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이 던지는 희망의 불꽃

1977년 9월 9일에 일어난 ‘9·9 투쟁’을 아는 이는 드물다. 청계천 봉제 공장에서 일어난 노동 투쟁의 역사는, 1970년 11월 13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평화시장 앞에서 불꽃이 되어 사라진 전태일 열사의 죽음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다큐멘터리 <미싱타는 여자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진 제2의 전태일의 역사인 여성 봉제 노동자 이숙희, 신순애, 임미경의 싸움을 그렸다. ‘9·9 투쟁’은 전태일 열사의 죽음 이후 세워진 청계피복노조가 만든 노동교실을 찾기 위한 투쟁이다.

▲ 빵과 우유를 준다는 말에 혹해 전태일 1주기 행사장에 갔다가 시다로 불리던 여성노동자는 ‘근로기준법’을 알게 된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이들의 노동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기다. ⓒ 진진

전태일과 청계피복노조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1970년 11월 27일 청계피복노조가 설립되었지만 청계천 봉제 노동자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노동 환경은 여전히 열악했다.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는 싸움은 계속되었다. 노동 운동 중심에는 수많은 여성 노동자가 있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성인도 있었지만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중학교에 가야 하는 나이에 돈을 벌기 위해 공장에 들어온 어린 소녀도 많았다. 어린 여공들은 이름이 아닌 시다라 불리며, 하루에 열 몇 시간 노동을 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몇 날 며칠 동안 계속되었고 철야작업은 다반사였다. 설날과 추석과 같이 일거리가 많은 날에는 일을 갈 때 짐을 한 보따리 싸갔다. 보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하루에 두 세 시간도 못 자며 일을 해야 했다. 졸음이 쏟아질 때는 잠을 깨우기 위해 노동자에게 각성제를 먹여가며 일을 시켰다. 과도한 노동에 시달린 노동자들은 이러다 잠에 드는 것이 아니라 죽는 건가 싶었다.

▲ 열악한 노동환경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몸을 던진 전태일의 분신은 희망을 찾을 수 없던 평화시장에서 희망의 불꽃이 되었다.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포스터

청계피복노조는 노동자들에게 노동교실을 연다. 노동교실은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고된 노동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게 해주는 피난처였다. 자신의 이름 대신 시다라 불렸던 어린 여성노동자는 노동교실에 가서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써보았다. 은행에서 한자를 사용하던 시절, 노동 교실에서는 일(一)부터 조(兆)까지 한자로 숫자 쓰는 법을 배웠다. 다음에는 숙제로 통장을 만들고 입출금을 해보는 과제를 내주었다. 인간이 아닌 하급 노동자 시다로 살며 매일 재봉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바느질을 하던 여공에게 이름을 불러주고 기본적인 경제활동을 알려주며 노동과 노동자의 의미와 가치를 깨우쳐 준 것이다.

노동교실은 중등과정의 학업 외에 노동운동 방법을 깨우치는 역할도 하였다. 근로기준법은 있었지만, 당시 노동환경은 노동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고 사장이 자신의 뜻대로 그날의 노동시간을 정했다. 잔업으로 늦게 작업이 끝나면 여성노동자들은 노동교실에 갈 수 없었다. 그때 노동자들에게는 8시간 근무가 아니라 저녁 8시 퇴근이 중요했다. 노동교실에 가서 수업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노동조합과 노동자의 끈질긴 요구와 싸움으로 이들은 마침내 저녁 8시 퇴근을 성취한다. 그날 모든 노동자들도 함께 8시 퇴근을 누릴 수 있었다. 노동운동이 이루어낸 쾌거였다. 청계피복노조는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였다. 노동자들에게 퇴근 후 찾아가는 노동교실은 선후배를 만날 수 있는 학교였고, 자신의 억울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광장이었다. 퇴직금을 못 받거나 임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모두 평화시장을 찾아왔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이 없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내가 제2의 전태일이다’ 외친 사람들

박정희 정부의 군사독재 시절, 노동운동은 금지된 단어였다. 1977년 7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재판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성동구치소에 수감됐다. 이 여사가 수감된 이후 경찰은 빨갱이들을 양성하는 의식화 장소라며 노동교실을 폐쇄시켰다. 노동자들은 노동교실에 짐을 찾으러 갈 때도 경찰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함께 모이는 장소를 없애는 일은 노동자들의 힘을 와해시키기 위해서였다. 노동자들은 노동교실을 되찾기 위해 유인물을 뿌리기도 했으나 긍정적인 결과는 없었다. 이 여사가 수감된 이후로 노동자들은 점점 무기력해져갔다. 재야에서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었던 사람들도 이 여사가 수감된 뒤로 찾아오는 발길이 줄어들었다. 경찰은 1977년 9월 10일을 노동교실 퇴거일로 정했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노동교실을 지키기 위해 9월 9일 점거 농성을 계획했다. 무기력해져가는 노동조합의 상황을 보며, 당시 교육선전부장이었던 이숙희 씨는 점거 농성 계획이 탐탁지 않았다. 노동조합이 공식으로 결정한 투쟁이 아닌, 조합의 간부들을 지키겠다는 이유로 조합원들끼리만 세운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안 오면 어떡할거냐’라며 반대했지만, 결국 그는 노동 교실의 문만 열어주기로 했다. ‘너희가 1시 정각까지 안 온다면 나는 너희가 안 오는 것으로 알고 문을 닫고 나갈거다’라는 다짐을 받았다.

9월 9일 거사일, 그는 건물 앞에 지키고 있던 경찰 몰래 교실로 올라가 문을 열었다. 약속한 1시가 되었으나 함께 싸울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어린 나이의 시다 임미경과 그의 친구들만 도착했다. 문만 따주고 나가려던 이숙희는 차마 14살 조합원 임미경만 두고 나올 수는 없었다. 이숙희는 그 자리에 남았다. 운명이었고 필연이었다. 노동자들이 도착했고 이들은 노동교실을 점거했다. 경찰이 건물과 골목을 워쌌다.

싸움이 시작됐다. 노동자들을 진압하려는 경찰과 저항하는 노동자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남성 노동자들은 자신의 몸과 경찰에 석유를 뿌리고 칼로 자신의 몸을 그어가며 협박을 했다. 심지어는 바깥으로 투신을 하기도 했다. 대치하는 상황이 됐다. 남성 노동자는 10여 명이었고, 대다수가 어린 여성 노동자였다. 그 중에는 열두 살, 열세 살의 나이에도 참여한 시다도 있었다. 밀고 올라오는 경찰들을 막기 위한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옆 건물의 옥상을 통해 넘어오는 경찰과 밑에서 올라오는 경찰들을 막아야 했다. 투쟁을 하는 사람들은 다쳐서 피가 나기 일쑤였다. 전순옥과 임미경은 그 광경을 보면서 “어머니(이소선 여사)를 안 데려오면 여기서 떨어져서 죽겠다”며 외쳤다. 지금 여기서 누가 죽으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을 사랑하던 사람들은 주로 어린 여공들이었다. 그들에게 노동교실은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한줄기 희망이었다. ⓒ <미싱타는 여자들> 갈무리

노동조합 지부장은 “경찰도 곧 이소선 열사를 석방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경찰도 “지금 나오면 처벌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점거농성을 끝내고 나왔으나 점거농성에 참여했던 집행부와 노동자들이 구속되었다. 그날 노동자 53명이 연행되었다. 경찰은 잡혀온 이들에게 “누가 시켜서 왔느냐”며 “9월 9일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고 다그쳤다. 9월 9일은 바로 북한의 정권 수립일 9·9절이었던 것이다. 경찰은 “북한에서 김일성에게 아버지라 하는데 너희는 이소선에게 어머니라 부르지 않냐”고 다그쳤다.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을 누군가의 사주로 몰아갔다. 당시 임미경의 나이는 열네 살이었다. 임미경은 누구의 사주를 받았냐는 질문에 “내가 (스스로) 왔다”고 답했다. “왜 왔냐”는 질문에는 “타당하지 않아서 왔다”고 답했다. 결국 이숙희, 신순애, 임미경은 징역을 살게 되었다. 임미경은 어린 나이라 감옥에 갈 수 없었다. 당시 경찰은 임미경의 주민등록번호를 조작해 투옥시켰다.

잊혀진 9·9 투쟁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그날 “제2의 전태일은 여자가 되겠다” 외쳤던 임미경은 “그 시절 나에게 근로기준법은 희망이었다”고 말한다. 노동교실은 평화시장에 있던 노동자들의 삶의 일부였다. 근로기준법이 존재하지만 지켜지지 않는 열악한 노동 현실은 노동자들에게 좌절과 고통이었다. 유일하게 갈 수 있는 곳이었던 노동교실은 작은 희망의 불씨였고, 그 노동교실을 지키는 싸움은 평생의 노동운동으로 이어졌다. 투쟁 당시에 “제2의 전태일이 되겠다” 말하며 투신을 하려 했던 임미경은 이숙희와 동료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그날 정말 뛰어내렸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투쟁을 지속하기 위해 사람들은 노동교실에 불을 붙였다. 이숙희는 “우리가 잡혀가도 노동조합은 계속 되어야 하니 불을 태우면 안 된다”며 불을 끄라고 말했다. 밖에 있는 경찰들이 소방호스를 이용해 물을 뿌리니 신순애를 포함한 노동자들은 물을 맞아 뒤로 나가떨어졌다.

▲ 가난해서 혹은 여자라서 공부가 아닌 미싱을 선택한 어린 여공들은 청계천 봉제공장에서 노동자로 대우받지 못하고 기계 부품처럼 움직이고 살아가야 했다. 임미경 씨가 청계천에서 일하던 당시에 쓴 일기를 읽고 있다. ⓒ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컷

9·9 투쟁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역사였다. 험난한 한국 현대사 속에 기록된 수많은 노동운동 중에 하나일 뿐인지도 모른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이들의 싸움이 수많은 싸움의 하나이지만, 또 전부임을 보여준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청계피복노조를 만들고, 청계피복노조가 만든 노동교실은 당시 시다와 미싱사들에게 전태일이 뿌린 불꽃을 심고, 키워주었다. 그 불꽃을 이어받은 노동자들의 9·9 투쟁은 오늘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노동운동의 불꽃을 만들어낸 사람만이 아니라 그 불꽃을 이어받아 싸워 온 제2의 전태일과 그를 이은 수많은 전태일을 기억해야 한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전태일의 불꽃을 이어받은 이 세상의 수많은 전태일에 바쳐진 헌시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편집: 김병준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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