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교양특강] ‘21세기 페미니즘의 이해’ 김은주 교수

“할머니들이 많이 계시는 데서 강의한 적이 있어요. (저보고) ‘서울에서 공부도 많이 하고 너무 부럽다’면서 ‘나는 다시 태어나면 남자로 태어나서 밥상 한번 받아보고 싶다’고 하시는 거예요. 평생 매일 삼시세끼 차리는 생각만 하고 살았다고... 할머니들을 봤을 때, ‘자기가 자기로 사는 삶에 자부심이 없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남자들은 ‘여자로 다시 태어나 세상에 뜻을 펼치고 싶다’고 하지 않잖아요. 이렇게 여성이 여성으로 사는 것에 자부심이 없다는 사실이 페미니즘 이론의 가장 큰 출발점이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김은주(47)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지난 7일 충북 제천시 세명대 문화관에서 ‘21세기 페미니즘의 이해’를 주제로 강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인문사회교양특강의 하나로 열린 이날 강연에서 김 교수는 페미니즘이 ‘여성의 자기혐오를 끝내면서 모든 이와 더불어 새로운 삶의 양식을 모색하고 대안적 가치를 생산해 내는 세계관’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화여대에서 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여성학 연구를 병행해 왔으며 <페미니즘 철학 입문>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여성-되기: 들뢰즈의 행동학과 페미니즘> 등의 저서로 주목받았다.

‘여성으로 사는 것에 자부심 없음’이 페미니즘의 출발점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인문사회교양특강에서 ‘21세기 페미니즘의 이해’를 주제로 강연하는 김은주 서울시립대 연구교수. 구혜림 기자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인문사회교양특강에서 ‘21세기 페미니즘의 이해’를 주제로 강연하는 김은주 서울시립대 연구교수. 구혜림 기자

김 교수는 우리 사회에 남녀차별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면서 페미니즘에 반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젊은 남성들이 ‘부모가 누나와 나를 차별한 일이 없다’ ‘남자는 병역으로 오히려 손해를 본다’ 등의 얘기를 하며 ‘과연 남녀 사이에 비대칭적 권력관계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의문이 ‘직관과 원리의 모순’ 탓이라고 설명했다.

“지구가 자전하고 공전하지만, 우리가 지구의 운동을 직접 느끼진 못하죠. 이처럼 우리의 직관은 사회 원리와 모순을 일으키곤 합니다. (남녀차별에 관해) 개인이 가진 경험은 저마다 다르기에, 자신의 직관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 한계가 왜 발생했는지 탐색하는 것이 학문적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김 교수는 생물학적 성별인 섹스(sex)와 달리 사회문화적 성별인 젠더(gender)는 어떤 공간과 시간을 살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는 ‘수행성’(performativity)을 갖는다고 말했다. 그는 “젠더는 명사형이 아니라 동사형”이라며 시대 변화에 따라 젠더 수행이 달라지는 사례로 남성 메이크업 아티스트 레오제이와 아이돌그룹 샤이니의 키를 들었다. 이들은 유튜브나 TV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꼼꼼히 피부관리를 하는 등 전통적인 남성상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김 교수는 “페미니즘은 인간이 보편적이라고 믿어왔던 역사가 사실은 보편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와 특정한 공간과 특정한 관점들을 대표해 왔을 뿐이라는 것을 지적한다”며 “동시에 여성 스스로 이에 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만든다”고 말했다.

문화방송(MBC) 예능 프로그램 에서 샤이니의 멤버 키가 피부관리를 하고 있다. 외모 관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새로운 남성상을 보여준다. MBC 화면 갈무리

‘네 개의 물결’이 이어지고 중첩되는 페미니즘 역사

김 교수는 페미니즘 역사를 네 번의 물결로 설명했다. 제1 물결은 ‘여자도 인간이다’ 구호를 중심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시작됐다. 교육권과 참정권 등 인간으로서 누릴 권리를 쟁취하는 것이 목표였다. 영국 여성 참정권 운동의 대표주자인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대표적 인물이다.

2차대전 이후 등장한 제2 물결은 ‘여성은 여성이다’를 외쳤다. <제2의 성>을 쓴 시몬 드 보부아르가 1960~1970년대에 제2 물결을 이끈 대표적 페미니스트다. 김 교수는 리베카 솔닛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비판한 ‘맨스플레인’(mansplain), 즉 남성이 여성을 얕잡아 보고 설교하는 것을 제2 물결과 관련한 논의라고 말했다. 남성이 인간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자기 목소리로 말하고 여성 서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흐름이었다는 설명이다.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과 줌 화상회의로 연결한 외부 청강생 등 30여 명이 김은주 교수의 강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 구혜림 기자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과 줌 화상회의로 연결한 외부 청강생 등 30여 명이 김은주 교수의 강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 구혜림 기자

제3 물결은 이전의 페미니즘 흐름이 ‘백인 중산층 여성’에 국한되었던 것을 비판한 운동이다. ‘여성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고 주장하며 유색인종, 성소수자 등 다양한 배경의 여성이 스스로 사고하고 발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드리 로드가 쓴 <시스터 아웃사이더>가 대표적 저작이다.

마지막으로 제4 물결은 온라인 페미니즘운동을 말한다. 온라인에서는 익명의 폭로가 가능하며 이를 통한 대중운동이 쉽게 확산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2018년 서지현 검사의 ‘미투’(나도 고발한다) 등이 많은 여성을 결집했다. 김 교수는 “1물결, 2물결, 3물결, 4물결은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누적되어 겹쳐 있다”며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여성 탄압 등을 들어 “아직 1물결이 완성되지 않은 곳도 있다”고 지적했다.

선진국에도 언제든 닥칠 수 있는 ‘백래시’

미국 연방대법원은 지난해 6월 24일 임신중지(낙태)를 합법화한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50년 만에 뒤집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기에 대법관 구성이 보수화한 탓이었다. 이후 미국 사회에서는 임신중지권을 둘러싼 갈등이 커지고 있다. 김 교수는 “역사는 전진한다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며 “언제든 백래시(반동)가 닥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불화를 교섭하고 연결하는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페미니즘 현안에서 언론 역할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예로 <경향신문>의 데이터저널리즘 프로젝트(다이브)의 ‘단지 그대가 여성노동자라는 이유로’ 보도를 들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공개한 ‘성별 임금격차’ 자료를 분석해 조사대상국 중 가장 심각한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 현황과 배경을 심층 분석한 기사였다.

경향신문의 데이터저널리즘 프로젝트는 OECD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 성별 임금격차의 현황과 원인을 분석해 남녀차별의 구조적 실태를 잘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향신문 누리집 갈무리
경향신문의 데이터저널리즘 프로젝트는 OECD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 성별 임금격차의 현황과 원인을 분석해 남녀차별의 구조적 실태를 잘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향신문 누리집 갈무리

이어진 질의답변에서 김지영(24·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 씨는 “페미니즘이 신자유주의에 포섭되면서 여성의 야망과 재테크로 이어지기도 한다”며 신자유주의와 액티비즘(여성운동)의 연결을 어떻게 보는지 물었다. 김 교수는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목적이 있는 것인데, 그러면 사회적 가치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며 “돈이 많으면 젠더와 관계없이 안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상상력의 협소함’ 때문에 생겨난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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