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공정과 연대’

▲ 김해솔 기자

얼마 전 고려대 세종캠퍼스 학생이 서울캠퍼스 총학생회 임원으로 내정됐다가 서울캠 학생들의 강한 반발로 취소된 적이 있었다. 내가 졸업한 대학도 서울과 지방에 캠퍼스가 있고 비슷한 분위기였다. 학교 인터넷 커뮤니티에 지방캠퍼스 학생을 비난하는 글이 수시로 올라왔다. 지방캠 학생이 서울캠에 와 강의를 듣는 것조차 참을 수 없는 듯했다. 출석부에서 학번을 보고 지방캠 학생을 ‘색출’한 결과 지난 학기보다 많아졌다며 학교 ‘수준’을 걱정했다.

고백한다면 나 자신도 좀 심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학벌은 짧게는 고등학교 3년, 길게는 초중고 12년 동안 노력한 만큼 주어지는 것이라고 여겼다. 차등 대우는 타당할 뿐 아니라 자기 학벌이 아쉬우면 다시 입시절차를 거치거나 다른 스펙을 쌓으면 되는 일로 생각했다. 지방 사립대에 다녀 학벌 콤플렉스가 심하던 친구에게 그렇게 말했더니 “그럴 시간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핑계라고 생각했다. 그 친구가 학기중에도 아르바이트를 서너 개씩 한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용돈을 벌기 위해 고깃집에 나갔다고 했다.

▲ 고려대 세종캠퍼스 전경. ⓒ 고려대학교

<정의론>과 <공정으로서 정의>를 쓴 존 롤스는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공정이라고 봤다. 요점은 공정이 약자를 향한 시혜가 아니라 개개인이 이익을 좇는 과정에서 실현된다는 것이다. ‘자선’이 아니라 ‘연대’라는 얘기다. 자선이 다른 사람의 불우함을 향한 안타까움에서 비롯하는 행동이면 연대는 개인에게 버거운 위험을 공동체가 나눠 안는 것이다. 내가 암에 걸릴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정부는 암 환자에게 돈을 얼마나 써야 할지 계산하고 대처할 수 있다. 위험 앞에 개인은 무력하다. 하지만 공동체는 위험을 관리할 수 있다. 롤스는 사회의 불확실성이 크면 개개인이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사회안전망을 만드는 데 힘을 모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기술 발전이 노동의 가치와 지형을 빠르게 바꾸고 양극화도 심해진다. 자연스럽게 ‘공정’이 화두가 된 지도 꽤 됐다. 롤스가 맞다면 사회 안전망 구축이 시대정신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능력주의’가 공정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능력주의는 능력 있는 사람이 기회를 더 가져야 한다고 본다. 능력은 노력한 만큼 주어지는 것이라는 논리다. 스펙이 안 좋으면 노력을 덜한 것이니 불이익이 있어도 감수해야 한다. 각자 책임이니 안전망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데 정말 각자의 책임일까? 2017년 <국민일보> 기사에 따르면 서울 상위권 대학 재학생 70% 이상이 부유층이다. 롤스는 능력주의를 공정의 실현책으로 제시하는 이들은 ‘20 대 80’이라는 장벽을 넘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두 번째 고백은 내가 능력주의의 빈틈을 직시하기 시작한 것도 어쩌면 ‘20’에 끼지 못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라는 점이다. 세상에 나보다 학벌이 좋은 사람은 넘쳤다. 서울에서 취업 스터디에 들어갔는데 넷 중 셋이 이른바 ‘스카이’였다. 명문대생들도 콤플렉스는 있었다. 나이가 많아서, 여성이어서 등등. 능력주의의 승자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공정을 위한 연대는 보험 같은 것이다. 보험은 위험에 처하지 않은 사람도, 위험에 처할 확률이 낮은 사람도 돈을 내기 때문에 유지된다. 그는 헛돈을 쓴 것이 아니다. 위험을 관리하는 공동 프로젝트에 투자해 ‘위험으로부터 자유’를 산 것이다. 스웨덴은 존 롤스가 <정의론>을 내기도 전인 1950년대에 이미 이런 인식을 가져 복지국가의 대표격이 될 수 있었다. ‘개인의 해방은 사회안전망에 좌우된다. 사회안전망이 있을 때만 모든 사람의 자유, 기회, 역량이 보장된다. 한 사람의 자유는 모든 이들의 연대에 달려있다.’ 스웨덴의 안전망은 평준화한 대학에서도 나타난다. 누구나 좋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다. 한편으로 누구나 고등교육을 받을 필요도 없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김해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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