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홍우람 기자

▲ 홍우람 기자
“폭력과 잔혹함을 보여주는 이미지로 뒤덮인 현대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린다.” 미국의 실천적 비평가 수전 손택의 말이다.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로 여긴다면,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는 것이다. 손택의 일침에 나도 뜨끔한 것은 ‘성재기 투신 사건’을 바라보는 사회와 나의 시선이 그리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씨의 투신은 이유를 불문하고 무모하고 치기어린 행동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게 됐다. 극단적인 수단으로 목적을 정당화하려는 모습은 우리 사회에 우려를 불렀다. 그러나 그에 대한 질타는 그 정도가 합당해 보인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 공간의 대중들 반응은 달랐다. 성씨를 ‘벌레’라고 조롱하거나, “1억 달라고 쇼하네”라며 폄하하는 글들이 줄을 이었다. 표창원, 고종석씨 등 일부 지식인들의 반응도 대중의 조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를 정신과 진료가 시급한 자로 취급하거나, 남성연대를 해체하라며 비아냥거렸다. 사회적 의미를 고민하기는커녕 생명이 달린 문제라는 인식도 보여주지 못했다.

언론의 ‘경마식 중계’는 더욱 문제다. 이른바 ‘성재기 사태’가 주는 사회적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공영방송 KBS는 투신 소동을 촬영하며 자살을 방조했다는 비판의 중심에 서있다. 하룻밤 유흥거리가 된 ‘성재기 사태’는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의 가장 비루한 모습을 일거에 폭로해 웃음거리로 만든 사건이 돼버렸다.

그동안 성씨가 해온 주장들에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을 단순히 마초의 궤변이었다고 폄하할 수만은 없는 측면도 있다. 지난해 말 아동청소년보호법 개정 논란이 일었을 때 성씨는 국회 토론회에 참석해 누리꾼의 관심을 받았다.

“야동 보고 자위해 보셨어요? 남성의 심리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슨 아청법을 논한다는 겁니까? 바바리맨을 잡아야지, 남자들이 바바리를 못 입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의 독설에 고개를 끄덕이며 통쾌해한 남성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의 발언이 인간의 욕구와 욕망의 작동원리를 현상적으로 건드렸기 때문이다. 이는 에로티시즘적 욕망은 생물적·현실적 욕구를 충족시키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는 분석과 닿아있다. 즉, 성인영상물을 본다 해서 성범죄 욕망이 생긴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성씨의 발언을 체로 걸러 성범죄의 원인과 성범죄 속 남녀의 권력관계를 밝히는 건강한 토론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말과 행동은 타당성을 따지기 전에 인간의 감춰진 ‘성적 본능’을 건드렸기에 불편할 수 있다. 그래서 그에게 일견 공감하는 대중들도 그를 비웃고 공격함으로써 ‘성재기와 난 다르다’고 ‘구별 짓기’한 건 아니었을까?

여성가족부를 폐지하자는 그의 주장도 사실 금기시할 말은 아니다. 정부 부처는 존속시킬 필요성이 있는지를 늘 평가해 개편하거나 폐지할 수도 있는데, 여성가족부만 예외일 수는 없지 않은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여성부가 얼마나 여성·아동·가족의 삶의 질을 높이는 활동을 해왔는지 확인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여성 인권을 보장하려면 여성부가 무조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도 문제다. 여성부라는 언어의 상징성에만 천착하면 오류가 생긴다. 예컨대 법무부(Ministry of Justice)가 이름 그대로 항상 '정의'(Justice)을 위해 일해왔는지는 의문이다.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사태 등 공권력의 폭력에서부터, 비정규직 노동, 동성애, 노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인권 문제는 남녀 공통의 문제다. 이 때문에 실상 어느 한 계층이 인권 담론을 독점할 수는 없다. 오늘날 인권 문제는 연대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성격을 갖고 있다. 성씨의 조악한 주장들을 시민들이 진지하게 가지치고 키워나갔다면 여성부가 폐지되고 ‘인권부’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성씨의 존재는 사회구성원이 함께 손질하고, 확장시켜야 할 쟁점을 던졌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성씨 주장에서 비합리성과 폭력성을 문제 삼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논박하면 된다. 거칠게 던져진 논점도 토론을 거쳐 다듬고 사회구성원들이 합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면 된다. 그게 민주주의가 아닐까?

성씨가 주검으로 발견되자 애도 여론이 나온다. 바람직하지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생각에 그친다면 아쉽다. 그를 우상화하려는 발언도 불편하다. 민감한 사안에서 손을 털고 도의적 책임부터 면하겠다는 자기방어 기제가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 성재기 사태가 드러낸 우리 사회의 민낯을 정면으로 봤으면 한다. 우선은 ‘성재기가 죄가 있나’부터 생각해 볼 일이다.

손택의 말처럼 다같이 슬퍼하되, 다같이 바보가 돼서는 안 된다. 성씨는 죽었지만 ‘성재기 사태’는 살아 움직이며 우리의 부끄러운 곳을 헤집고 있다. 성재기 사태를 보고도 배우는 게 없다면 우리는 딱히 성재기씨보다 나을 것도 없는 ‘비루한 민주사회의 시민’일 따름이다. 성재기는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과제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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