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농부의 농사일기] ③ 잡초 뽑기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가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 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모르는 것투성이다. 처음 농장에 발을 들인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여전히 작물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도시에서도 흔히 먹는 나물이라는데 나에겐 처음 보는 풀이다. 한번은 내가 심은 옥수수가 싹을 틔워 기쁜 마음으로 말했다. “벌써 싹이 올라왔네요. 밭에는 언제 심죠?” 웬걸, 옥수수가 아니라 고추란다. 농장에서는 이런 무능감을 자주 겪는다. 한 시간을 낑낑대야 끝낼 수 있는 일을 십분만에 해치워버리는 베테랑 농부를 보면 자괴감마저 느껴진다. ‘나도 어디 가서 똑똑하다는 소리도 들어봤고, 이런 거 안 해도 그만인데 왜 이 고생이지?’

▲ 고추(위)와 옥수수(아래) 모종. 옥수수를 직접 심었지만 고추와 구별하지 못했다. ⓒ 박성준

눈물을 닦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20년 넘게 학생으로 살았는데 정작 내가 배운 건 뭘까? 나는 서로의 영역을 넘지 않고 자라나는 나무의 질서를 알지 못한다. 잎을 키우고 꽃을 내미는 과정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이름이나 수명도 모른다. 자연에서 얻은 것들에게 보답할 줄 모르고 바로 옆에 누가 살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한 끼 밥상에 얼마나 많은 노동이 담겨 있는지 모르고 얼마나 많은 생명에 기대어 살고 있는지는 더 모른다. 이렇게 나는 아는 게 거의 없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마저 착각일지도.

나를 넘어 우리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도대체 뭘 안다는 말인가?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잃었다. 우리는 배타적인 자기 이익 말고는 아무것도 볼 줄 모른다. 우리는 상부상조하거나 협동하는 관계의 소중함을 잊었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인간과 인간이 우애롭게 지내기엔 세상이 너무 각박한 것일까? 첨단 기술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지만, 절망과 소외도 그만큼 커지고 있다. 우리는 삶 대부분을 소득과 권력 경쟁에 쓰면서 안정과 행복을 누릴 여유를 잃었다.

중국 전국시대 시인 굴원은 하늘에 자연 현상을 물었다(天問)는데, 나는 하늘을 향해 도시의 폭력을 묻고 싶다. 우리는 왜 생명의 신성함과 존엄성을 기억하지 못할까? 약자를 착취하지 않고는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야만의 현실을 나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도시에 빽빽이 들어선 건물은 생명을 갈아 넣어 만들어진다. 토건 공사장에서 죽는 노동자가 한 해 400명이 넘는데도 하늘로 치솟는 고층 건물들이 그들을 기릴 리는 만무하다. 대기업이 사업을 발주하면 위험한 작업은 하청, 재하청으로 하도급되고, 돈 없고 힘없는 노동자들이 도맡게 된다. 먹이사슬 가장 낮은 곳에 있던 그들은 고층으로 올라가고, 고층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으깨진다. 건물이 들어서기 전 그곳에 살던 수많은 생명 또한 가차 없이 파괴됐을 것이다. 이런 곳에서 성장과 발전을 논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 지난 8일 잡초를 뽑고 있는 기자. 농사를 위해 잡초 뽑는 일은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 박성준

지난 8일에는 오가피나무 밭에서 잡초를 뽑았다. 다른 풀이 자라지 못하도록 해야 영양분이 나무에 집중돼 잘 자란다고 한다. 사실 자라난 풀을 함부로 뽑고 싶지 않았다. 저들도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을 거니까. 지금 내가 농사를 짓고 있는 밭도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곳을 지배한 인간들이 다양한 동식물을 내쫓고 자신들만의 먹이를 길러내고 있을 뿐이다. 신이 오로지 인간에게만 이 땅을 허락한 건 아닐 것이다.

오늘은 자연에서 느끼는 행복감보다 괴로움이 앞선다.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들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제대로 보였으면 좋겠다(문익환, '꿈을 비는 마음' 중에서). 그저 자연이 자연으로, 인간이 인간으로 남겨졌으면 좋겠다. 그뿐이다.


편집 : 김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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