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특강] ‘휴먼다큐의 장인’ 이모현 문화방송 PD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은 신문, 방송, 뉴미디어 등에서 탁월한 활동을 보이는 현직 언론인을 초청해 ‘저널리즘 특강’을 열고 있다. 초청 강사들은 정보통신기술(ICT)의 발전과 함께 급변하는 미디어 지형과 언론의 대응, 언론인의 고민 등에 관해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수강생들의 질문에 답한다. <단비뉴스>는 강연과 문답 내용을 기사와 영상으로 독자들에게 배달한다. (편집자 주)

‘휴먼다큐 사랑’은 2006년부터 만 12년 동안 방영돼 큰 반향을 일으킨 문화방송(MBC)의 대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다. 이모현(54) PD는 이 프로그램에서 약 8년간 ‘진실이 엄마’ ‘안현수, 두 개의 조국 하나의 사랑’ 등 화제작을 연출했고 국내외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현장에서 뛰는 다큐 PD 중에서 MBC 내 ‘최고참’인 그는 현재 가상현실(VR) 다큐 ‘너를 만났다 시즌3’을 제작 중이기도 하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의 2021학년도 <저널리즘특강> 첫 강사로 지난 10일 충북 제천시 세명대 학술관 201호 강당에 선 그는 ‘디지털 미디어 전환기 지상파 다큐 생존전략’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OTT와 VOD의 시대, 위축되는 지상파 다큐

▲ 이모현 MBC PD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저널리즘특강>에서 지상파 방송이 직면한 위기와 다큐 PD의 도전 등에 관해 강의하고 있다. ⓒ 이주연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곳 어디에서든 콘텐츠를 볼 수 있는 환경이 콘텐츠의 내용, 형식, 유통구조, 수익구조 등 시장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이 PD는 인터넷과 디지털 환경으로 모든 디지털 장비와 플랫폼이 변화했다며, 콘텐츠 소비의 대세가 이미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와 VOD(주문형 비디오)가 됐음을 환기했다. 몇 개 채널이 독보적 위상을 누렸던 지상파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고, 수많은 채널이 무한경쟁하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IPTV(인터넷 텔레비전 서비스) 등으로 접할 수 있는 유료채널과 넷플릭스, 왓챠 플레이 등의 OTT가 지상파 시청자를 뺏어가고 있는데, 오는 11월에는 강력한 OTT인 디즈니 플러스까지 국내 서비스를 시작한다. 지상파는 가구 시청 점유율이 떨어지면서 광고 수익도 줄어, 한국방송(KBS), MBC, 에스비에스(SBS) 3사 모두 적자를 내거나 간신히 적자를 면하는 수준을 오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예능·드라마에 비해 시청률이 낮은 다큐 프로그램들은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고 이 PD는 말했다. 광고가 잘 안 붙는 것은 물론이고, 프로그램 수출이나 VOD판매도 저조해 방송국 수익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예능 프로그램의 수출단가가 100이라고 할 때 다큐 단가는 6~7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큐는 시청률 외에 소셜미디어 등에서 화제성 지수도 떨어지는데, 이 PD가 2020년 3월 첫째 주부터 1년 동안 화제성 상위 10개 프로그램을 분석한 결과 예능이 496편이었고, 시사교양은 14편, 시사교양 중 다큐는 MBC <휴먼다큐 사랑> 1편뿐이었다. 해당 다큐는 ‘미스터 트롯’에서 주목받은 김호중 씨가 주인공이었다. 이 PD는 “다큐멘터리가 화제가 되더라도 장르의 힘이 아니라 출연자의 힘과 팬덤의 힘이었던 것”이라고 씁쓸해했다. 

공들여 만든 작품, 열성 홍보에도 시청률 낮아 상심

▲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대학원생들이 이모현 PD의 강의를 집중해서 듣고 있다. ⓒ 이주연

지상파가 고가의 장비와 전문인력, 채널을 독과점했던 시절에는 만들기만 하면 일정 수준의 시청률이 보장됐지만, 지금은 작품을 알리기 위해 제작진이 온갖 노력을 해도 외면당하기 일쑤라고 한다. 이 PD는 <아마존의 눈물>(2009년, 최고시청률 22.5%)과 <남극의 눈물>(2011년, 최고시청률 14.3%)을 연출한 김진만 PD가 2019년 발표한 <곰>을 예로 들었다. 이 작품은 인기몰이 중인 연기자 정해인 씨를 내레이터(화자)로 쓰고 MBC 예능 <나 혼자 산다>에서 정 씨를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미리 화제를 만들었다. 하지만 <나 혼자 산다> 해당편 시청률이 14.1%를 기록한 반면 <곰> 시청률은 3.6%에 그쳤다.

▲ 오랜 시간과 많은 비용을 투자해 만든 2019년 M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곰>은 적극적 홍보에도 불구하고 낮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 MBC

“연예인들이 ‘관찰 예능’이라는 이름으로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더 이상 휴먼다큐를 보지 않는 것 같아요. 연예인들이 온갖 예능 프로그램에서 사실상 휴먼다큐를 찍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이름도 모르는 일반인들의 휴먼다큐를 찾지 않게 된 거죠.”

이 PD는 또 개인이 스마트폰으로 영상 촬영과 편집, 송출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진입장벽이 허물어지면서 ‘다큐멘터리의 양적 르네상스’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브이로그 등 1인 콘텐츠가 대부분 미니 다큐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 PD는 “과거 다큐 PD들은 제 3자의 시선에서 취재 대상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찍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 지금은 개인들이 자신과 친구, 가족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담기 때문에 ‘리얼리티(현실성)’ 면에서 기존 다큐를 뛰어넘는다”고 말했다. 

‘프로덕션’으로서 지상파 역량은 살아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지상파 다큐가 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이 PD는 “지상파가 플랫폼(유통채널)으로서 기능은 좀 상실했어도 프로덕션(제작사)으로서 역량은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며 “그걸 살려서 정말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차별화된 프리미엄 콘텐츠, 차별화된 좋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채널이 많아졌기 때문에 수용자가 분산돼 보이는 거지, 지적·교양적·공익적 콘텐츠에 대한 욕구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덧붙였다. 

이 PD는 잘 만든 콘텐츠의 예로 지난해 2월 방송된 MBC <VR 휴먼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를 꼽았다. 다큐멘터리와 VR 기술의 접목을 통해 일찍 세상을 떠난 어린 딸을 디지털 휴먼으로 만들어내 엄마와 만나도록 한 이 작품은 유튜브 조회 약 2863만 회(2021년 9월 13일 기준)의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VR 휴먼다큐멘터리 시즌2 <용균이를 만났다> 편에서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사고로 숨진 김용균 씨의 작업환경을 VR로 구현해내, 현장의 열악한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MBC의 <VR 휴먼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는 VR 기술을 통해 다큐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3천만 회 가까운 유튜브 조회수를 기록했다. ⓒ MBC

이 PD는 프리미엄 콘텐츠와 함께 ‘좁은 내수시장’을 벗어날 수 있는 유통전략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제작비가 회수되어야 다음 콘텐츠를 만들 동력이 생기기 때문에 인류 공통의 가치와 메시지를 담은 다큐를 세계 시장에 적극 수출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특히 예능은 즐거움과 재미에 관한 코드가 문화권마다 달라서 수출에 장벽이 있지만, 다큐는 ‘문화적 할인’이 낮기 때문에 유리하다고 그는 설명했다.

“한 문화권의 문화상품이 다른 문화권으로 진입할 때 언어·관습·종교 등의 문화적 차이, 즉 장벽이 존재하는데 다큐는 이 장벽이 비교적 낮은 편이기 때문에 세계 시장에 진출하기가 쉬운 편이에요. 보편성이 있거든요. 시대를 초월해서 또 지역을 초월해서.”

우리 다큐를 OTT에 실어 세계로 보내자 

이 PD는 그래서 고품질 작품을 만들어 OTT에 유통시키는 것이 ‘지상파 다큐의 생존전략’이라고 정리했다. 다큐는 기록물의 성격이 짙기 때문에 OTT에 저장해두면 소비자가 보고 싶을 때 쉽게 꺼내볼 수 있다. 넷플릭스 등 세계적 회사들도 플랫폼의 질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다큐를 적극 확보하려 한다. 이 PD는 “영화나 드라마 제작비에 비해 다큐멘터리 제작비가 저렴한 것도 매력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방탄소년단(BTS)의 인기와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상 수상 등으로 한국의 콘텐츠 제작 역량이 높게 평가되고 있는 것도 한국 다큐의 OTT 진출에 유리한 여건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사실 OTT와 한국 다큐의 공생은 2019년 제이티비씨(JTBC)와 히스토리채널이 협력한 <양식의 양식>으로 이미 시작됐다. 전 세계 음식문화 속에서 한식의 자리를 찾아 모험을 펼치는 내용의 이 작품은 60개국으로 수출됐다. MBC도 디스커버리 채널과 함께 어촌·농촌의 빈집을 ‘내 집 마련’이 절실한 이들에게 이어주는 <다큐플렉스 빈집살래>를 통해 콘텐츠 제작 협력을 이뤄냈다. MBC는 60분짜리 3부작으로 방영했고, 디스커버리는 45분짜리 6부작으로 아시아 40개국에 송출했다. 이 PD는 지상파 방송사들이 더 적극적으로 넷플릭스 등 OTT와 다큐 제작 협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이모현 PD는 고품질의 프리미엄 콘텐츠를 만들어 OTT를 통해 세계로 수출하는 것이 지상파 다큐의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이주연

이어진 질의답변 시간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생 강주영(28) 씨는 “다큐멘터리의 미래를 이끌어 갈 인재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이 PD는 “(당장) 뭘 만들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며 “콘텐츠에 대해서 진심이고 열정이 있는 사람, 정말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편집 : 신현우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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