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청계광장 메운 촛불행렬, 언론 무관심도 질타

“어떻게 지켜온 민주주의인데, 이렇게 후퇴하게 둘 순 없어서요. 나이든 우리야 상관없지만 앞으로 살아갈 후세를 위해서라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어요.”

3일 저녁 7시 서울 서린동 청계광장에서 촛불을 든 회사원 김모(63·서울 상계동)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집회에 나온 이유를 설명했다. 지난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도 참여했다는 김씨는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이 불법으로 대선에 개입했다는 정황이 밝혀졌는데도 정부와 여당은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며 "국민이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중 집회에 참여해 본다는 대학생 송준형(29)씨도 "국가기관이 정치적 중립을 잃고 민주주의를 훼손시킨 것은 정말 심각한 일인데 세상이 너무 조용한 것 같다"며 "관심 없는 친구들한테도 얘기해주고, 앞으로 있을 집회에도 꾸준히 참가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 지난 3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국민촛불집회'에 나온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 김혜영

이날 참여연대 등 284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국정원 시국회의'가 주최한 '제5차 국민촛불대회'에는 주최측 추산 3만 여명(경찰 추산 4000명)이 참가했다. 서울대 총학생회 등이 국가정보원 규탄 시국선언을 발표한 다음 날인 지난 6월 21일,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 주최로 열린 첫 촛불집회에 500여 명이 모인 이후 최대 규모의 인파다. 이날 집회는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인 조희연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의 연설로 시작됐다. 조 교수는 "요직에 자리 잡은 군 출신 인사들이 87년 민주항쟁으로 이뤄낸 성과들을 훼손하고 있다"며 "새누리당 국정조사 위원을 전면 교체하고 국정조사 기간을 연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들은 이 같은 연사들의 발언에 '남재준 국정원장 즉각 사퇴하라', '국정조사 방해하는 새누리당 규탄한다' 등의 구호와 박수로 호응했다. 이어 강백수 밴드, 류앤탁(류병욱·박현탁) 등의 노래공연이 이어졌다. 국정원을 비판하며 자체적으로 결성한 2인조 류앤탁은 인기그룹 '10cm'와 '장기하와 얼굴들'의 히트곡을 개사한 <국정원 풍문으로 들었소>와 <국정원 X깔래>를 열창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에 앞서 오후 6시에는 ‘새누리당의 국정원 국정조사 방해’에 항의하며 장외투쟁에 나선 민주당이 '민주주의 회복 및 국정원 개혁 촉구를 위한  대국민보고대회'를 같은 장소에서 열었다. 한 시간 정도 진행된 대국민보고에는 김한길 대표를 비롯해 신경민·도종환·박영선 등 민주당 의원 127명 가운데 112명이 참석했다.

 

▲ 민주당은 촛불집회에 앞서 '민주주의 회복 및 국정원 개혁 촉구를 위한 대국민보고대회'를 가졌다. ⓒ 민주당 공식 누리집

김 대표는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머리를 맞대고 이 엄중한 정국을 풀어내야 한다"며 "국정조사 정상화 합의가 이뤄지더라도 대통령과의 담판이 이뤄지기 전까지 천막을 걷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민주당원들의 환호는 뜨거웠으나 이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다. 아내와 함께 아이를 데리고 집회에 참가한 회사원 신중호(33·서울 홍은동)씨는 "저 말을 과연 박근혜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들어줄 지 의문"이라며 “내 생각에는 민주당 의원 전원이 의원직을 걸고 삭발 단식에 들어가는 등 다소 극단적인 방법의 투쟁이라도 보여줘야 사태의 해결점이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방송3사 촛불시민 외면 여전... 국정조사 종료는 D-11

집회에 나온 시민 가운데는 언론의 역할을 질타하는 사람도 많았다. 전북 전주에서 왔다는 대학생 김소연(23)씨는 "방송뉴스나 신문에는 촛불집회 이야기가 잘나오지도 않고, 나오더라도 아주 짧게 나온다"며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인터넷이나 SNS(사회관계망서비스)가 없었다면 정말 고립됐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의 남자친구인 대학생 조민호(25)씨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있는데 방송에 나오지 않는 게 정말 신기하다"며 "피서지 인파는 다루면서 촛불집회 인파는 왜 다루지 않는지 정말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날 집회 도중 지상파 방송사와 종합편성채널의 취재를 막는 시민들과 취재진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이날 현장에 중계차를 내보낸 지상파 방송3사의 메인뉴스(KBS 뉴스9, SBS 8뉴스, MBC 뉴스데스크)는 모두 민주당의 국민보고대회와 새누리당의 반응을 1분 30초 내외로 짧게 한 꼭지(MBC 뉴스데스크, KBS 뉴스9) 또는 두 꼭지(SBS 8뉴스)로 보도하는데 그쳤다. 시민들이 참여한 촛불집회 소식은 3사 뉴스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 이날 지상파 3사 모두 3만 여명(주최측 추산)이 운집한 시민촛불시위에 대한 보도는 하지 않았다. ⓒ 뉴스 화면 갈무리

지난달 2일부터 45일간으로 정해진 국정원 국정조사는 오는 15일 종료될 예정이어서 늦어도 오는 5일까지 양당 간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사실상 ‘물 건너간다’는 전망이다. 민주당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의 출석 보장,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과 권영세 주중대사의 증인 채택 등을 요구하고 있으나 새누리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한편 경찰은 이날 오전부터 청계광장 인근에 전경차로 벽을 세우고 2천여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참가 시민들이 차벽철수를 요구하자 "집회 신고는 청계광장만 해당된다"며 "청계광장 인근 사거리 등에서 촛불을 드는 것은 미신고 집회니 해산하라"고 대응하기도 했다. 청계광장 건너편인 광화문역 5번 출구 쪽에서는 '대한민국어버이연합'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국정원을 흔들지 말라", "종북세력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맞불집회'를 벌였으나 큰 충돌은 없었다. 이날 촛불집회는 저녁 9시경 평화롭게 마무리됐다.

국정원 시국회의가 주최하는 제6차 국민촛불대회는 오는 10일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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