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시대가 나를 버려도 포기할 수 없는 것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청춘 드라마다. 청춘은 꿈과 동경, 사랑이 뒤섞인 주스다. 생생한 감정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색도 오묘하다. 마시면 어떤 맛이 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무서워도 마셔야 한다. 인생이라는 테이블 위에 놓인 1인분의 청춘을 마시며 아이는 몸집이 커져 마침내 어른이 된다. 아이는 청춘의 컵에 담긴 주스를 마실 때 혀끝에 느껴지는 쓴맛과 단맛, 매운맛을 고스란히 느끼며 삶을 배운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펜싱 국가대표를 꿈꾸는 고등학생 나희도(김태리)가 꿈과 동경과 사랑을 어떻게 지켰다가, 버리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지 보여주는 드라마다.

“사람들은 무언가 잃어가나 보다. 그렇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어른들의 일이다. 난 뭔가를 잃기엔 너무 열여덟이니까. 내가 가진 것은 잃을 수 없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꿈, 동경.”

▲ 외환위기 상황 속에 열여덟을 보내고 있는 나희도가 쓴 일기 중 일부. 꿈을 포기하게 만드는 시대에서 꿈을 잃지 않고 나아가기 위해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관계를 고민하게 하는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 tvN

1998년 IMF 외환위기 시절이 드라마의 배경이다. 회사가 부도나고, 집이 망하고, 가족이 순식간에 해체되는 비극이 일상인 시대였다. 시대의 비극이 꿈을 앗아갈 수 없다고 단언한 희도는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IMF 때문에 학교 예산이 줄어 펜싱부를 없애기로 했다는 코치 선생님의 말을 듣는다. 이렇게 꿈을 뺏는 게 어딨냐고 따지는 희도 앞에 코치는 딱 한마디 한다.

“네 꿈을 뺏은 건 내가 아니야. 시대지.”

시대가 꿈을 버리라고 해도 희도는 버리지 않는다. 재능 없는 거 증명하려고 펜싱 하냐며 엄마가 나무랐다. 좁은 바닥에서 네 이름을 모를 정도면 그게 네 성적표라며 최연소 올림픽 펜싱 금메달리스트 고유림(김지연)이 무시한다. 아시안게임에 선 희도를 향해 코치진과 국민 모두 유림의 승리를 빈다. 억울하고 불리해도 희도는 다시 펜싱화 끈을 고쳐 묶는다. 이때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모두가 펜싱을 그만두라고 했다. 그런데 그만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난, 여전히 이게 너무 재밌다.”

펜싱대결로 풀어내는 여성서사

스포츠물은 꿈을 향한 대결과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대표적인 청춘물 장르다. <테니스의 왕자>나 <슬램덩크> 같은 스포츠 소년만화를 연상시키는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여성들이 벌이는 스포츠 대결을 통해 청춘의 단면을 다룬다. 기존 남성 캐릭터들이 벌였던 스포츠 대결을 여성 캐릭터로 전환해 그렸다.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는 희도와 유림의 펜싱 대결을 통해 보여준다. 전작 드라마인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서 세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던 권도은 작가는 이번에도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의 우정과 경쟁을 그렸다. 남자 주인공 백이진(남주혁)은 외환위기로 집안이 풍비박산 났지만 신문 배달을 하고 만화책 대여점에서 일해 돈을 번다. ‘백마 탄 왕자’보다는 그간 여주인공에게 부여됐던 ‘캔디’ 캐릭터에 가깝다. 권 작가는 그동안 드라마에서 보여줬던 여성 서사의 힘을 어김없이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도 보여준다. 주변부에 머물렀던 여성을 중심으로 끌고 나와 여성들끼리 주고받는 성장 서사를 구현한다.

▲ 1999년 아시안게임 펜싱 결승에서 만난 유림과 희도. 대결은 승부를 가리는 일인 동시에 상대를 깊게 알 수 있는 매개체다. 서로에게 칼을 겨누며 상처를 내지만,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 속에 성장한다. ⓒ tvN

칼을 들고 겨룰 때 펜싱 선수들은 서로를 가장 잘 알 수 있다. 칼을 맞대고 부딪치고 피하면서 상대의 습관, 경기 운영 방법을 파악한다. 우정도 비슷하다. 직접 부딪치는 과정에서 서로를 깊게 알 수 있다. 회도와 유림은 경쟁 구도 속에서 갈등하지만, 그 속에서 화해하고 서로에 관해 깊게 배운다. 유림은 희도가 자신이 지켜온 금메달리스트 자리를 한꺼번에 무너뜨릴 것 같아 두렵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돈이 많이 드는 펜싱을 하며 국가대표 자리를 감내하기까지 유림은 고작 열여덟이었다. 어디에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곳 없는 유림에게 갑자기 나타난 희도는 어렸을 적 자신을 완벽하게 제압했던 상대였다. 당당하게 라이벌이 되고 싶다고 말하고 자신을 도와주는 희도를 향해 날을 세웠지만 결국 희도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싸우고 사과하고 다시 우정을 쌓는 과정을 통해 유림과 희도는 한 뼘씩 성장해 간다.

앙 가르드(기본 자세), 프레(준비), 알레(시작)!

드라마는 희도와 이진의 관계를 통해 사랑이 사람을 어떻게 성장시키는지 보여준다. 외환위기로 부도난 아버지의 회사 때문에 무너진 가장들에게 이진은 “다시는 행복하지 않겠다”며 용서를 빈다. 뒤에서 몰래 지켜보던 희도는 이진에게 말한다.

“시대가 다 포기하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행복까지 포기해? 앞으로 나랑 놀 때만, 그 아저씨들 몰래 행복하자.”

행복을 포기하지 말라고 다독이며 이진과 희도는 서로를 절망 속에서 구한다. 엄마도 자신이 펜싱 하는 걸 응원하지 않는데 왜 너는 응원하냐고 외치는 희도에게, 이진은 실패가 계단이 되고, 그 계단을 올라서기만 하면 된다는 말로 용기를 북돋아 준다. 두 사람은 고난과 실패를 겪으면서도 지치지 않도록 서로를 응원하고 나아가게 한다. 이진과 희도는 서로 미래를 포기하지 않도록 만드는 동력이 된다.

▲ 서로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주는 희도와 이진. 절망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 관계를 보여준다. ⓒ tvN

서로를 성장시키는 인간관계는 메인 캐릭터의 서사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고졸 출신을 기자로 뽑을 수 없다는 방송국장에게, 희도의 어머니인 아나운서 신재경(서재희)은 IMF 시대이기에 고졸을 뽑아야 하는 이유를 역설한다. 이진이 방송국에 입사하는 복선인 동시에 지금 청년세대가 어른들에게서, 세상에게서 듣고 싶은 말이다. 시합에서 위기를 맞닥뜨린 희도에게 코치 양찬미(김혜은)는 “너를 못 믿겠으면 너를 뽑은 나를 믿으라”고 말한다. 확신은 나이와 관계없다. IMF 그때나 청년들이 N포 세대가 된 지금이나 청춘에게 내일은 언제나 불확실한 안갯속에 가려져 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다양한 상황을 빌려 그때 우리가 들었어야 했던 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말을 건넨다. 지나온 과거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말로 위로한다.

“시대가 꿈을 빼앗았다고 한 달 전에 들었는데 이번엔 시대가 나에게 기회를 줬대.”

외환 위기로 펜싱을 그만 둔 국가대표 덕분에 희도는 국가대표 자리에 도전할 기회를 얻게 된다. 희도는 전학 간 학교의 코치로부터 “시대가 너를 돕는다”는 말을 듣는다. 포기하지 않는다고, 꿈을 잃지 않는다고 저절로 위기가 기회로 역전되는 순간이 오진 않는다. 드라마는 역전의 순간은 나에게서 온다는 점을 시사한다. “시합에서 항상 졌기 때문에 좌절하지 않기 위해 비극을 희극으로 바꿔 생각한다”는 희도의 자세를 통해, 드라마는 지금 청년 세대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완전히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펜싱 경기를 시작하기 전 심판이 선수들을 향해 세 마디를 외친다. 앙 가르드(기본 자세), 프레(준비), 알레(시작)! 심판의 시합선언은 청춘들에게 “자,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준비해, 시작”하라는 전언처럼 들린다.

아픔을 보듬고 위로하며 살아가기

▲ <스물다섯 스물하나> 포스터. 시절은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 시절이 특별한 이유는 그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청춘을 대변하는 ‘그 여름’이 소중했던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 tvN

청춘과 여름에는 공통점이 있다. 청춘과 여름의 풍경 모두 진한 초록으로 생생하게 물들어 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포스터에 “청춘의 한 가운데, 그 여름은 우리의 것이었다”를 적은 건 우연이 아니다. 10화에서 한 번도 수학여행을 가보지 못한 희도와 유림에게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해 이진과 고등학교 친구 지승완(이주명), 문지웅(최현욱)은 바다로 떠난다.

바다에서 처음 친구들과 물놀이를 하고 사진을 찍은 뒤 모두들 평상 위에 앉아 수박을 먹는다. 수박씨를 위로 뱉어 얼굴에 붙이며 웃다가도 느닷없이 자신의 상처를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희도는 초등학생 때 돌아가신 아빠 이야기를, 유림은 보증을 잘못 서서 집이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를, 지웅은 부모님이 이혼 후 엄마가 자신을 힘들게 데려왔다는 이야기를, 승완은 인생이 재미없다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즐거운 시간도, 슬픈 시간도, 위로하는 시간도 함께하는 게 친구 사이다.

▲ 희도와 유림에게 수학여행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해 바다로 함께 떠난 친구들. 이 순간이 영원할 것 같다고 희도가 말한다. 그러나 영원한 순간은 없기에 지금이 더욱 소중하다고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말한다. ⓒ tvN

분홍빛으로 물든 해질녘 다섯 사람은 파도가 잔잔하게 치는 바닷가를 바라보며 옹기종기 앉아 있다. 여름은 그들이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위로하는 한 시절이었다. 너무 푸르러서 아득한 시절이었다. 희도가 “이 여름은 공짜야. 여름을 사자. 우리가 주인이 되는 거야. 그럼 여름은 우리 거잖아. 나 왜 이 순간이 영원할 거 같지”라고 말하며 울컥하자, 이진은 나지막이 “영원할 건가 보다”라고 응답했다. 희도는 그 말에 “영원하자”고 읊조린다.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던 그 여름의 추억은 희도의 딸 김민채(최명빈)가 다시 희도에게 물었을 때 변한다. 현재 시점으로 바뀌고, 수학여행 한 번 못 갔다는 민채의 투정에 희도도 운동하느라 제대로 된 여행을 가본 적 없다고 말한다. 민채는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랑 바다를 갔지 않았냐고 그 여름의 추억을 꺼낸다. 희도는 자신이 친구들과 바다를 갔다왔냐고 되물으며 기억하지 못한다. 민채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수학여행 추억을 잊어버린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막 엄청 영원할 것처럼 사진 다 찍어놓고?”라고 묻는다. 희도는 대답한다.

“영원한 게 어디 있냐. 모든 건 잠시뿐이고 전부 흘러가는 거야. 그렇다고 해서 그게 나쁜 것만은 아니란다.”

영원할 것 같은 기억도 사실 잠시일 뿐. 모든 것은 흘러가고, 그것이 꼭 나쁜 게 아니라는 진실. 그 여름이 특별했던 건, 지나간 청춘이 특별한 건 모두 잠시이기 때문이다. 한순간이기 때문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기에 모두의 기억 속에 영원히 자리한다. 순간이기에 영원한 모순이 우리를 아로 새긴다. 지금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아련한 청춘의 말로 우리에게 희망을 속삭이는 중이다. 속삭임은 나지막하지만 뜨겁고 치열해 우리는 이 험난한 팬데믹 세상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편집: 이강원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