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현장] 김해 외국인 노동자 지원 센터 직원들의 마지막 출근

2008년부터 16년 동안 경남 일대의 외국인 노동자를 도왔던 김해 외국인 노동자 지원 센터(이하 ‘김해 외노자 센터’)가 폐쇄됐다. 김해뿐 아니라 전국 9개 거점 센터 모두 문을 닫았다. 지난 21일, 2024년 정부 예산안이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본회의에서 최종 의결됐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 지원 센터에 대한 사업액을 전액 삭감한 고용노동부의 예산안도 이날 확정됐다. 전국 거점 센터 직원들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하소연을 들어주며 따뜻하게 상담해주던 이들을 모두 잃었다.

고용노동부가 외국인 노동자 지원 센터 사업 폐지를 예고한 지난 9월부터 두 달 동안, <단비뉴스>는 전국 9개 거점 센터와 35개 소지역 센터에 전자우편을 보내거나 직접 통화하여 내년 운영 계획을 취재하고 이를 보도했다. (관련 기사 ’전국 9개 거점 외국인 지원센터 내년 문 닫는다‘) 이후 지난 10월 말부터 경남 김해 외노자 센터를 집중 취재했다. 김해 외노자 센터는 서울을 제외한 전국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센터다. 모두 6차례 찾아가 직원 17명, 외국인 노동자 30여 명을 인터뷰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날은 12월 28일이었다. 이날은 김해 외노자 센터가 문 닫는 날이었다. (편집자주)


지난 18일 김해 외노자 센터 주변 골목에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식품을 파는 마트나 가게가 줄지어 있다. 이채현 기자
지난 18일 김해 외노자 센터 주변 골목에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식품을 파는 마트나 가게가 줄지어 있다. 이채현 기자

경상남도 김해시 사람들은 이곳을 ‘외국인 거리’라고 부른다. 행정구역으로 보면, 동상동과 서상동에 걸쳐진 땅이다. 동상시장을 중심으로 김해 상권의 중심이었던 지역은 이제 구도심 취급을 받는다. 사람들은 내외동에 개발된 신도시로 몰려가 버렸다. 빈자리를 요즘엔 외국인들이 채운다.

외국인 거리의 골목마다 외국 식품을 파는 마트와 식당이 들어찼다. 서상동 분성사거리 횡단보도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마디나 할랄푸드’, ‘룸비니’, ‘크라카타우’ 등 낯선 언어의 간판이 빼곡하게 줄지어 있다. 영어 간판을 내건 환전소와 전자제품 가게도 있다. 주말이면, 김해는 물론 경남의 크고 작은 도시에서 찾아온 이주 노동자들이 거리에 북적인다. 모처럼 고향 음식을 먹은 그들은 삼삼오오 버스 정류장에 모여 경남의 크고 작은 도시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다만, 평일의 외국인 거리는 한산하다. 이주 노동자들은 평일에 일한다. 고향의 음식을 먹으러 이곳을 찾을 여유가 없다. 12월 28일에도 그랬다. 오전 8시 40분, 출근 시간이었지만 사람이 드물었다. 좁은 1차선 도로를 따라 늘어선 300여 개의 외국인 가게도 한산했다.

그나마 어느 카페에서 이주 노동자 두 명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근처에서 가장 높은 ‘아이조이빌딩’ 1층에 자리잡은 카페다. 외국인 거리의 어느 곳에서 보아도 한눈에 들어오는 이 건물의 6층과 7층에 김해 외노자 센터가 있다.

지난 28일 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보이는 김해 외노자 센터 입구에 ‘We Are Friends’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채현 기자
지난 28일 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보이는 김해 외노자 센터 입구에 ‘We Are Friends’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채현 기자

김해 외노자 센터의 존재감은 빌딩 입구의 입주자 우편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편함에 유독 우편물이 많은 곳은 김해 외노자 센터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 내리자 김해 외노자 센터 입구에 현판이 내걸려 있다. ‘We Are Friends.’

‘평생직장’에서의 마지막 하루

‘우리는 친구’라고 인사하는 현판을 바라보며, 이날 가장 먼저 출근한 이는 김해 글로벗 도서관의 김영숙 사서였다. 오전 8시 30분에 센터 문을 열고 들어온 그를 뒤따라, 상담팀의 김령아 대리,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노디라 상담원도 출근했다.

마지막 날의 일을 그들은 일찍 시작했다. 고용노동부의 방침에 따라, 모든 공식 업무를 이날 정오까지 마쳐야 했다. 그때까지 고용노동부에 제출할 서류를 모두 정리해야 했다. 김해 외노자 센터를 운영해 온 지난 16년의 역사가 담긴 온갖 서류를 정리하는 것은 매우 벅찬 일이었으므로 직원들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김해시의 외국인 거주 인구는 1998년 이후 계속 증가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다소 줄었지만, 지난해부터 다시 늘고 있다. 그래픽 이채현
김해시의 외국인 거주 인구는 1998년 이후 계속 증가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다소 줄었지만, 지난해부터 다시 늘고 있다. 그래픽 이채현

그 서류철에 켜켜이 깃든 김해 이주 노동자의 역사는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 정부는 산업 연수생 제도를 폐지하고 외국인 고용허가제를 시행했다. 그 영향을 받아, 1995년 무렵부터 김해시와 인근에 거주하는 이주 노동자가 늘기 시작했다. 특히 2007년 이후에는 인근 경남 지역보다 두 배 이상의 이주 노동자가 김해에 유입됐다.

2007년 당시 김해 인구는 약 47만 명이었고 그 가운데 외국인 인구는 약 1만 명이었다. 2010년부터 기업체가 매년 151개씩 증가해, 2015년이 됐을 때는 기업체가 7천여 개로 늘었다. 노동자 유입이 많아지면서 덩달아 외국인 수도 늘었다. 2015년에는 경상남도에 등록된 외국인 60% 이상이 김해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9년까지 김해에 등록된 외국인 인구수는 계속 증가해 1만 9천여 명을 기록했다. 코로나19로 2020년부터 외국인 유입이 잠시 1만 6천여 명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매년 약 천 명씩 꾸준히 증가해 2022년 약 1만 8천 명까지 회복했다.

지난달 19일 김해 외노자 센터 6층 로비에서 이주 노동자들이 상담 순서를 기다렸다. 이채현 기자
지난달 19일 김해 외노자 센터 6층 로비에서 이주 노동자들이 상담 순서를 기다렸다. 이채현 기자

이주 노동 인구가 본격적으로 급증한 2008년 김해 외노자 센터가 탄생했다. 이주 노동자가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 외국인 거리의 중심에 있는 빌딩에 센터 사무실을 마련했다. 고용노동부가 사무 공간을 빌렸고, 인근의 가야대학교가 센터 운영을 위탁받았다. 센터는 지역의 전문가와 한국 정착 이주민을 고용했다. 대다수 직원은 무기계약직이었지만, 마음으로는 ‘평생직장’으로 여기며 김해 외노자 센터에서 일했다.

김령아(52) 상담팀 대리도 그랬다. 원래 학교 돌봄 교사였던 그는 여러 학교를 비정규직으로 옮겨 다니는 일에 지쳐 있었다. 그래도 누군가를 돌보는 일을 계속하고 싶었다. 김해 외노자 센터를 틈틈이 찾아 자원봉사를 했다. 그러다 2021년 6월, 정식 직원이 됐다. 지난 10월 31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김 대리는 “이곳에 와서 뿌듯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주 노동자를 상담할 때마다 그들의 간절한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는 기분과 마음이 참 좋다고 말했다. 마지막 출근날인 28일 오전, 그의 마음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김 대리는 딱딱한 얼굴로 복합인쇄기 앞에 서서 서류를 복사하고 있었다.

2천여 명의 발걸음이 향하던 곳

오전 9시, 김해 외노자 센터의 로비는 고요했다. 가끔 복사기가 작동하거나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만 들렸다. 로비 책상 위에는 12월 27일 자 신문이 접힌 상태로 쌓여 있었다. 직원들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남향인 창문을 등지고 일렬로 놓인 책상에 앉은 상담원들의 시선은 초점을 잡지 못했다.

멍하니 앉았던 이들의 정적을 깨고, 베트남 상담원 A 씨가 제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정리하고 개인 사물을 커다랗고 파란 상자에 담았다. 다른 상담원도 김해 외노자 센터 로고가 박힌 종이 가방에 개인 사물을 넣었다. 옆자리에 앉은 중국 상담원 B 씨도 정리를 시작했다. 2008년부터 이주 노동자를 상담해 온 그는 이곳 직원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일했다. 무엇을 정리하고 처분할지 분류하는 그의 손놀림은 빨랐다.

신분이 드러날 것을 꺼려 취재팀에게 익명을 요청한 이들을 포함해 상담팀의 중심에는 A 씨와 B 씨와 같은 8명의 이주민 출신 상담사들이 있다. 베트남, 중국, 인도네시아, 네팔, 우즈베키스탄, 미얀마, 필리핀, 캄보디아에서 태어난 이들은 각자의 언어로 이주 노동자를 직접 상담했다. 6번의 방문 때마다 이들이 가장 바빠 보였다. 임금체불, 출입국, 체류 문제, 산업재해 등을 문의하려 김해 외노자 센터를 찾는 이들이 무척 많기 때문이다.

지난달 19일 일요일에 김해 외노자 센터를 찾은 이주 노동자들이 다양한 이유로 상담받던 모습을 취재팀이 담았다. 신혜림 PD
지난달 19일 일요일에 김해 외노자 센터를 찾은 이주 노동자들이 다양한 이유로 상담받던 모습을 취재팀이 담았다. 신혜림 PD

경상남도에는 거점 지원 센터가 세 곳이 있다. 김해를 비롯해 창원, 양산에도 있다. 각 거점 센터의 담당 지역은 다소 구분돼 있다. 김해 외노자 센터는 김해는 물론 인근 도시인 밀양과 양산의 이주 노동자에 더해, 부산과 울산 같은 광역시의 이주 노동자까지 담당했다. 이들 지역만으로도 이미 광대한데, 김해 외노자 센터의 소문을 듣고 대구나 인천의 이주 노동자가 찾아오기도 한다.

주말이었던 지난 11월 19일의 경우, 이른 아침부터 김해 외노자 센터의 로비가 이주 노동자로 붐볐다. 그들 각자가 복잡한 사연과 문제를 안고 센터를 찾아온다. 그날 만난 미얀마 출신 얀나이우(31) 씨에게도 사연이 있었다. 원래라면 1년 전 귀국할 예정이었지만, 미얀마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본국 상황이 악화해 돌아갈 수 없게 됐다.

지난달 19일 건강검진을 위해 김해 외노자 센터를 방문한 미얀마 출신의 얀나이우 씨가 취재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채현 기자
지난달 19일 건강검진을 위해 김해 외노자 센터를 방문한 미얀마 출신의 얀나이우 씨가 취재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채현 기자

그를 상담하고 도운 것은 센터의 미얀마 출신 니오파야르 빈 상담원이었다. 그 도움을 받아, 얀나이우 씨는 난민 비자를 얻었다. 이날엔 예전 가입했던 ‘출국 보험금’을 받을 수 있을지 문의하려고 김해 외노자 센터를 찾았다. 고국에 머무는 아내와 네 살 아들에게 돈을 보내려면 보험금을 꼭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얀마의 말로 니오파야르 상담원이 그를 안심시켰다. 보험금을 받을 길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제야 얀나이우 씨는 웃었다.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저장한 그는 휴대폰을 들어 기자에게 자랑스레 보여줬다.

언제나 고국의 가족이 그리운 이들은 수시로 김해 외노자 센터를 찾아 상담을 받았다. 주말에는 하루 50~60명, 평일에도 10~20명 정도가 모국어를 할 줄 아는 상담사를 찾아온다. 지난 11월, 김해 외노자 센터 상담사들은 2450명과 상담했다. 이 가운데 직접 찾아온 이가 1859명, 전화로 상담한 이는 572명이었다. 가끔 센터 직원들이 이주 노동자의 직장이나 거주지를 찾아가기도 한다. 이렇게 ‘방문 상담’한 이도 19명이었다. 이를 1년으로 환산해 추론하면, 대략 한 해에 2만 명이 김해 외노자 센터를 찾는 셈이다.

효율성 따진 결정에 이주 노동자는 없어

이주 노동자 수만 명을 앞으로 누가 상담할지에 관한 고용노동부의 계획은 ‘이관’이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9월 외국인 노동자 지원센터 사업 폐지를 알리며, 원래 거점 센터가 맡았던 상담 업무를 고용노동부 산하 지방고용노동부로 이관하겠다고 밝혔다. ‘상담 업무를 전화로 더욱 효율적으로 제공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상담과 행정 처리가 구분된 이원화 체계를 하나로 합쳐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정부의 발상은 지난 16년에 걸친 김해 외노자 센터의 운영 방식과 매우 다르다. 센터의 전체 상담 건수 가운데 75%는 방문 상담이다. 복잡한 처지에 놓인 이주 노동자들은 얼굴을 직접 보며 말을 잘 들어줄 수 있는 곳을 선호한다는 걸 입증한다. 지난달 19일 만난 미얀마 출신 기여스(32) 씨도 외노자 센터가 없어지면 안된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서툰 한국어로 설명하는 그 이유의 핵심도 대면 상담이었다. “없으면 안 돼요. (우리가) 말을 할 수 있는 곳이니까.”

게다가 고용노동부의 계획에는 ‘주말 상담’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다. 그동안 김해 외노자 센터는 매주 일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일하고, 금·토요일에 쉬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하고, 일요일 딱 하루 쉬는 이주 노동자를 배려한 근무 방식이었다.

오전 9시 30분, 상담팀의 맨 끝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던 나비에바 노디라(34) 상담원이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이를 알아챈 네팔 출신 상담원 D 씨가 작은 목소리로 그를 다독였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노디라 상담원의 눈물을 다른 직원들은 모르는 척해줬다.

지난달 19일 정상 업무를 보던 우즈베키스탄 출신 나비에바 노디라 상담원이 분주하게 업무를 봤다. 이채현 기자
지난달 19일 정상 업무를 보던 우즈베키스탄 출신 나비에바 노디라 상담원이 분주하게 업무를 봤다. 이채현 기자

센터에 대한 노디라 상담원의 애정이 남다르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몇 차례 만날 때마다 그는 가장 큰 목소리로 씩씩하고 활달하게 상담에 임했다. 지난 11월 만났을 때만 해도 노디라 상담원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센터를 폐쇄할 이유가 없다고 그는 말했다. “왜? (센터를 없애겠어요?) 노동자들도 한국을 위해서 열심히 하잖아요. 노동자들이 있으니까, 한국이 점점 올라가는 거잖아요.”

한국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주 노동자 16명은 마지막 업무일에도 김해 외노자 센터를 찾아왔다. 그 가운데 네팔 출신 이주 노동자 두 명은 고용노동부 산하 지방고용노동부 출장소의 안내를 받아 센터를 찾았다. 문을 닫고 일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놓고, 마지막 날까지 일을 떠맡긴 셈이다.

이효남 운영지원팀 과장은 상황을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다. 상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네팔 노동자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언제 와?” 언제 다시 오면 되느냐는 질문이었다. 센터가 문을 닫게 됐고, 네팔 출신 상담원도 여기에서 만날 수 없다고 이 과장은 설명했다. 가만히 듣던 네팔 노동자가 이 과장에게 물었다. “그럼 어디서 이제 이야기해?”

마지막 날에도 “정해진 바 없다”는 말만

김해 외노자 센터의 꽃은 상담 업무라지만, 상담팀 외에도 센터를 지탱하는 두 팀이 더 있다. 운영지원팀과 교육·문화팀이다. 이날은 두 팀에선 한 명씩만 출근했다. 센터가 문을 닫으면서 남은 연차휴가를 소진해야 했다. 급작스레 폐쇄 통보를 받은 이들이 함께 모여 작별 인사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운영지원팀 이효남 과장은 장차의 일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옅게 웃었다. “개인적으로 알아서 해야죠.” 이 과장은 사무실 캐비닛에서 회계자료 서류를 꺼내 파란 박스에 담았다.

지난달 19일 김해 외노자 센터 로비에서 이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무료 보건소가 열렸다.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이주 노동자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다. 이채현 기자
지난달 19일 김해 외노자 센터 로비에서 이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무료 보건소가 열렸다.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이주 노동자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다. 이채현 기자

지난달 진행한 ‘무료 보건소’도 운영지원팀이 담당하는 사업이었다. 김해 외노자 센터는 지역 병원 및 보건소와 업무협약을 맺어, 한 달에 한두 번 무료 건강검진을 벌였다. 취재팀이 센터를 방문한 지난 11월 19일,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중단됐던 ‘무료 보건소’가 3년 만에 열렸다. 어림잡아 70여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센터의 로비에 줄지어 서 있었다. 이 사업을 어떻게 이관받을 것인지에 관해 고용노동부는 아직 설명하지 않았다.

지난 6월 18일 김해 외노자 센터가 주최한 '미얀마 축구 대회'가 경상남도 김해시 안동 안동체육공원축구장에서 열렸다. 이날 치뤄진 행사에 미얀마 노동자 및 다문화인 500여 명이 참석했다. 김해 외국인 노동자 지원 센터 제공
지난 6월 18일 김해 외노자 센터가 주최한 '미얀마 축구 대회'가 경상남도 김해시 안동 안동체육공원축구장에서 열렸다. 이날 치뤄진 행사에 미얀마 노동자 및 다문화인 500여 명이 참석했다. 김해 외국인 노동자 지원 센터 제공

김해 외노자 센터가 문을 닫으면서 이주 노동자를 위한 커뮤니티 행사도 길을 잃게 됐다. 지난 10월 개최한 ‘2023 외국인주민 다(多)어울림 축제’에는 600여 명의 이주 노동자와 다문화 가족이 모였다. 지난 6월에는 미얀마 이주노동자들이 참가한 축구 대회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이주 노동자들이 도모하는 여러 행사를 돕고 후원했다. 이런 행사가 그들의 연결과 상호부조를 북돋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가 이런 행사를 어찌 운영할지에 관해서도 아직 알려진 바 없다.

지난 28일 일요일이면 두 문을 열어 수강생을 기다렸던 김해 외노자 센터 7층 교육 공간이 굳게 닫혀 있다. 이채현 기자
지난 28일 일요일이면 두 문을 열어 수강생을 기다렸던 김해 외노자 센터 7층 교육 공간이 굳게 닫혀 있다. 이채현 기자

오전 10시, 이효남 운영지원팀 과장이 작은 수레에 파란 박스를 싣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문서 창고로 향하는 길이었다. 7층에 내리자 컴컴한 교육장이 보였다. 이주 노동자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이었다. 세 개의 작은 교육실과 대강당에서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어와 직업 기술 등을 공부했다.

김해 외노자 센터가 마련한 모든 교육은 무료였다. 한국어와 정보화 교육은 일요일마다 센터 안에서 진행했다. 이주 노동자들은 문서 작성 프로그램을 비롯해 엑셀과 파워포인트를 한국어로 배웠다. 운전면허 수업 등은 인근 경찰서와 업무 협약을 맺어 진행했다. 그동안 800여 명이 김해 외노자 센터에서 배웠다.

지난달 19일 김해 외노자 센터 7층 대강당에서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신혜림 PD
지난달 19일 김해 외노자 센터 7층 대강당에서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신혜림 PD

그 인기는 매우 높았다. 지난 10월 30일 만난 신지윤 교육팀 대리가 설명했다. “대기자만 200명일 때도 있죠. 멀리서 오는 분들도 많아요. 김해뿐 아니라 대구에서도 와요. 여기 살다가 다른 지역으로 가더라도 끝까지 수료하고 싶어서 오는 분들도 있어요.”

캄보디아 출신의 시본(28) 씨도 끝까지 수료하고 싶어 하는 이주 노동자다. 한국어 중급반을 수강 중인 그는 수업을 한 번도 빼먹지 않은 ‘성실한 우등생’으로 통한다. 지난 11월 19일 만난 그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 왔을 때는 숫자 세기만 할 줄 알았어요. 이제는 회사(에서)도 다른 (한국인) 친구들이 생겼어요.”

지난달 19일 캄보디아에서 온 시본 씨가 한국어 교육을 기다리며 강의실 앞 테이블에 앉아 취재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신혜림 PD
지난달 19일 캄보디아에서 온 시본 씨가 한국어 교육을 기다리며 강의실 앞 테이블에 앉아 취재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신혜림 PD

시본 씨가 앞으로 중급 한국어 과정을 어디서 공부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거점 센터가 맡았던 한국어 와 정보화 교육을 산업인력공단이 진행하겠다고 고용노동부는 발표했지만, 실제로 어떻게 운영할지에 관한 구체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취재팀이 지난 28일 한국산업인력공단 경남지사 외국인고용지원부에 전화로 문의했을 때도 “(이주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을 어떻게 진행할지) 정확한 계획이 나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실무 책임자는 “산업인력공단 본청에서 지침이 내려오지 않아, 대기 중”이라고만 설명했다. 정확한 날짜를 명시하여 외노자 센터의 문을 닫게 했으면서, 정작 그 일을 누가 맡을지는 2023년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도 결정하지 못한 것이다.

하루아침에 '퇴거', 센터의 작은 도서관

지난 28일 아직 이사하지 않은 글로벗 도서관이 김해 외노자 센터 6층 로비 안쪽에 자리한 모습이다. 이채현 기자
지난 28일 아직 이사하지 않은 글로벗 도서관이 김해 외노자 센터 6층 로비 안쪽에 자리한 모습이다. 이채현 기자

오전 11시, 김영숙 사서는 김해 외노자 센터 6층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김해 글로벗 도서관’을 혼자 정리하고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작은 도서관 사업’에 따라 2009년 지어진 김해 글로벗 도서관은 원래 김해시 도서관에 소속돼 있지만, 특수성을 고려해 외국인 거주자가 많이 찾는 이곳 김해 외노자 센터에 자리를 잡았다. 이주 노동자들은 여기서 주로 한국어 교습서를 빌렸다. 그 밖에도 외국인 거주자와 다문화 가정을 위한 17개국 언어로 된 9,500여 권의 장서가 있다. 그 책 하나하나가 김 사서의 친구이고 자식이다.

9천 권이 넘는 책을 들고 어디로 옮겨야 하나, 김 사서의 고민이 깊었다. 고용노동부 명의로 빌린 건물에 김해 글로벗 도서관이 무상으로 들어온 상황이었다. 고용노동부가 센터를 폐쇄하면 도서관도 어디론가 옮겨 가야 했다. 마지막 업무일까지 가장 먼저 출근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고용노동부의 방침이 자꾸 바뀌었다. ‘(센터 폐쇄와 별개로 도서관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도 된다’고 했다가, 갑자기 말을 바꿔 ‘이사할 공간과 비용을 마련하라’고 알려오기도 했다. 여러 혼란 끝에 25평짜리 공간을 이 건물에서 겨우 마련하게 됐다. 이주 노동자들이 많이 찾아오는 거리를 그대로 지키게 되어 불행 중 다행이겠지만, 이날 혼자 도서관을 정리하는 김 사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오지 못할 그곳을 마음에 새기다

오전 11시 30분, 상담원 가운데 마지막으로 필리핀 출신의 F 씨가 출근했다. 문을 들어설 때 그녀는 활짝 웃었다. 곧이어 황혁진 상담팀 팀장에 달려가 안겼다. 정주영 상담팀 과장도 와락 안았다. 웃던 눈이 일그러졌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나 눈물 나.”

그녀 주위로 미얀마, 인도네시아, 중국,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동료 상담원들이 모였다. 오래 참았다는 듯, 그들은 한국말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누가 누구에게 건네는 인사인지 구분하지 않았다. “건강해야 해.” “행복하세요.” “보고 싶을 거야.” 그들 가운데 가장 덤덤했던, 인도네시아 출신 얀티 상담원은 끝내 울었다.

지난 28일 상담원들이 기념으로 남기기 위해 함께 포즈를 취하며 ‘김해 외국인 노동자 지원 센터’라는 이름이 보이는 벽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모자이크 처리하지 않은 사람 가운데 왼쪽부터 미얀마 출신 니오파야르 빈, 우즈베키스탄 출신 나비에바 노디라 상담원이다. 다른 상담원은 신원 밝히기를 거부해 모자이크 처리했다. 신혜림 PD
지난 28일 상담원들이 기념으로 남기기 위해 함께 포즈를 취하며 ‘김해 외국인 노동자 지원 센터’라는 이름이 보이는 벽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모자이크 처리하지 않은 사람 가운데 왼쪽부터 미얀마 출신 니오파야르 빈, 우즈베키스탄 출신 나비에바 노디라 상담원이다. 다른 상담원은 신원 밝히기를 거부해 모자이크 처리했다. 신혜림 PD
지난 28일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아 포즈를 취한 상담원을 상담하러 온 이주 노동자가 촬영하고 있다. 이채현 기자
지난 28일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아 포즈를 취한 상담원을 상담하러 온 이주 노동자가 촬영하고 있다. 이채현 기자

그들의 인사에는 웃음과 울음이 섞였다. “우리 사진 찍자.” 누군가의 제안에 그들은 일제히 모였다. 두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고, 승리의 브이(V)도 만들었다. 우느라 눈두덩이 발갛게 부었지만, 눈가는 반달처럼 휘어 웃었다. 단체 사진 촬영이 끝나자 두세 명씩 모여 다시 찍었다. 뒤이어 책상에서 일하는 모습으로 혼자 찍거나, ‘김해 외국인 노동자 지원 센터’ 현판을 손으로 가리키며 찍었다. 다시 보지 못할 현판이고, 다시 앉지 못할 자리였다.

이날 김해 외노자 센터에 마지막으로 출근한 이는 백남경 센터장이었다. 백 센터장은 올해 2월부터 이곳에서 일했다. 원래 그는 언론인이었다. <부산일보>에 재직하다 퇴임한 직후 김해 외노자 센터에 왔다. 부임 직후부터 거대한 풍랑을 막느라 몸과 마음으로 고생했다. 외노자 센터 폐지를 막기 위해 언론과 수십 차례 인터뷰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힘든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지난 10월 만났을 때만 해도 취재팀에게 자신 있는 목소리로 “이제 외국인 노동자를 상대로 서명을 받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이주 노동자들이 직접 서명한 반대 청원서도 국회에 전달했다.

모두 수포로 돌아간 그 노력에 대한 회한이 없는, 차분하고 담담한 표정으로 백 센터장은 사무실에 들어섰다. 잠시 소란했던 로비가 조용해졌다. 직원들은 묵묵히 사무실 앞에 줄을 섰다. 마지막으로 결재받아야 할 서류가 많았다.

김령아 상담팀 대리는 상담팀 직원들의 경력증명서를 센터장에게 냈다. 앞으로 그들의 미래를 도와줄 소중한 문서였다. 센터장은 상담원 이름을 한 명 한 명 짚으며 서명했다. 그 뒤로 지출결의서를 든 이효남 운영지원팀 과장이 결재를 받았다.

친구 같던 센터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

지난 28일 김해 외노자 센터 공식 업무가 12시를 끝으로 종료되어 불이 꺼지고 로비가 텅 비었다. 이채현 기자
지난 28일 김해 외노자 센터 공식 업무가 12시를 끝으로 종료되어 불이 꺼지고 로비가 텅 비었다. 이채현 기자

낮 12시, 상담팀 직원들이 하나둘 외투를 입었다. 고용노동부의 지침에 따라 이날 정오를 기점으로 모든 업무 시스템이 종료됐다. 더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됐다. 일을 잃은 그들은 이제 센터에 남을 필요가 없었다. “밥이라도 한 끼 해요.” 정주영 상담팀 과장이 말했다. 울며 웃으며 사진을 찍은 상담원 모두 사무실을 나섰다.

서류 정리를 위해 좀 더 머물게 된 운영지원팀과 교육팀 직원들이 상담팀 직원들을 배웅했다. “또 언제 보겠어요?” 이주민 출신 상담원들이 한국인 직원들에게 물었다.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이효남 운영지원팀 과장은 질문에 답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꺼냈다. “내가 선생님 진짜 좋아했던 거 알지요?” 가장 쾌활했던 노비라 상담원은 그 말에 다시 눈물을 보였다. 둘은 서로 부둥켜안았다.

그들을 먼저 보낸 직원들은 낮 12시 30분에야 건물을 나섰다. 백남경 센터장과 이광재 운영지원팀 과장이 외투를 챙겨 입었다. 점심을 함께 먹고, 다시 돌아와 남은 일을 마칠 요량이었다. 제일 먼저 출근한 김영숙 사서는 혼자 점심을 먹겠다고 했다. 김 사서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와 기자를 배웅했다.

지난 28일 김해 외노자 센터 6층 로비로 들어가는 문에는 업무 종료를 안내하는 종이가 붙었다. 이채현 기자
지난 28일 김해 외노자 센터 6층 로비로 들어가는 문에는 업무 종료를 안내하는 종이가 붙었다. 이채현 기자

돌아 나오는 길에 다시 입구를 보았다. 유리문에 종이 한 장이 새로 붙었다. 굵고 붉은 글씨로 도드라지게 편집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김해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 업무가 ‘12월 31일’부로 종료되었습니다.’ 그 위의 현판은 아직 떼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선명했다. We are fri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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