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 추천 좋은 기사] 2020년 국제앰네스티 언론상 수상작 - 교제 살인

5.4, 48, 19, 6.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숫자들은 ‘교제 살인’이라는 단어에 꿰여 연결된다.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서로 사귀다가 상대를 죽인 사건을 <오마이뉴스> 독립편집팀 ‘이음’은 ‘교제 살인’이라 명명했다.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젠더 폭력의 전모를 ‘데이트 폭력’이라는 단어로는 온전히 포착하지 못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들은 ‘데이트’라는 서정적 단어를 지우고 이 죽음의 사회적 의미를 밝히고자 했다. 

연인을 죽도록 때린 이들은 살인 고의가 없다는 이유로 평균 5.4년의 형량을 선고받았다. 위협을 느낀 피해자들이 112에 신고해 조처를 요청한 뒤 48시간 안에 48명의 여성이 경찰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숨졌다. 피해자를 상대로 한 폭행이나 주거 침입 등 ‘살인의 전조’를 보여 형사 입건됐다가 풀려나 결국 피해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은 19건이었다.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경찰이나 법정에서 밝히고도 바로 그 가해자에게 목숨을 잃은 여성이 6명이었다. 이러한 교제 살인의 실상을 2020년 11월부터 두 달 동안 19차례 연속 보도한 <오마이뉴스> 독립편집팀의 이주연, 이정환 기자는 제23회 국제앰네스티 언론상 본상과 제10회 인권보도상 본상을 수상했다.

판결문에서 찾은 진실의 실마리

2019년 김수민 당시 바른미래당 의원이 경찰청 공식 통계를 인용해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 동안 교제 살인으로 사망한 여성은 51명이었다. 1년에 17명 꼴이다. 반면 ‘한국여성의전화’의 통계는 달랐다. 이 단체가 언론에 보도된 살인 사건을 분석한 결과, 친밀한 관계였던 남성에게 목숨을 잃은 여성이 2017년 한 해 최소 85명으로 나타났다. ‘친밀한 관계’에는 친구나 연인뿐만 아니라 부부가 포함됐지만, 이를 감안해도 17과 85의 간극은 너무 컸다. <오마이뉴스> 기자들은 이러한 숫자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투영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죽음의 진실을 알기 위해 자료를 구하러 다녔지만, 경찰에서도 국회의원실에서도 마땅한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남은 방법은 판결문을 직접 분석하는 것이었다. 기자들은 법원 ‘판결서 인터넷 열람’ 시스템에서 ‘교제·사망’ ‘연인·살해’ ‘데이트·폭력’ 등 온갖 키워드를 조합해 검색했다. 취재를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사귀다가 상대를 죽인 사건’의 판결문 140여 개를 찾아냈다. 다음으로는 ‘썸’만 탔거나 헤어진 지 10년이 넘은 경우 등을 제외하며 ‘데이트 폭력 살인 사건’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의 기준을 세우고 추려냈다. 110건이었다. 독립편집팀은 그중에서도 ‘남성이 여성을 죽인 사건’에 집중하기로 했다. 데이트 폭력 살인 사건 판결문 110건 가운데 여성이 남성을 죽인 경우는 단 2건뿐이었기 때문이다.

독립편집팀은 이렇게 입수한 판결문 108건을 주요 정보만 가리고 모두 공개했다. 1362쪽에 달하는 판결문에는 일상적이고 일방적으로 끔찍한 폭력에 희생당한 이들의 고통이 배어 있다. 무자비한 폭행으로 교제 중이던 피해자를 살해한 가해자의 변명과 이를 바라보는 판사의 판단도 담겨 있다. 죽은 피해자는 말이 없다. 기자들은 기사의 서두에서 “가해자의 목소리만 가득한 판결문에서 ‘음소거’ 돼 있는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달라”라고 했다.

판결문을 피해자의 시선으로 재연

독립편집팀은 피해자들이 느낀 공포와 두려움을 독자들도 느낄 수 있도록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재구성했다. 일인칭 시점은 소설 같은 작법으로 몰입을 돕지만, 자칫 선정적으로 흐르기 쉽다. 선정주의를 지양하기 위해 기자들은 추측과 상상을 배제하고 판결문에 나오는 내용만 담으려고 절제했다. 수사학을 걷어낸 법적 사실을 모아 피해자의 시선으로 쌓아 올렸다. 재구성한 문자 아래 판결문의 언어를 그대로 실어 대조할 수 있게 했다.

▲ 교제 살인 인트로 기사에서 재구성한 부산지방법원 서부지원 2018고합ㅇㅇㅇ 사건의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 ⓒ 오마이뉴스 기사 갈무리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가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한 줄 한 줄 뜬다. 기사가 진행될수록 독자는 피해자가 맞아 죽고, 찔려 죽고, 목 졸려 죽은 그 날에 서 있게 된다. 그리고 사는 집, 다니는 직장, 일상의 공간, 가족과 친구 관계, 연락처까지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 달아날 곳이 없다는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교제 살인 재판은 공정했을까

독립편집팀은 교제 살인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원인의 한 축에 ‘젠더 사법’이 있다고 지적했다. 성인지 감수성에 따라 양형 차이가 나는데, 대체로 사법부의 판결이 젠더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재범 가능성이 없다며 가해자에 대한 전자발찌 부착명령을 기각한 비율이 교제 살인의 경우 78%에 이르는데, 이는 형사 사건 전체에서 전자발찌 부착 명령을 기각한 평균을 훨씬 웃도는 수치다. 교제 살인 사건 중에는 전자발찌 부착 명령이 기각된 가해자가 결국 피해자를 21차례 찔러 사망케 한 경우도 있었다. 

108건 가운데 감옥 수형 기간을 수량화할 수 없는 무기징역 8건과 집행유예 2건을 제외한 98건의 평균 형량은 14.9년이었다. 98건 가운데 18건은 폭행 및 상해 치사의 죄를 물었다. ‘살인’과 달리 ‘치사’는 살인의 고의가 없고, 사망을 발생시킬 가능성 또는 위험에 대한 인식도 없는 상태에서 피해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경우를 말한다. 상해치사죄에 대한 권고 형량 범위는 3~5년이다. 실제로 한국의 법원은 사람을 죽도록 폭행했지만, 그 과정에서 고의나 미필적 고의가 없다고 판단한 18명에게 평균 5.4년의 형량을 부여했다.

▲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 동안 여성 108명이 교제 살인으로 목숨을 잃었다. 살해 방법은 흉기가 가장 많았다. ⓒ 오마이뉴스 기사 갈무리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손바닥으로 뺨을 수차례 때리고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해 방바닥에 쓰러지게 하고, 발로 배를 여러 차례 걷어차 여자가 의식을 잃었음에도 10시간 동안 방치해 숨지게 한 사건에도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얼굴 전체에 멍이 들고 내장이 찢어지고 뇌출혈이 발생했지만, 그 과정에서 고의나 미필적 고의가 없었다고 검찰과 법원은 판단했다. 심지어 상시적 폭행을 가한 정황이 감경 사유가 되기도 했다. 피고인들은 “오랫동안 때려왔지만 죽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죽을 줄 몰랐다”라고 주장했는데, 이를 받아들여 ‘살인’이 아닌 ‘상해치사’로 판단한 것이다. 

교제 살인 사건의 ‘젠더 사법’ 문제는 최근에도 발생했다. 지난해 7월 한 오피스텔에서 남성이 교제 중이던 여성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1층에서 8층까지 질질 끌고 가는 CCTV 영상이 공개돼 사회에 충격을 준 적 있다. 폭행은 시차를 두고 네 차례 이어졌고, 피해자는 병원 이송 후 23일 만에 사망했다. 유가족들은 딸의 얼굴과 이름까지 공개하면서 가해자에 대한 엄벌을 촉구했지만, 징역 7년의 선고에 그쳤다. 재판부는 ‘감정 충돌 중에 우발적으로 폭행하면서 상해치사 범행에 이르게 된 것으로, 의도적으로 살해할 의도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양형의 이유를 설명했다. 

▲ 지난해 서울 마포구에서 남자친구에게 맞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끝내 숨진 고 황예진 씨와 가해자의 모습. 피해자의 부모는 제대로 된 처벌을 촉구하며 폭행 당시 영상이 담긴 CCTV를 공개했다. ⓒ SBS 보도화면 갈무리

교제 살인의 실상을 취재한 이주연 기자는 언론 전문 월간지 <신문과 방송> 2020년 12월호 인터뷰에서 취재 보도의 역량을 집중할 영역으로 젠더 사법 문제를 제시했다. 

“저희는 사법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여성이 아직 굉장히 약자의 위치에 있다고 봐요. 여성이든 남성이든 재판에 임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젠더 감수성이 떨어지는 판사들이 많은 조건에서는 사법부와 판결 내에서 여전히 여성은 약자고 여전히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저희는 판단을 하거든요. 비단 교제 살인뿐 아니라 젠더 사법에 대한 감시, 이쪽으로 방향을 잡고 가려고 하고 있어요.”

단 한 명의 여성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우리나라에는 ‘젠더 폭력’에 대한 국가 차원의 종합 통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죽음을 제대로 짚어낼 공식적인 숫자조차 없는 것이다. 여자 친구를 때려서 죽였는데도 집행유예로 풀어주는 법원은 물론, 교제 살인에 경찰이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국회에도 책임이 있다. 독립편집팀 기자들은 이를 두고 ‘직무유기’라고 표현했다. 

이들은 ‘가정 폭력’의 범주에 동거 관계나 교제 관계도 포함시킨 미국 미네소타주 가정폭력 법규를 예로 들며 법 적용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2020년 12월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만나 기사의 취지를 설명하고, 경찰과 지자체가 여성폭력 방지와 피해자 보호를 함께 책임질 수 있도록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권 의원은 이듬해 1월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안’을 발의했다. 

대선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고 모든 후보가 국민과 새로운 미래를 말하지만, ‘여성가족부 존폐’ 이슈에 묻혀 젠더 폭력은 좀처럼 중요한 의제로 오르지 못하고 있다. 참고로 미국 오마바 정부는 2014년부터 여성에 대한 일체의 폭력을 없애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그 대표 슬로건은 ‘하나도 너무 많다’(1 is 2 Many)였다. 

아래는 한국여성의전화가 만들어 ‘교제 살인’ 기사 12회에 소개된 ‘데이트 폭력 체크리스트’다. 상대가 이와 같은 행동 중 하나라도 행한다면 위험 신호일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위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면 한국여성의전화(02-3156-5400)나 여성긴급전화(1366)로 연락해 상담받을 수 있다. 지금 한국에선 적어도 열흘에 한 명의 여성이 사귀던 남자에게 죽임당하고 있다. 

□ 큰 소리로 호통을 친다.
□ 하루 종일 많은 양의 전화와 문자를 한다.
□ 통화내역이나 문자 등 휴대전화를 체크한다.
□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 등을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하게 한다.
□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싫어한다.
□ 날마다 만나자고 하거나 기다리지 말라는 데도 기다린다.
□ 만날 때마다 스킨십이나 성관계를 요구한다.
□ 내 과거를 끈질기게 캐묻는다.
□ 헤어지면 죽어버리겠다고 한다.
□ 둘이 있을 때는 폭력적이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태도가 달라진다.
□ 싸우다가 외진 길에 나를 버려두고 간 적이 있다.
□ 문을 발로 차거나 물건을 던진다.

<오마이뉴스> 독립편집팀이 연재한 ‘교제 살인’ 기사 전문은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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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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