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김성숙 기자

▲ 김성숙 기자
성적우수자에게 특권을 준다.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고 교사용 큰 사물함을 쓸 수 있다. 급식 때도 먼저 배식되고 단체 청소에서도 면제된다. 한 아이가 묻는다. “그건 차별 아닌가요?” 마여진 선생님은 눈도 깜짝 않고 대답한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이 특별한 혜택을 누리고 낙오된 사람들이 차별대우를 받는 거. 이거 너무 당연한 사회 규칙 아닌가?” 지난 여름 방영된 드라마 <여왕의 교실> 한 장면이 씁쓸하게 떠오른 까닭은 차별이 당연하다고 말해서가 아니다. 아이들이 반박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반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학교는 공정한 공간이라고 인식된다. 사회가 불공정하더라도 학교만은 공정해야 한다고 여긴다. 현실은 다르다. 착하지만 공부 못 하는 학생보다 악하지만 공부 잘하는 학생이 인정받는다. 공부 잘하는 학생은 성적이 조금만 떨어져도 선생님과 단독면담을 하게 된다. 이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수상경력을 몰아준다. 교육수준에 따라 결정되는 계급차별은 명백히 존재한다. 다만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여길 뿐이다.

교육계급 상승은 학생 개인의 역량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양한 지식을 습득해 상위계급에 들기 위해서는 부모의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 ‘OECD 교육지표 11’에 따르면 2008년 우리나라 GDP 대비 정부부담 공교육비 구성비율은 4.7%로 OECD 평균 5.0%보다 낮다. 학부모 부담 비중은 2.8%로 OECD 국가 평균보다 1.9% 높다. 공교육 영역에서마저 다른 나라보다 학부모의 경제적 역량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어머니가 돈과 정보력을 갖춰야 자녀를 입학사정관제로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한다. ‘엄마사정관제’라는 신조어가 낯설지 않은 까닭은 돈이 교육계급 상승의 수단이라는 사실이 당연시되기 때문이다.

교육계급은 사회계급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얼마나 교육 수준을 갖췄느냐에 따라 직장과 소득 수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회계급이 생존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뉴욕타임스>에 연재된 기획탐사보도 ‘문제는 계급이다’는 건축가, 공기업 사무직원, 가사도우미라는 다른 계급에 놓인 사람의 심장마비 치유 과정을 추적했다. 그 결과 병은 평등하게 발생했지만 회복은 불평등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을 발견했다. 상층계급 사람의 회복이 하층계급 사람보다 회복이 빨랐다. 결국, 교육계급의 불평등이 생존이라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마저 충족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교육 불평등 해소는 정의가 실현되는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토대다. 박근혜정부는 저소득층 학생 교육비 지원, 무료 방과 후 돌봄 등 다양한 ‘교육복지’ 정책을 통해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제도적 지원은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교육 불평등 해소의 열쇠는 우리가 그동안 묵인해왔던 차별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보이지 않는 계급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차별은 당연한 사회규칙이라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다.


* 이 기사가 유익했다면 아래 손가락을 눌러주세요. (로그인 불필요)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