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이지민

▲ 이지민
“스피치 학원 알아보려고.”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과 휴대전화를 붙잡고 수다를 떨다가 그녀가 던진 말이었다. 이유를 묻자 대학 졸업반인 그녀는 매번 기업 면접에서 낙방하는 이유가 자신의 부족한 말솜씨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최종면접은 물론이고 실무면접 프리젠테이션에서도 조리 있고 전달력 높은 말과 자세가 합격 여부를 좌우한다고 친구는 말했다.
 
꼼꼼하고 성실한 그녀가 아무리 준비를 많이 한들 현란한 말솜씨로 무장한 경쟁자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수줍음이 많아 ‘당당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친구가 스피치 학원을 등록하려 결심한 이유였다. 최종합격을 위해서라면 한 달에 30만원이라는 ‘거금’도 아깝지 않다는 거였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기업들은 대개 말을 잘 못 하는 지원자보다 말을 잘하는, 그러니까 자기 주장을 당당하게 밝히는 지원자를 선호한다. 말이 쉽지 내 밥줄을 좌우할 면접인들 앞에서 미소 지으며 큰 소리로 자기 얘기를 하기는 어렵다. 특히 한국 청년들에게는 상당히 난감한 일이다.
 
그들은 학창 시절 내내 튀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 앉아 공부하기를 강요당했다. 부모님과 선생님들에게 칭찬받는 모범생들은 하나같이 말없이 공부하는 아이들이었다. 말대꾸는 ‘버리장머리 없는 놈’이나 하는 거였다. 보통 아이들은 ‘예의 바른 학생’으로 인정받기 위해 굳이 나서려 하지 않았다. 나서서 자기주장을 말하기보다 그 시간에 책 한 쪽이라도 더 보는 것을 지상과제로 여겼다.
 
그런데 기업들은 사원을 뽑을 때 ‘나서는 사람’을 원한다. 굳이 혁신과 창의가 필요하지 않는 기업들도 한 목소리로 진취적, 열정적, 도전적인 사람을 인재상으로 꼽는다. 면접장에서 지원자들은 어려서부터 순치되어온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연기를 해서라도 과시해야 한다.
 
그러나 입사 뒤에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시 ‘순치된 사원’일 뿐이다. 대부분 기업의 조직문화는 튀는 것을 싫어한다. 재기발랄함은 자연 소멸되고 주어진 임무를 묵묵히 해내는 조직원에게 만족한다. 알아서 기는, 좋은 말로는 ‘은인자중’하는 자세가 최고의 미덕이 된다.
 
<콰이어트>의 저자 수전 케인은 혁신과 창의성이 고독 안에서 발현된다고 말했다. 실제 역사에 길이 남을 창작물을 남긴 인물 중에는 외향적이기보다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인 사람이 많았다. 동양에서는 18년 유배생활을 한 정약용이 대표적이다. 정치, 경제, 역사, 지리, 종교 등 당시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그가 남긴 저서가 503권이나 된다. 타인과 접촉하는 것을 멀리하는 대신 공부하고 관찰하고 생각하고 저술하는 일에만 몰입함으로써 이뤄낼 수 있었던 창작물들이다.
 
서양에서는 평생 독신으로 산 스피노자가 유대교회에서도 파문을 당해 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쓴 책이 <에티카>였다. 이 책은 후세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묻는다.  스피노자의 고뇌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외향적 성격은 창의적 인재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중요한 건 성격이 아니고, 성격을 보여주는 ‘말’도 아니라는 얘기다. 사회가 계속 내향성을 강요하다가 조직원을 뽑을 때만 외향성을 요구하는 아이러니가 지속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각기 다른 타고난 성격 위에 ‘바람직한 성격’을 덧입히려는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닐까? 말을 많이 하건 적게 하건, 당당하게 말하든 수줍게 말하든, 사회가 개인에게 특정한 성격을 강요하는 것은 시대착오다.


글쓴이 이지민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제8기 ‘대학언론인 캠프’ 참가자입니다. 제시어는 ‘말’이었는데 참가자들이 귀가 후 보내온 캠프 과제 중 두 편을 이봉수 교수 첨삭을 거쳐 내보냅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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