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로그인 회원가입
2020.10.25 일
> 뉴스 > 문화 > 씨네토크
     
'정치는 표면, 경제가 본질'이라고?
[씨네토크] 골리앗과 싸우는 이 시대의 다윗들, '또 하나의 약속'
2014년 02월 19일 (수) 01:26:00 김혜영 기자 firstjournal@naver.com

"우리 회사에 지원한 이유가 뭐죠?"
"아빠 차 바꿔주고, 엄마 용돈 드리고, 남동생 대학 보내려고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 최고 기업', 누구나 부러워하는 '일등 직장'이었다.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아버지를 뿌듯하게 만드는 자랑스러운 딸이 될 수 있었다. 만 열 여덟, 꽃다운 나이에 소녀는 그렇게 마스크를 쓰고 방진복을 입었다. 캠퍼스의 낭만도, 풋풋한 스무 살의 추억도 없이 밀폐된 작업장에서 각종 화학약품을 만지며 매일 실적에 매달렸다. 야근도 밥 먹듯이 했다. 그렇게 보낸 20개월, 돌아온 것은 급성골수성 백혈병 진단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딸이 철석같이 믿었던 ‘일등 직장’은 민낯을 드러냈다. 

지난 6일 개봉 후 35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지난 2007년 사망한 삼성 반도체 노동자 고(故) 황유미씨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 2003년 삼성 반도체 기흥 공장에 입사한 황유미씨는 생산직 노동자로 2년여를 일하던 중 2005년 갑작스런 어지럼증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급성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골수이식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던 유미씨는 2007년 아버지 황상기씨가 몰던 택시 뒷좌석에서 23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 반도체 산재 사망자 고(故) 황유미씨의 실제 이야기를 다뤘다. ⓒ <또 하나의 약속> 공식 누리집

"대한민국 국민을 먹여 살리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그 '큰' 회사에서 그럴 리가 있어요?"

딸은 떠났지만, 아버지는 딸을 쉽게 보낼 수 없었다. 가슴에 묻어두기에는 딸의 죽음이 너무 억울했다. 원인을 밝히기 위해 이곳저곳 문을 두드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언론사, 시민단체 등을 무작정 찾아가 딸아이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했지만, 그의 얘기를 들어주는 곳은 단 한군데도 없었다. 근로복지공단은 근로자보단 기업과 가까웠고,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언론은 ‘증거’가 없으면 기사화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병상에서 ‘산업재해’를 검색하던 딸의 한스러운 목소리가 잊혀 지지 않았다. “아빠는 아는 게 뭐야?”

“아빠가 네가 병에 왜 걸렸는지 꼭 밝혀낼 거야. 약속할게”

6년이었다. 딸의 죽음이 개인적 질병이 아닌 산업재해라는 걸 밝혀내기 위해 기약 없는 세월이 흘렀다. 강원도의 평범한 택시기사였던 아버지는 어느새 반도체 노동자 인권 지킴이 '반올림' 결성의 주축이 돼 있었다. 딸이 안전장비 없이 화학약품에 노출돼 일하는 과정에서 백혈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밤새 공부해가며 소송을 준비했다. 딸과 같이 일하다 병든 이들 수백 명이 모였다. 백혈병, 뇌종양, 다발 경화증 등 온갖 희귀질병이 ‘시키는 대로 죽도록 일한 죄’밖에 없는 그들을 병들게 했다. ‘반올림’에 산업재해를 제보해 온 근로자는 모두 160여 명, 이 가운데 현재 70여명이 사망했다.   

   
▲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와 이종란 노무사 등이 결성한 '반올림'은 반도체 노동자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애쓰고 있다. ⓒ <또 하나의 약속> 공식 누리집

“얼마나 아픈지, 힘든지…병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았어요.”

누워있는 윤미(박희정 분)의 손에 인주를 묻혀 서약서에 찍고, 사직서를 받아간 인사팀장은 그 후 연락을 끊었다. 병원비 4000만원을 주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아버지의 전화로 마지못해 찾아와선 500만원을 내밀며 “왜 자기가 병든 걸 회사에게 책임을 묻느냐”며 조롱했다. 그가 다시 친절해졌을 때는 1심 재판이 산업재해 인정 쪽으로 결론 날 즈음이었다. 미소 띤 얼굴로 “10억을 드리겠다”고 제안했다. 

고(故)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를 비롯한 피해 노동자와 가족들이 바라는 것은 돈이 아니다. 회사의 ‘진심어린 사과’,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적절한 보상금’,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작업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것들이 이토록 모든 걸 걸고 싸워야 할 만큼 힘든 요구인지, 영화는 계속해서 묻고 있다.   

“유미야, 다음에 이 세상에서 태어난다면 화학약품, 방사선 없는 곳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아빠가 노력할게. 딸, 미안해."

2011년 6월 23일 서울행정법원은 황유미씨 사건 선고공판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삼성 반도체 백혈병 노동자가 최초로 산업재해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과 삼성의 항소로 현재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극 중 유난주 노무사(김규리 분)의 실제 인물인 이종란 노무사는 반도체 노동자들과 함께 이 끝없는 싸움을 시작한 이유에 대해서 “설령 진실이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자체가 노동자에게 이로운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주장대로 “정치는 표면, 경제는 본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도, 경제도 결국 ‘사람’보다 먼저 일 수는 없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또 하나의 약속>은 지난 주말 동안 9만 여명의 관객을 끌어 모으며, 현재 누적관객 수 35만 명을 돌파했다. 상영축소 외압논란과 상대적으로 열세인 스크린 수를 감안하면 기적과도 가까운 기록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자체 홍보 버스를 만들고, 신문광고를 내고,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를 이용한 이벤트를 개최하며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극장으로 향하는 당신의 발걸음이 기적을 만들 수 있다.

   
▲ 한 시민이 자체적으로 제작한 <또 하나의 약속> 홍보 버스. ⓒ <또 하나의 약속> 공식 페이스북


* 이 기사가 유익했다면 아래 손가락을 눌러 주세요. (로그인 불필요)

[김혜영 기자]
단비뉴스 미디어팀장
좋은 기자는 좋은 사람이다.
     관련기사
· 짜증나고 부끄러워도 버릴 수 없는 끈
· ‘그 일’ 뒤에도 아무렇지 않게 사는 우리
· “방송이 우선이지, 사람이 우선이냐?”
김혜영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단비뉴스(http://www.danbi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의견나누기(0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Follow danbi_news on Twitter

단비뉴스소개기사제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27136)충청북도 제천시 세명로 65(신월동 579)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대학원 413호|Tel 043)649-1557
인터넷신문등록번호: 충북 아 00192|등록일 : 2017-11-27|발행인: 이봉수|편집인: 심석태|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심석태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석태
Copyright 2009 단비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nbi@danbi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