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능력주의’

▲ 강주영 기자

공부하려고 유튜브하는 연예인. 유튜브 채널 <공부왕찐천재>에는 모델로 유명한 홍진경이 등장한다. ‘고졸’인 그녀가 목말라 하는 것은 엄마가 될 때까지 배우지 못한 ‘가방끈 콤플렉스’다. 이 유튜브는 적나라하게 지식 결핍을 적시하며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그녀의 부실한 언어구사와 지적 열등감을 애처롭게 담아내 지식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계도하는 게 프로그램의 목표다. 중요한 것은 영상에 등장하는 홍진경이 ‘명문대’ 나온 프로듀서에게 매번 응수하지 못하고 스스로 열등함을 드러내는 모습이다. 나는 공부를 못했으니 그런 취급을 받아도 좋다는 심리가 바탕에 깔려 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18살에 이미 머리뿌리가 희끗해진 언니들이 있었다. 급식시간에도 책을 눈에서 떼지 않는 그녀들을 힐끔거리며 ‘최고’가 되기 위해 좋은 역할모델로 삼았다. 전학년 1∙2등을 다투는 언니들이었으니까. 이들은 ‘명문대’를 준비하는 특별반에 있었다. 그들을 ‘아이돌’ 삼아 누가 먼저 코피를 흘리나 경주하듯 공부했다.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47X54센치짜리 직사각형 책상에 앉아 모두 닭처럼 시험 문제를 쪼아먹었다. ’이 구역에 미친년은 나야’를 외치는 총성 없는 혈투였다. 피가 터지도록 공부해도 ‘1등’은 단 1명. 경쟁 속에는 늘 승자와 패자가 존재했다.

능력주의는 사람의 가치를 함부로 재단한다. 경쟁 속에서 우리들은 승리자를 질투하면서도 더 노력하지 못한 자신을 타박하며 모범으로 삼는다. 뒤처진 친구들은 열등한 존재로 여기며 안도하는 수단이 된다. 좋은 대학에 가는 일은 곧 내 존재가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이었다. 대학에 가지 못하는 이는 곧 낙오자나 실패자로 여겼다. 명문대 입시에 불합격했다는 사실 하나로 인간의 가치와 쓸모를 가늠하는 사회가 정상일까?

능력주의 개념은 영국의 정치가이자 사회학자인 마이클 영이 영국 사회를 풍자하기 위해 만들었다. 왕과 귀족이 존재하는 계급사회에서 어떤 피와 가문을 가졌든 노력만 하면 대접받을 수 있다는 능력주의는 어쩌면 착한 개념처럼 보인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1∙2∙3류로 구분 지어 계급을 생성하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었다. 문호를 개방하며 일본 역시 영국의 교육체계를 받아들였다. 천황에 충성하는 우수 학생을 길러내던 일제 때 우리나라도 1∙2∙3류로 나눠 학교간 서열이 생겼다. 아직도 일제 잔재로 남아있는 학벌주의 문화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 지난 4월 국회 앞에선 청년 단체 회원들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청년들이 겪는 문제는 경제적 불평등이라며 개개인의 능력을 탓하는 사회는 사회적 소수자를 배제할뿐이라고 말했다. ⓒ KBS

능력주의는 결과적 불평등의 타당성을 조장했다. 역사학자 박노자는 최근 4.7 재보궐선거에서 보수야당을 지지한 2030세대를 신자유주의 희생자들이라고 비판했다. 결과적 불공정에 의문을 품지 않고 경쟁은 당연한 것이며 절차만 공정하다면 승자와 패자가 나타나는 것은 순순히 받아들이는 기득권 우파 청년들이라는 것이다.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가 만든 승자 독식의 논리가 정당성을 획득해 하층 노동자의 불평등을 굳힌다는 문제를 지적했다. 승자와 패자로 나뉠 때 둘 사이에 더는 동등한 인격이 존재할 수 없다.

얼마 전 오스카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73살 배우 윤여정은 ‘최중’을 말했다. ‘최고’ 말고 그냥 다 같이 잘 살면 안 되느냐 되물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잠시 생각해봐야 한다. 왜 우리는 오스카에 열광하는지. 왜 지역 영화제에 불과한 칸느영화제에 열광하는지. 승자를 쫓기 위해 또는 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서열화한 세계의 경쟁에서 평가받길 자처하는 모습은 아닌지.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박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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