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프랭크 카프라 감독 영화 ‘멋진 인생’

많은 이가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기독교에서 성탄 전 4주간을 ‘대림(待臨)시기’라고 부른다. 예수의 재림(臨)을 기다린다(待)는 뜻이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건 기독교인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11월 말이면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넘쳐난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전구를 달고 붉은색과 초록색을 한 상품을 매대에 올린다. 각자 성탄을 기다리는 이유는 다르지만,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꿈꾼다는 점은 같다.

크리스마스 고전 영화 <멋진 인생>은 기다림을 그린다. 1946년 이탈리아 시실리 출신 미국 영화감독 프랭크 카프라가 만들었다. 그는 영화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천금을 마다한 사나이> 등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세 번 수상한 거장이었고, 인간의 순수한 본성을 영화에 담아내는 이상주의자였다.

프랭크 카프라는 <멋진 인생>에서도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담았다. 영화의 주인공 조지 베일리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면서 가족과 이웃을 돕는 인물이다. 그는 매번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가족과 ‘베드포드 폴즈’ 마을 주민을 돕는다. 아버지의 가업을 잇기 위해 세계 일주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동생의 대학 진학과 결혼을 응원한다. 본인은 버려진 주택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지만 마을 주민들이 집을 가질 수 있도록 사업을 이어간다. 조지는 어릴 적부터 전 세계를 탐험하겠다는 꿈을 꾸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듯, 꿈을 이룰 그 날을 기다리면서 그는 매번 자신의 꿈을 후순위로 미룬다.

▲ 1946년 프랭크 카프라 감독이 연출한 <멋진 인생> 포스터. 조지 베일리를 연기한 제임스 스튜어트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 주연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 영화 <멋진 인생> 포스터

‘당신 먼저’라는 태도

조지는 아버지 피터가 경영하던 주택 협동조합을 물려받는다. 대출을 통해 마을 사람에게 집을 지어주는 조합이다. 돈이 되는 사업은 아니다. 알뜰살뜰 모은 조합원들의 출자금으로 주택을 짓기 때문에 “파이프 하나에 3센트 아끼겠다고 악착 떠는” 궁상맞은 일이다. 조지는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고 싶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잠시 아버지의 사업을 도왔던 그는 세계 일주를 계획한다. 여행을 다녀온 뒤에는 대학에 가겠다는 목표도 있었다. 건축을 공부해서 비행장도 짓고 100층짜리 건물도 짓겠다는 꿈을 꾼다.

조지의 계획은 번번이 암초를 만난다. 동생 해리의 졸업식 날,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진다. 조지는 세계 일주를 포기하고 석 달 동안 협동조합에서 일을 돕는다. 아버지가 떠난 협동조합이 자리를 잡을 즈음 조지는 대학 진학을 위해 마을을 떠날 준비를 한다.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조지가 마을을 떠나기로 한 날, 그는 협동조합을 이끌 후계자로 뽑힌다. 전체 위원회가 협동조합을 없애려고 하는 자본가 헨리 포터 대신해 조지를 회장으로 뽑은 것이다. 포터를 회장직에 앉힐 수 없었던 조지는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

▲ 주인공 조지 베일리는 세계 일주를 꿈꾼다. 그는 상점 주인에게 손으로 표현한 만큼 커다란 가방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영화에서 그의 세계 일주라는 꿈은 이뤄지지 않는다. ⓒ 영화 <멋진 인생> 갈무리

조지는 신혼여행도 포기한다. 같은 마을에 사는 메리 해치와 결혼한 그는 신혼여행을 떠나는 길에 마을 주민들이 은행으로 몰려가는 광경을 본다. 그가 결혼한 해에 대공황이 발생했다. 뱅크런이 발생했고, 조지가 없는 사이 그와 함께 협동조합을 운영하는 삼촌 빌리는 대출금을 갚으라는 은행 연락에 조합이 가진 모든 돈을 은행에 가져다준다. 은행은 결국 문을 닫고, 마을 주민들은 출자금을 찾아가겠다며 협동조합으로 몰려든다.

악독한 자본가 포터는 위기를 틈타 조지에게 솔깃한 제안을 한다. 주식을 가져오면 액면가의 반을 주겠다는 제안이다. 유동성이 없는 협동조합, 출자금을 돌려달라는 조합원들의 요구라는 위기에서 조지는 자신이 가진 2000달러를 쓴다. 신혼여행을 가고 가정을 꾸리기 위한 돈이었다. 조지는 자신의 돈으로 조합이 포터에게 넘어가는 것은 막는다. 힘든 신혼생활이 시작된다. 조지와 메리는 마을에 방치된 폐가에 가정을 꾸린다.

▲ 비가 새는 폐가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조지는 마을 주민들이 자가를 얻을 수 있도록 사업에 힘쓴다. 조지와 메리가 신혼여행을 포기하고 폐가에 자리 잡는 장면은 주민 마티니가 집을 얻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사진 와인을 들고 있는 이가 마티니다. ⓒ 영화 <멋진 인생> 갈무리

조지가 자신의 몫을 포기하고 헌신한 결과 마을 주민은 차례대로 집을 가진다. 조지와 메리가 폐가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는 장면은 마을 주민 마티니가 새 집을 얻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마티니는 호쾌하게 웃으며 “더 이상 포터 씨 셋집에서 돼지처럼 안 살아도 돼”라고 말한다. 조합원들의 집은 마을에 있는 ‘베일리 파크’에 모여 있다. 15년 전에 주택이 6채 밖에 없던 베일리 파크에는 수십 채의 집이 들어섰다. 조지가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협동조합을 이끈 결과다. 조지는 언제 이뤄질지 모를 꿈을 기다리면서, ‘당신 먼저’라는 태도로 가족과 이웃을 위해 살아간다.

동화 같은 천사 이야기

조지는 최대의 시련을 만난다. 삼촌 빌리가 은행에서 협동조합이 소유한 8000달러를 잃어버린다. 마침 협동조합에는 금융 감독관이 찾아온다. 8000달러를 찾지 못하면 협동조합은 파산한다. 장부와 협동조합이 실제 가진 돈이 맞지 않아서 조지가 감옥에 갈 수도 있다. 나쁜 일은 날짜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조지에게 악재가 닥친 날은 크리스마스이브다. 축 처진 채 집으로 돌아온 조지는 괜히 가족들에게 화를 낸다.

조지는 미워하던 자본가 포터에게 찾아가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한다. 포터는 자신을 ‘뒤틀린 구두쇠 영감쟁이’라고 불렀던 조지를 도와주지 않는다. 모욕을 듣고 쫓겨난 조지는 강가 위 철교로 향한다. 그가 가진 건 1만 5000달러짜리 생명 보험 증서뿐. 조지가 강가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순간, 누군가 강가로 몸을 던진다. “사람 살려”라는 소리에 조지는 그를 구하기 위해 강으로 뛰어든다. 조지가 구한 건 천국에서 온 조지의 수호천사 클로렌스다. 그는 날개가 없는 2급 천사로 조지를 잘 도우면 날개를 얻을 수 있다.

▲ 영화 초반 우주에서 천사들이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는 천사들이 조지의 일생을 알아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관객은 천사와 함께 조지의 과거를 들여다보며 조지라는 인물을 알아간다. 천사를 우주의 별로 표현한 것이 흥미롭다. ⓒ 영화 <멋진 인생> 갈무리

동화 같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클로렌스는 “나만 없었더라면 다들 훨씬 더 잘 살았겠죠”라고 말하는 조지에게, 그가 태어나지 않은 세상을 체험하게 한다. 그가 태어나지 않은 베드포드 폴즈는 자본가 포터가 모든 것을 소유한 ‘포터스빌’이 되어 있다. 마을 주민들은 자가를 마련하지 못하고 포터의 셋집에 산다. 조지가 태어나지 않은 세상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건 주민들의 표정이다. 다들 삶에 찌든 표정을 한 채 그들이 알지 못하는 조지를 무시하거나 조롱한다. 영화는 비참한 포터스빌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조지를 그리며 절정으로 치닫는다.

크리스마스 영화답게 행복한 결말로 이어진다. 자신이 없는 세상을 체험한 조지는 철교로 돌아와 클로렌스에게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애원한다. 클로렌스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 조지는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집으로 돌아간다. 아내 메리는 조지가 집을 나간 사이 마을 주민들에게 조지가 처한 상황을 이야기했다. 조지가 도와줬던 마을 주민들이 그의 집으로 몰려와 십시일반으로 8000달러가 넘는 자금을 내놓는다. 조지의 집에 영화에 등장한 거의 모든 사람이 모인다. 동생 해리의 표현대로 조지는 누구보다 많은 친구를 가진 ‘우리 마을 최고의 부자’였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은 조지와 그의 가족, 이웃들이 함께 캐럴을 부르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멋진 인생>은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다. 동화처럼 선악 구도가 명확하다. 천사가 등장해서 선한 주인공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고, 마지막에 교훈을 준다. 영화는 ‘친구가 있는 한 실패한 인생이 아니네’라는 천사 클로렌스의 메시지로 영화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돈보다 사람을 좇았던 조지의 ‘멋진 인생’은 금세 모인 8000달러뿐 아니라 그의 집에 모인 수많은 인파로 증명된다. 묵직한 메시지가 울림을 준다. 크리스마스이브, 매번 도움을 주는 조지는 기다림 끝에 자신의 차례를 맞이한다. 아내와 딸을 안은 채 해맑게 웃는 조지, 그 뒤로 들리는 그의 친구들의 캐럴 합창이 어우러져 크리스마스 영화를 완성한다.

▲ 크리스마스이브, 조지의 집에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모인다. 베드포드 폴즈 마을 최고의 크리스마스 파티가 이뤄지며 영화는 결말을 맞는다. 사진은 조지가 아내와 딸을 안고 있는 모습(위)과 조지의 동생 해리가 캐럴을 부르는 모습(아래). ⓒ 영화 <멋진 인생> 갈무리

영화는 많은 이에게 사랑을 받았다. 영화 개봉 이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받았고, 아카데미상 작품상, 감독상 등 여러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프랭크 카프라 감독이 영화를 세상에 내놓은 지 80여 년이 지났지만 인기는 여전하다. <멋진 인생>은 크리스마스 영화의 고전으로 평가받으며 미국, 영국 등지에서 가장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영화로 여러 차례 뽑혔다. 2018년 영국 <가디언>은 이 영화를 두고 1946년에 나온 고전이 여전히 반향을 불러일으킨다(still resonates)고 평했다.

많은 이가 <멋진 인생>을 사랑하는 이유가 뭘까. 조지 베일리라는 인물의 매력일 수도, 동화 같은 이야기가 전하는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시선일 수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우리 마음도 ‘특별할 것 없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크리스마스는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빨간 날, 매년 오는 휴일일 뿐이다. 하지만 많은 이가 성탄을 기다린다. 사람들은 기다리는 희망의 힘으로, 매년 크리스마스 때 ‘해피 홀리데이’를 외치며 힘을 얻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지난한 기다림을 이겨내게 하는 위로

크리스마스를 통해 많은 이가 힘을 얻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코로나와 함께하는 두 번째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두고 있다. 조지가 자신이 꿈을 이룰 언젠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오늘 우리 모두는 마스크를 벗어 던질 그 날을 기다린다. 지난한 기다림이다. 조지가 자신의 꿈을 이룰 언젠가를 기다릴 수 있었던 건 가족과 이웃 덕분이었다. 대공황이 발생한 위기에서 조지가 협동조합을 살릴 수 있었던 건 아내 메리의 도움이 컸다. 그들의 2000달러를 활용하는 아이디어는 메리가 가방에서 돈을 꺼내며 “얼마가 필요하죠?”라는 한 마디로 순식간에 현실이 됐다. 마을 주민들도 조지를 믿고 따랐다. 혹여나 주민 가운데 누군가가 조합의 돈으로 지은 주택을 포터에게 팔아버렸다면, 조합과 마을을 포터로부터 지키려는 조지의 노력은 헛수고가 됐을 것이다.

감염병을 이겨내기 위해 방역지침에 따르는 건 <멋진 인생>의 인물들이 하는 행동과 닮았다. 오늘날 우리는 방역지침에 따라 다 같이 마스크를 쓰고 집에 머무른다.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내 주위 가족과 이웃을 위한 일이기에 기꺼이 불편을 참는다. 서로에 관한, 또한 기다림이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대공황이 발생하고 협동조합 사무실로 몰려온 주민들에게 조지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대공황으로 인해) 불안하지만 자긴(자본가 포터는) 아니거든요. 우릴 이용하고 있어요. 서로 뭉치면 잘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서로서로 믿어야 해요.”

조지와 그의 이웃들이 믿고 기다린 결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어 돌아왔다. 선물은 지난한 기다림에 따른 보상이자, 또다시 찾아올 기다림을 이겨내게 하는 힘이다. 이런 선물은 어디에나 있다. 크리스마스 같은 소소한 이벤트, 조지 베일리 같은 선한 인물, <멋진 인생> 같은 따뜻한 영화가 기다림에 지친 우리를 위로한다. 코로나19로 답답하고, 대통령 선거로 시끄럽고, 먹고 사는 문제로 힘든 현실이다. 크리스마스 하루쯤은 어린이처럼 동화를 즐기면 어떨까. 그런 쉼표가 지난한 기다림과 싸우는 우리에게 작은 선물이 될 것이다.


편집: 김계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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