고 지칠 수밖에 없죠. 끝내는 포기하거나 활동을 지속적으로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119기금’은 말 그대로 긴급한 곳에 쓰기 위해, 인권활동가가 재정적 한계로 인권보호 활동을 못하는 일을 막기 위해 필요합니다.” 

▲ 인권재단 사람 박래군 소장은 인권활동을 더 알리기 위해 일일주점을 열었다고 말했다. ⓒ 김성숙

인권재단 사람의 박래군(53) 소장은 “그동안 현장에 나간 인권운동가들이 교통비, 인쇄비 때문에 곤란을 겪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며 ‘119기금’을 만들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이날 주점행사 등을 통해 모이는 기금은 현장 활동비 지원, 인권자료 발간과 보급 등에 쓸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인권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같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이고 인권운동은 곧 ‘사람을 살리는 활동’입니다. 우리 사회에선 자신의 이익이 침해됐을 때만 인권을 지키라고 요구하고 타인의 인권침해에는 눈을 감아버리는 사람들도 많아요. 인권운동을 위해서는 타인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공감하고 함께 풀어가려는 ‘연대’가 필요합니다. 119기금 역시 연대를 통해 인권운동을 지원하자는 것이죠.” 

주점 입구에서는 인권재단 관계자들이 박 소장의 에세이집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을 판매하고 있었다. 지난 2004년 재단을 만들어 다양한 인권활동을 지원하고 인권전문잡지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도 발간하고 있는 박 소장은 줄을 서서 책을 사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사인을 해 주었다. 이날 책 판매 수익금도 인권활동 지원기금으로 쓰인다고 한다. 

▲ 삼성 반도체 피해자 고(故)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오른쪽)도 이날 행사를 찾았다. ⓒ 최선우

"여기다 털어놔야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살 수 있대요"

오후 7시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들을 본 박 소장이 한 걸음에 달려가 반갑게 맞았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서 주인공으로 다뤄진 삼성반도체 피해노동자 고(故)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 그리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권영국 변호사와 반올림(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회원들이었다. 이날 오후에 열린 삼성관련 집회에 참가한 뒤 뒤풀이를 겸해 주점을 찾아왔다고 했다. 황 씨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돈 다 털어놓으러 왔어요. 변호사님이랑 우리 운동가분들이 여기다 털어놔야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살 수 있대요. 다른 데에서 뒤풀이하지 말고 여기서 꼭 해야 한대요. 그래서 돈 쓰러 왔어요.” 

권 변호사는 인권활동의 중요성과 시민사회의 연대를 강조했다. 

“국가에 의한 폭력과 인권침해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죠. 그런 국가가 인권 활동을 절대 지원해줄 리가 없거든요. 인권재단 사람이 열심히 활동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응원하러 왔습니다. 인권은 시민사회가 스스로 키워가야 할 몫이거든요.”  

국제 엠네스티 연구원 노만 캉 무이코씨는 “여러 비정부 기구들이 연대했다는 점에서 이 행사를 응원한다” 고 말했다. 이날 호프를 찾은 김영환(43·서울 잠실동)씨는 “소중한 가치의 가장 최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을 위해 이런 귀한 자리가 열리게 돼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희망의 분홍 종이배 접으며 '연대' 되새겨

저녁 8시가 조금 지난 시각, 주점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가운데 119기금 전달과 함께 공식행사가 시작됐다. 기금을 처음으로 받게 된 단체는 밀양 할머니들의 구술기록 작업인 ‘꽃보다 할매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한국비정규노동센터였다. 인권재단 사람의 이일영 이사장이 직접 무대로 나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미류씨에게 200만원을 전달했다. 송전탑 가설 반대투쟁을 하고 있는 경남 밀양 할머니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기록하는 이 작업은 지난해 12월부터 여성, 인권, 풀뿌리 민주주의에 관심이 있는 기록노동자, 인권활동가 등 20여 명이 모여 시작했다. 8년째 이어온 송전탑 반대운동 주인공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 세상에 알리고 밀양주민들에게 힘을 보태겠다는 취지다. 기금을 받은 뒤 마이크를 잡은 미류씨가 “우리는 이기려고 싸우는 게 아니라 이겼기 때문에 계속 싸우는 것”이라고 힘 있게 외치자 테이블 곳곳에서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어 빈곤사회연대의 김윤영 사무국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생활고를 비관해 자살한)송파구 세 모녀 사건, 이번만큼은 이 죽음을 잊지 않고 제도를 바꿔내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분홍 종이배는 절망과 차별의 바다에 빠진 이들을 함께 태우고 가자는 구명보트의 의미입니다. 복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종이배로 날려버릴 것이고 인권과 연대가 필요한 곳엔 희망의 종이배가 돼서 달려갈 겁니다. 분홍 종이배 다 함께 접어봅시다.” 

김 사무국장의 안내에 따라 50명 남짓한 참석자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종이배를 접었다. 잠시 후 다 접은 종이배를 각자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호프집 전체에 분홍색 물결이 일렁거리는 듯 했다. 빈곤사회연대는 서울 광화문광장 지하보도에서 (기초수급자선정 관련)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와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한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다. 

▲ 일일주점에 참여한 사람들이 직접 접은 분홍종이배. ⓒ 김성숙

저녁 9시 무렵 ‘아름다름’이라는 여성 가수 2인조가 무대에 올라 ‘희망의 노래’와 ‘사노라면’ 등을 열창했다. 참석자들은 흥에 겨워 박수를 치고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의자 위에 올라가 춤을 추기도 했다. 참여연대 소속 노래패 ‘참좋다’는 박노해 시인의 ‘이 길의 전부’에 곡을 붙인 노래를 마지막으로 불렀다. 

“아무리 내 앞길이 험해도 그대로 인해 

내가 힘을 얻고 슬픔도 그대와 겪으니 나도 따라 깊어지는데

언제나 당신에게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더 커지고 맑아져 그대 좋은 벗 될 수 있도록“

현장활동가 아해(38·서울 마포구)씨는 이날 행사로 큰 힘을 얻었다며 고마워했다. 그는 “인권운동가들에게는 사실 뿌듯함보다 힘든 게 많은데 그 중 도와줘야 할 곳을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도울 수 없을 때 제일 안타깝다”며 “그래도 연대가 정말 힘이 많이 되는데 119 기금이 연대의 중심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약 500명이 참여했으며, 약 1200만원의 모금액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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