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상상력'

▲ 이성현 PD

저녁 7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눈을 지그시 감고 빛을 차단해본다. 땅거미 지는 석양이 눈꺼풀 속으로 투영되는 탓일까, 아직은 집중이 안 된다. 눈을 감은 채 위를 보면, 며칠 뒤 마주할 결과 발표 때문에 긴장된다. 아래를 보면, 며칠 전 그녀 앞에서 용기 내지 못한 모습이 날 괴롭힌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10년 뒤 나는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을까?’ ‘결혼할 수 있을까?’ ‘내 집은 있을까?’ 눈을 질끈 감으며 생각을 멈춘다. 쓸데없는 걱정에 빠질 시간이 없다. 다시 눈을 감는다. 밤 12시, 밤이 깊어 캄캄한 어둠이 찾아온다. 지금이야 말로 상상력을 만나야 할 시간이다. 심연에서 생각을 꺼낸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지?’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야기는 어떻게 풀어가지?’ 깊이 빠져들수록 내 안에서 수많은 이미지가 태어난다. 그 순간, 뇌 속에 모든 뉴런이 연결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번쩍, 상상이 시작된다. 

▲ 땅거미 지는 석양 속에, 다시 눈을 감는다. 상상력을 만날 시간이다. ⓒ Pixabay

상상력은 우리 안에서 이미지를 만들어내거나 떠오르게 하는 능력이다. 이때 거치는 과정은 인간의 정신 활동일 수도 있고, 무의식의 심연일 수도 있고, 그 사이 어딘가 위치하는 영혼의 영역일 수도 있다. 상상은 이미지를 만드는 인간 활동 전반에 걸쳐 폭넓게 일어난다. 탄생하는 이미지는 시각뿐 아니라 오감을 넘어 육감으로 나타난다. 대상은 내면세계일 수도, 현실세계일 수도 있다. 과거의 경험이나 추억이거나, 오지 않을 먼 미래이기도 하다. 상상력의 산물인 이미지는 독자적으로 성장하는 생명체가 된다. 이미지는 서로 얽히고 설켜 영향을 받으면서 하나의 상상계를 형성한다.

20세기 이전까지 상상력은 부가적 가치였다. 중세시대부터 이어진 성상파괴주의는 상상력과 이미지를 죄로 여겼다. 과학적 합리주의가 번창한 뒤에도 상상력은 인간의 합리적 판단을 방해하는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구조주의 철학자 바슐라르 가스통은 상상력이 인간 행동 양식의 원동력임을 증명했다. 그는 상상력을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의 반대 명제도 아니고, 현상학 일반에서 말하는 인식의 주체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상상력은 꿈의 무의식과 생시의 의식 사이 중간지대였다. 

바슐라르 이론은 예술뿐 아니라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받았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기업조차 상상력의 가치를 추구했다. 자본주의로 급격히 변화해 병약해진 사회는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해야 했다. 상상력을 길러주는 인문학 열풍이 불었다. 개인도 창의력이 부족하여, 취업과 실업, 승진과 탈락, 성공과 실패, 나아가 생존과 죽음의 경계에 서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급격한 자본주의 성장과 획일화 교육으로 사회 문제에 정답을 찾지 못한다. 상상력의 부재를 앓고 있다. 바슐라르는 ‘물, 불, 공기, 흙’ 네 가지 ‘상상력의 호르몬’이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어 창조적 영감을 준다고 했지만, 우리는 일부 자극적인 것에 치중한다. 미디어와 정치인이 만들어내는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이미지에 중독됐고 SNS와 유튜브는 상상력의 탄생을 막았다.

미디어는 ‘불’을 ‘극단’의 이미지로 고착한다. 미디어 속에는 실감나는 표현을 위해 성적, 폭력적으로 특정 신체 부위와 폭행 장면을 클로즈업한다. 등장인물의 뺨을 때리는 수준이 아닌 인물을 죽이거나 파괴하는 것이 일상화했다. 불의 생명, 열정 이미지는 가리고 공포와 충격을 만들어 내는 이미지만 주목했다. 

인간을 품어주는 ‘대지’의 따뜻한 이미지도 퇴색했다. 우리는 흙에 ‘정착’과 ‘안정’을 강요받았다. 정치인들은 연일 집값과 부동산 정책으로 흙의 이미지를 고정시킨다. 땅에 묶인 현대인은 얼마나 고달픈가? 이 땅에서 자살하는 사람은 급증했고, 일부는 몇 십 채 집을 가지고 있고 나머지는 죽을 때까지 살 곳을 찾지 못한다. 자유로운 이동을 지향하는 ‘공기’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순회하는 ‘물’도 상상력이 정착되어 있다. 이미지에 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새벽 3시, 잠 들지도 깨지도 않은 중간지대, ‘상상의 상태’에 들어왔다. 기자, PD로서, 글과 영상으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내가 어떠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나의 작품을 통해 사람들을 꿈꾸게 할 수 있을까?’ 영상을 모으고 글을 끄적거린다. 문법을 만들고 다시 깨트린다. 낯설게 해보기, 일탈하기, 뒤집어보기로 머리 속 이미지는 죽고 다시 살아난다. 깜빡,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려 한다. 시청자가 너무 빨리 이해하지 못하게 빈 공간을 만든다. 독자가 능동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메타포를 심는다. 

기발한 영화는 한 권의 시집을 펼쳐 드는 것과 같다. ‘물, 불, 흙, 공기’ 이미지를 다시 떠올려본다. 현재 한국사회 이미지와 비교해본다. ‘돈과 권력에 매달리면 안 된다.’ 선생님의 말이 떠오른다. 바슐라르도 ‘상상력을 기르려면 무엇보다 자신만의 주관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이미지 자체도 주관적 가치를 부여받은 내 안의 의식이다. 현실에서 주관이 완전히 배제된 순수한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지를 고착화한 한국사회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 주관적인 상상력을 표출해야 한다. 나를 가두고 있는 판옵티콘에서 탈출해야 한다. 스르르 눈을 다시 감는다. 자유롭게,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쩍! 새로운 아이디어가 태어난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이봉수)

편집 : 이예진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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