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나를 보여주는 여성들

지난해 설 연휴, 트로트와 관찰 예능으로 즐비하던 예능 프로그램들 사이에 색다른 파일럿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골때리는 그녀들>(골때녀)은 ‘2021 SBS 사장배 여자 축구 대회’ 트로피를 걸고 대회를 열었다. 파일럿 프로그램 당시에는 설 특집으로 방송돼 감독 섭외가 대회 3주 전에 진행됐고 훈련 기간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골때녀>는 참가한 여성 선수들에게 축구의 매력을 알게 해주었다. 많은 사랑을 받은 <골때녀>는 여름 정규 편성이 됐다. 정규 편성된 <골때녀>는 단판 승부로 우승 팀을 정하는 컵대회가 아닌 축구 리그를 표방하였고 지난해 6월부터 10월까지 방송되었다. 현재 <골때녀>는 두 번째 시즌이 방송 중이다.

여성의 획일화된 미적 기준을 없앤 <운동뚱>

<골때녀>의 등장 이전에도 여성의 운동을 소재로 한 콘텐츠는 있었다. 기존 콘텐츠가 보여준, 여성이 운동하는 목적은 주로 다이어트라는 틀에 갇혀 있었다. 이 틀을 깨고 방송가에 여성 운동 콘텐츠 붐의 시작을 알린 것은 2020년 2월에 시작한 <맛있는 녀석들>의 스핀 오프 프로그램 <시켜서 한다! 오늘부터 운동뚱>(운동뚱)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제대로 된 운동을 해본 적이 없던 코미디언 김민경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운동뚱>을 통해 운동에 도전하였다. <운동뚱>은 이전까지 먹는 모습을 많이 보여준 <맛있는 녀석들> 출연진이 더 오래 건강하게 먹자는 취지로 기획되었다. 식단을 관리하며 적게 먹었다는 김민경의 말에, 헬스 트레이너는 오히려 “우리는 굶는 다이어트가 아니다”며 화를 내기도 했다.

▲ 개그우먼 김민경이 운동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운동에 대해 자신감을 얻었다. ⓒ JDB엔터테인먼트

김민경은 평생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운동뚱>을 통해 재능을 발견한다. 트레이너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하기 시작했다. 값을 입력하면 그대로 출력하는 로봇 같았다. 처음 접하는 운동이지만 그는 모든 동작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흐트러지는 자세를 보여주지 않았다. 김민경은 10주 만에 체스트프레스 80킬로그램(kg), 레그 익스텐션 196kg, 레그프레스 340kg 등의 운동을 해냈다. 시청자는 타고난 재능을 두고 김민경에게 ‘근수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헬스 뒤 김민경은 “날씬한 사람만 필라테스를 하냐”며 필라테스를 시작했고, 이어 골프, 축구, 야구, 수영 등에 도전했다. 여러 종목에 도전할 때마다 운동을 알려주는 트레이너는 입을 모아 “정말 잘한다”며 “쉽지 않은데 쉽게 해낸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새로운 종목을 도전할 때마다 해내는 김민경의 모습을 보고 “나도 덩치가 크다 보니까 운동하는 자체가 부끄럽다는 생각이 많았는데 언니 덕분에 용기가 많이 생겼어요”와 같은 댓글이 많이 달릴 정도였다.

노는 법을 즐기는 엘리트 스포츠 선수들 <노는 언니>

▲ <노는 언니>는 여성 스포츠 스타들이 운동을 하며 갖고 있던 고민과 애환을 전하며 여성 프로그램의 한 전형을 이뤘다. ⓒ E채널

<운동뚱>이 여성 스포츠 예능의 획일화된 미적 기준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면, 지난해 8월에 시작한 <노는 언니>는 전현직 여성 운동 선수들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엘리트 체육은 소수의 재능 있는 유망주를 어린 시절부터 집중 육성해 올림픽과 같은 세계대회에서 입상하거나 프로 스포츠로 진출하는 데 목적을 둔 체육 정책을 말한다. <노는 언니>에 등장하는 선수들은 모두 엘리트 스포츠 속에서 노력하며 살아온 여성 스포츠 스타다. 지금까지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은 강호동, 서장훈 등 주로 전직 남성 운동 선수의 모습을 담았다. 여성 선수들을 한 곳에 모은 <노는 언니>는 우선 신선했다. 그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여성 엘리트 스포츠 선수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어린 나이부터 엘리트 스포츠에 뛰어들어 남들 다 가는 수학여행을 못 간 선수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임신과 출산 이후에는 선수 경력이 끝나는 여성 스포츠 선수의 경력 단절 이야기까지. 여성 선수는 <노는 언니>를 통해서 여태까지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못한 애환을 솔직하게 털어놓아 공감을 얻었다.

운동 종목은 다양했다. 전설의 여성 골퍼 박세리, 계영 400m 한국 신기록 보유자 정유인, 여자 배구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한유미 등을 포함해 게스트로 많은 선수가 출연했다. <노는 언니>에 참여한 여성 스포츠 스타들은 처음 해보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다양한 스포츠 경기를 체험한다. 축구 선수가 게스트로 나올 때는 축구를 하고, 핸드볼 선수가 나올 때는 핸드볼 경기를 했다. <노는 언니>의 스포츠 스타들은 처음 접해보는 종목, 처음 해보는 놀이를 할 때면 엉망진창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소쿠리를 갖고 하는 ‘소쿠리 배구’에서 서브를 넣지 못하는 배구 선수, 물놀이는 해본 적이 없는 수영 선수들은 사실 자신의 운동을 할 때는 누구보다 멋있는 모습을 보여준 여성 스포츠 스타들이었다. 이들이 경쟁과 기록에서 벗어나, 즐겁게 노는 모습은 대중에게 대스타들을 우리 주변에 친구로 다가오게 만들었다.

한 단계 발전한 여성 스포츠 예능

<골때녀>는 최근 5주 연속으로 수요일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시즌 1의 성공에 이어 시즌 2까지 지속적인 사랑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진정성’이다. 기존 예능 프로그램에서 갖고 있던 웃음에 관한 집착은 <골때녀>에서 찾아볼 수 없다. 선수들은 축구 시합을 이기기 위해 일주일 내내 훈련하고 경기에 임한다. 연습하며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개인 SNS나 인터뷰를 통해 보여준다. 출연자들은 촬영이 없더라도 개인 훈련과 팀 훈련으로 일주일을 꼬박 다 보낸다. 훈련으로 발톱에 멍이 들고 심지어 발톱이 빠지기도 한다.

훈련과 시합에서 생기는 작은 부상은 그들에게는 명예의 훈장과 같았다. 룰에 미숙하고 처음 해보는 축구 경기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실수는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축구를 하나씩 알아가고 배워가는, 그러면서도 훈련을 통해 기술을 익히고 팀워크를 통해 마침내 첫 승을 얻어내는, 발전해 나가는 여성의 모습은 감동적이다 못해 인간승리의 면모까지 보여준다. 몸을 아끼지 않는 선수들의 투혼과 열정, 눈물과 땀은 매 경기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었다. 프로 선수들의 경기에서도 볼 수 없는 <골때녀>만의 매력이다.

▲ <골때리는 그녀들>은 축구에 처음 도전하는 여성들을 통해 좌절과 극복, 성장의 모습을 보여주며 여성 스포츠 예능과 여성 프로그램의 차원을 한 단계 높였다. ⓒ SBS

<골때녀>는 여성 스포츠 예능을 넘어 여성 프로그램의 차원을 한 단계 높였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던 여성들의 승부욕을 보여주었다. 승부욕에 불타는 팀을 보고 팬덤의 열광도 더욱 거세졌다. 시청자들은 최선을 다하며 진정성을 보여주는 여성 선수들을 보며 각자 응원하는 구단을 정한다. 마치 유럽 축구를 새벽에 챙겨보는 것과 같이 매주 수요일 밤이면 TV 앞에 모인다. 시합을 보며 응원하는 팀을 응원하고, 상대 팀 전력을 분석한다. <골때녀>를 대하는 시청자의 열정은 결코 프로 선수들의 경기에 뒤지지 않는다.

올해 설 연휴에도 여성이 스포츠에 도전하는 새 프로그램이 방송됐다.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때 전국민이 “영미”를 외치게 만든 종목, 컬링을 다룬 <컬링퀸즈>다.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서 한국 대표팀 선전을 기원하며 만든 특집 프로그램이었다. <컬링퀸즈>는 영앤치카, 스골파, 아나더레벨, 국수저, 맘마미아 등 다섯 팀이 참여했다. 컬링에 처음 도전하는 여성 스타들의 모습을 통해 좌절과 극복 그리고 성장이라는 서사를 보여주었다.

댄스 크루 ‘라치카’와 신가영 코치가 함께한 ‘영앤치카’ 팀은 골프 선수로 구성된 ‘스골파’ 팀과 진행한 예선 경기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패자부활전을 이겨내고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영앤치카’는 결승전에서 첫 경기에서 경기한 ‘스골파’ 팀을 다시 만났다. 마지막 엔드 때 ‘영앤치카’ 팀은 3점차로 지고 있었다. 이길 확률이 희박했지만 끝까지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결국 ‘영앤치카’는 큰 점수차이를 뒤집고 역전을 하지 못해 패배했다. 그러나 하루에 연속으로 네 경기를 진행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참가자들은 <컬링퀸즈>를 통해 처음으로 컬링에 도전했지만 열정만큼은 프로 선수 못지않았다. ⓒ MBC

<골때녀>와 <컬링퀸즈>는 모두 패배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도전을 통해 극복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골때녀> 시즌 1 때 최하위를 기록하며 최약체라 불린 FC구척장신은 시즌 2에 와서 최강 팀이라 불리며 우승 후보에 손꼽히고 있다. 잘해야만 한다고 생각해 진입장벽을 느끼던 사람들에게 <골때녀> 선수들의 도전과 성장은 ‘나 역시 축구를 해보고 싶다’라 도전 의식마저 일으키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먼 여성 서사 프로그램 

여성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의 붐은 지속될 예정이다. 오는 15일에는 JTBC에서 운동을 멀리했던 언니들의 농구 도전기를 그린 <언니들이 뛴다-마녀체력 농구부>가 방송될 예정이다. 재작년 <운동뚱>에서 시작된 여성 스포츠가 일으킨 물보라가 이제는 파도가 돼 사람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제는 신체를 획일화된 미적 기준에 맞추는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을 TV 채널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여성 스포츠 예능은 기존 스포츠 예능과 달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 각양각색의 이유로 운동을 멀리했던 운동꽝 언니들의 생활체육 도전기를 그린 <언니들이 뛴다-마녀체력 농구부>가 2022년에도 여성 스포츠 예능의 인기를 이어나갈 전망이다. ⓒ JTBC

기존 <천하무적 야구단>과 <뭉쳐야 찬다>와 같이 남성 연예인으로 구성된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은 TV 속 운동을 좋아하던 그들만의 이야기였다. <차승원의 헬스클럽>과 <개그콘서트-헬스보이> 같이 몸매를 가꾸며 변해가는 모습에 중점을 두어 운동의 재미를 알려주지는 못했다. <운동뚱>과 <골때녀>는 운동의 재미를 보여준다. 재미를 넘어 여성만의, 여성의 당당한 서사를 그려낸다. 하지만 이제 첫 걸음일 뿐이다. 진정한 여성 프로그램의 등장까진 아직 소재와 형식, 스토리텔링에서 갈 길이 멀다. 스포츠를 넘어 더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 프로그램들이 나타나 여성이 세상의 주체로 우뚝 서는 밑바탕이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 유제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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