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기자학교] ‘함께 더 크는 가치’ 비경쟁 독서토론

지난달 24일 오후 충북 제천제일고등학교 도서실에서는 ‘제천일반고 연합 비경쟁 독서토론’을 앞두고 학생들이 분주하게 토론을 준비했다. 이날 진행을 맡은 제일고 학생들은 미리 만든 PPT와 대본을 살펴보고 연습을 하는 등 역할을 나눠 토론을 준비했다.

정우진(제일고 2학년) 진행자는 “오늘은 참가자가 아니라 진행자로서 비경쟁 독서토론을 처음 하던 때 초심으로 돌아가 학생들이 토론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도우려고 한다”고 다짐했다.

▲ 진행을 맡은 정우진 학생(오른쪽)이 토론 전에 취재진에게 소감을 말하고 있다. ⓒ 서지민

‘학생들이 책 선정부터 진행까지’ 맡는 비경쟁 독서토론

▲ 토론 시간 중 학생들이 다시 한번 책을 살펴보면서 인상 깊었던 장면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 서지민

비경쟁 독서토론은 참여자들이 함께 고른 책을 읽고 각자 토론에 필요한 질문을 생각해낸 뒤 비슷한 질문거리가 있는 이들끼리 모둠을 만들어 진행한다. 모둠은 다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은 질문을 선정해 그 질문으로 자유롭게 토론한다.

학생들이 모이자 7시부터 토론이 진행됐다. 토론에는 제천 7개 고등학교 가운데 특성화고를 빼고 일반고인 세명고, 제천고, 제천여고, 제천제일고 2학년 학생 28명과 교사 4명이 참석했다. 앞서 토론 준비에 여념이 없던 제일고 학생들은 토론이 시작되자 능수능란하게 진행했다.

본격적인 토론에 들어가기 전, 음악 전주 듣고 곡명 맞추기, 책 내용 관련 퀴즈 등을 진행하면서 볼펜 같은 학용품을 상품으로 제공하고 학생들의 참여를 끌어냈다. 어색함을 푸는 시간을 가진 뒤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학생들은 각자 읽어온 책을 펼쳐 인상 깊었던 부분이나 다시 보고 싶은 내용을 살펴보면서 20분쯤 토론에 집중했다.

학생들이 토론한 책은 박덕규의 소설집 <함께 있어도 외로운 당신들>이었다. 이 책은 탈북자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집으로, 중단편소설 8편으로 구성돼 있다. 8편 모두 각기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탈북자들이 남한에 와서 각자 다른 모습으로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공통으로 나타난다. 탈북자들의 삶을 통해 탈북자를 이해하고, 나아가 한국 사회가 직면한 현실을 생각하게 한다.

이날 토론에서는 8편의 소설 가운데 라디오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개인이 가진 다양한 사연과 노래 등이 나오는 단편소설 ‘끝이 없는 길’을 바탕으로 진행됐다.

우리가 알던 토론이 아닌 ‘비경쟁 독서토론’

비경쟁 독서토론은 형식도 우리가 흔히 아는 토론과 다르다. 토론 참가자가 한 주제를 두고 찬반으로 나누어 입론, 교차조사, 반론 등의 과정을 거치며 진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질문을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토론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 토론에서 다룰 책 선정과 진행 모두 학생들이 스스로 한다.

먼저, 토론 참가자가 자유롭게 모둠을 구성해 앉아 책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 궁금했던 점 등을 자유롭게 말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 과정에서 모둠별로 책에 관한 질문을 하나씩 만든다. 그 뒤, 질문에 관한 생각을 나눈 뒤 각 모둠이 만든 질문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모둠에 가서 앉는다.

첫 번째 질문이 만들어진 이유에 관해 설명을 듣고, 질문에 관한 서로의 생각과 느낀 점을 다시 나눈다. 앞선 과정과 마찬가지로 새롭게 모둠을 이룬 토론자들과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과 의견, 궁금했던 점 등을 이야기하며 두 번째 질문을 만든다. 첫 번째 질문과 관련된 질문을 만들거나 아예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도 좋다.

두 번째 질문 만들기를 마친 뒤에 다시 한번 새롭게 구성한 모둠이 만든 질문을 보고, 다시 자리를 이동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모둠에 가서 앉는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 질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질문 또는 명제로 마무리 짓는다.

자리를 이동해가며 세 차례에 걸친 질문 만들기가 끝나면 처음 구성한 모둠으로 돌아간다. 이 과정에서 모둠지기들은 지금까지 나온 질문들을 토대로 지금까지 나눴던 이야기를 모둠 구성원에게 소개한다. 끝으로, 모둠지기들은 참여자 모두에게 각자 모둠에서 나눈 토론 내용에 관해 발표한다. 

▲ 토론에 참가한 학생들이 모둠을 이뤄 토론하면서 질문을 만들고 있다. ⓒ 서지민

이날 토론은 5~6명씩 다섯 모둠을 꾸려 진행됐다. ‘왜 제목이 끝이 없는 길일까?‘ ‘라디오와 노래가 이야기의 중심이 된 이유는?’ ‘명애가 나이에 맞지 않게 옛것을 많이 아는 이유는?’ 이처럼 소설의 제목, 줄거리 등에 관한 질문부터 ‘시간이 더 지났을 때 남북한을 한민족이라고 볼 수 있을까?’ ‘통일은 필요한가?’ 같은 질문까지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다. 

학생들은 토론 과정에서 질문을 계속 던지고 함께 논의하면서 비판적 사고를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승패를 떠나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말하고 질문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통해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다.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과 소통능력, 협동정신 등도 기를 수 있다. 

한 달에 한 번 진행하는 제천일반고 연합 비경쟁독서토론은 이날도 치열하게 진행돼 오후 7시에 시작한 토론은 9시 30분이 다 돼서야 끝났다. 학생들이 지금까지 읽고 토론한 책은 이날 토론에서 다룬 책인 <함께 있어도 외로운 당신들> 말고도 최은영의 단편 소설집 <쇼코의 미소>, 천선란의 장편소설 <천개의 파랑>, 소설가 김초엽과 변호사 김원영이 쓴 사회과학서 <사이보그가 되다> 등이다. 

▲ 토론에 참가한 학생들이 질문을 작성한 종이 가운데 하나. 모둠별로 이런 식으로 질문을 계속 만들고 내용을 공유한다. ⓒ 서지민

경쟁 아닌 비경쟁으로 찾는 토론의 의미 

제천지역 학생들이 이런 토론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2017년, 충북 제천 세명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이동진 교사는 충청북도 교육청에서 개최한 ‘충청북도 청소년 비경쟁독서토론 한마당’에 우연히 참여하게 됐다. 이 교사는 당시 기억을 회상하며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토론임에도 위축되지 않고 자유롭게 책 이야기를 하는 모습에 매료되어 비경쟁 독서토론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충청북도 청소년 비경쟁 독서토론 한마당은 매년 청주에서 진행돼 먼 거리에 있는 제천 학생들은 참가가 쉽지 않았다. 또 이 교사는 일 년에 한 번씩 이벤트식으로 진행하는 것에 큰 아쉬움을 느꼈다. 그는 제천 지역 학생들이 비경쟁 독서토론을 꾸준히 경험할 수 있도록 제천지역에서 근무하는 여러 학교 국어교사들에게 비경쟁 독서토론 활동을 제안했다. 이 교사의 제안에 다른 교사들도 흔쾌히 동의했고, 2019년 4월부터 제천 일반고 연합 비경쟁독서토론이 시작됐다. 

“저는 비경쟁 독서토론이 내가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멋진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전한 공간에서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고, 서로가 협력하고 도왔을 때 더 좋은 결과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험이 자기 안에 있는 ‘좋은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게 합니다.” 

학생들은 비경쟁독서 토론을 통해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고 다른 의견에 귀 기울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비판 의식이 싹트고,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주며 한 뼘 더 성장한다. 이 교사는 “비경쟁 독서토론은 친구의 새로운 모습이나 미처 몰랐던 자신에 관해서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며 비경쟁 독서토론을 적극 추천했다.   

▲ 이동진 교사는 올해 9월, 비경쟁 독서토론에 관한 교육서인 <나누면서 배우는 비경쟁 독서토론>에 공동저자로 참여해 책을 펴내기도 했다. ⓒ 서지민

그는 “어떤 교육활동도 궁극적으로 수업과 교실에서 실현돼야 가치가 있다”며 제천 일반고 연합으로 진행한 비경쟁 독서토론을 학교 독서수업 자체 프로그램으로도 활용했다. 이 프로그램에는 세명고 교육동아리 ‘에듀에듀’ 학생 등이 자원하거나 학교에서 선발된 일부 학생들이 참여했을 뿐 아니라 수업시간에 비경쟁 독서토론을 활용하면서 더 많은 학생이 새로운 토론 활동을 경험할 수 있게 됐다.

이 교사는 50분이라는 짧은 수업 시간에 많은 학생이 만족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토론 활동을 하기 위해 많은 연구를 했다. 그는 이런 노력으로 수업에서 진행한 토론에서도 학생들 대부분 만족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교사와 학생 모두 만족하는 토론

이 교사가 제천지역 고등학교 교사들에게 처음 제안한 ‘비경쟁 독서토론’은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지난달 24일, 토론이 끝난 뒤 임미진 제천고 교사는 “독서 토론에 여러 방향이 있지만, 책을 깊이 해석하는 것보다 책 내용을 넘어서 다양한 자신들의 삶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며 비경쟁 독서토론을 추천했다.

▲ 지난달 24일, 학생들의 토론을 지켜본 임미진 교사(오른쪽)가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 서지민

배수현(제천여고 2학년) 학생은 “책을 읽으며 이해가 안 된 부분에 관해 의견을 나누고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평소라면 대충 읽고 넘어갔을 부분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사고력을 높일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같은 문장을 읽고 저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면 다른 친구들은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한 문장에서도 친구들마다 다른 느낌을 받고, 다른 생각을 가지는 게 인상깊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학생들은 비경쟁 독서토론을 통해 책 읽기의 즐거움을 느끼고, 배우고 익히는 것을 넘어 자기 생각을 친구와 공유하고 삶을 나누고 있었다.

* 서지민 신다빈 이지안 기자는 세명고 2학년 학생입니다.

* 취재·첨삭지도: 김계범(단비뉴스 편집국장), 이봉수(단비뉴스 초대 발행인)


사단법인 <단비뉴스>는 고교학점제 도입에 맞춰 제천교육지원청과 함께 이번 2학기에 4기째 '미디어 콘텐츠 일반' 공동교육과정을 운영해왔습니다. 매주 화요일 저녁 7시부터 3시간씩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진행된 이 과정은 미디어는 물론 팬데믹, 다문화사회, 위험사회 등 학생들 자신이 처한 사회환경을 이해하는 주제 강연과 글쓰기 강연을 9차례 하고, 미디어 제작 체험을 2차례 해봄으로써 진로모색에도 도움을 주도록 설계됐습니다. 이제 그 결과물을 <단비뉴스>에 연재하니 그들의 눈에 비친 지역사회와 학교의 모습을 기사와 영상으로 확인하세요. (편집자)

  편집: 최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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