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이청초 기자

▲ 이청초 기자

2012년 대통령선거의 화두는 단연 ‘경제민주화’였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우리 사회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진전됐으니 이제는 그 외연을 경제로 확장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높았다. 그러나 최근 부분적으로나마 실상이 드러난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을 보면 경제민주화를 말하는 게 사치스러울 지경이고,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절벽으로 몰리고 있다는 위기감이 든다. 이명박 정부 이후 ‘민주주의 후퇴’ 논란이 적지 않았지만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헌정질서 파괴’, ‘국기문란’이라는 탄식이 터무니없어 보이지 않는다.

국가정보원은 국가안보와 국익을 지키기 위해 음지에서 뛰는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라는 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다. 현재의 남북대치상황 등 한반도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대처하는 활동이 비밀스럽고 독점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불가피하게 조직이 폐쇄적으로 운영되지만 국정원 기능은 꼭 필요하다는 게 국민적 합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암묵적 지지와 믿음을 국정원은 무참하게 깨버렸다. 국정원은 국익대신 조직과 정파의 이익을 위해 ‘댓글 공작’ 등으로 대선에 개입했고, 불법 행위가 폭로된 후에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발언이 담긴 2007년 남북정상회담 기록물을 무단 공개함으로써 대선 개입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고자 했다. 국가안보를 위해 뛰어야 할 요원들을 동원해 특정인의 집권에 유리하도록 여론을 조작한 것은 민주주의의 핵심인 ‘공정 선거’를 방해한 중대 범죄다. 민감한 내용이 담긴 정상외교기록을 정파의 이익을 위해 자의적으로 공개한 것 역시 중대한 국익 침해 행위다.

문제는 이런 범죄 행위에 대처하는 우리 사회 공조직들의 태도다. 검찰과 경찰은 국정원 선거개입 혐의가 불거졌을 때 신속히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 책임자들을 기소함으로써 ‘법질서 수호’라는 본분을 다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들은 수사축소를 시도하고, 엉터리 중간수사결과를 전격 발표해 여당 후보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는 등 한통속으로 돌아갔다. 경찰 조직 내부의 반발과 폭로 등으로 사건의 진상을 감출 수 없게 되자 마지못해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을 기소했지만 그 과정과 내용이 철저하고 합당했다고 믿는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야당의 요구로 시작된 국정조사 역시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조사를 통해 밝혀내야 할 본질 대신 ‘막말 논란’ 등 지엽적 공방으로 초점이 흐려지고 있는 국회에서 과연 철저한 진상규명이 이뤄질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이런 식으로 국정원 사건을 대충 덮고 넘어가게 된다면 민주주의와 사회정의의 퇴행을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철저한 진상규명도 엄정한 처벌도 뒤따르지 않는다면 언제든 범죄는 모방되거나 반복된다. 누가 어떤 지시를 내렸으며 누가 어떻게 수행했는지 몸통부터 꼬리까지 다 밝혀내고 가혹할 만큼 책임을 물어야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유대계 독일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 중 하나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본 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아이히만이 유대인 학살 등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은 태생적으로 사악해서라기보다 ‘무사유’, 즉 자신이 수행한 명령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움직인 탓이 크다는 설명이다. 아렌트는 인간이 행동에 앞서 마땅히 ‘사유’를 해야 하며 그 생각에 따라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예컨대 댓글공작에 동원된 국정원 직원들은 ‘주어진 명령을 이행했을 뿐’이라고 변명하겠지만, 자신의 행위가 어떤 사회적 해악을 낳을지 고민하지 않고 범죄의 손발이 된 데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가장 큰 벌은 ‘몸통’이 받아야 하지만 ‘꼬리’도 면책되지 않아야 범죄의 토양이 제거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물주고 돌보지 않으면 시드는 나무와 같다. 민주주의의 고사(枯死)를 막으려면 이를 위협하는 도전에 주권자인 국민들이 적극 맞서야 한다. 국정원 정치개입 사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흔들리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첫 걸음이다. 초점을 흐리는 온갖 정치책략에 휩쓸리지 말고, 더 많은 국민들이 더 강하고 끈질기게 이를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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