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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겨서 떠났는데…돌아오긴 더 힘들어요”
[단비인터뷰] ‘방문체류’ 고려인 3세 김 스베틀라나 씨
2020년 12월 21일 (월) 20:47:42 양수호 기자 protects55@naver.com

“떠나고 싶어 떠난 것이 아니었어요. 고향에선 살아갈 길이 없어 밀려나듯 연해주로 건너갔는데, 흘러 흘러 수 만리 먼 카자흐스탄까지 쫓겨난 거지요. 할아버지가 그렇게도 그리워한 조국에 돌아오려는데 그게 떠나기보다 더 힘들어요.” 

   
▲ 경북 경주시에 머물고 있는 고려인 3세 김 스베틀라나 씨가 지난 10월 하순 <단비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양수호

카자흐스탄에서 방문취업 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고려인 3세 김 스베틀라나(Kim Svetlana∙55) 씨는 지난 10월 30일 <단비뉴스> 인터뷰에서 고국에 사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그는 지난 2019년 2월 한국에 들어와 경북 경주시 성건동 고려인 마을에 있는 ‘경북고려인통합지원센터’에서 통역과 상담업무를 맡고 있다. 법무부 외국인통계월보에 따르면 경주시에는 외국인 1만812명이 거주하는데 이 중 3천~4천여 명이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독립국가연합(CIS)에서 들어온 고려인들로 추정된다. 경주시에서도 성건동 고려인 마을은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이다.

할아버지부터 본인까지 두 번 쫓겨난 조국

지난 2000년 처음 조국 땅을 밟은 김 씨는 전남 순천 한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했다. 그는 한국에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돼 작업 중 사고를 당해 오른손을 다쳐 신경이 손상됐다. 

“사장은 한 달을 채우지 못했으니 월급을 주지 못하겠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당장 나가라고 말했습니다. 치료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어요. 장기간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는데, 한 달 정도 병원에 있다가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월급은 물론 치료비도 한 푼 못 받고 카자흐스탄으로 쫓겨나듯 떠난 뒤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을 줄 알았어요.”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간 그는 한국에서 다친 오른손을 끝내 사용할 수 없게 돼 장애판정을 받았다. 그는 돌아가자 바로 생업에 뛰어들어 생활비를 벌어 두 아들을 키웠다. 두 아들은 지금 택시기사와 전기요금 수납업무를 하면서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다. 자식들이 취업하고 독립하자 그는 뒤늦게 사격선수로 입문했다.   

“사격선수가 되기로 마음먹은 건 오른손을 사용하지 못하지만 왼손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뚜렷한 목표는 없었지만 과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그 기분이 좋았어요. 오른손을 다쳐 생긴 상처와 아픔을 사격으로 이겨낸 것 같아요. 지금은 나이가 많아지고 해서 사격을 하지는 않습니다. 좋은 추억으로 남겨두었어요.”

김 씨는 사격을 배운 지 얼마 안 돼 우수한 성적을 내면서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공기 소총 10m 부문에 주로 출전했으며, 카자흐스탄과 유럽 대륙을 오가며 많은 대회에 출전했다. 메달을 딸 만큼 실력도 뛰어났다. 2014년에는 세계장애인사격연맹 여자 10m 공기소총 부문에서 아시아 랭킹 8위, 세계 랭킹 19위까지 올랐다. 

‘2014 인천아시안패러게임’ 사격선수로 또 내한

김 씨는 지난 2014년 10월 인천아시안게임이 끝난 직후 열린 장애인대회인 인천아시안패러게임에 카자흐스탄 국가대표 사격선수로 출전하면서 14년 만에 다시 조국 땅을 밟았다. 

   
▲ 김 씨가 지난 2014년 10월 인천아시안패러게임 사격선수로 출전해 공기소총 사격을 하고 있다. Ⓒ 양수호

“사격선수로 활동하며 가장 기억에 남은 건 2014년 인천장애인아시안게임에 출전한 것이지요. 14년 만에 다시 한국에 간다는 설렘과 함께 한편으론 옛 생각이 나서 기분이 좋지 않은 점도 있었어요. 2000년 처음 들어와 한 달도 안 돼 손을 다쳐 못쓰게 됐는데 매몰차게 나를 쫓아낸 기억이 떠올라 복잡한 기분이었죠. 그때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간 뒤 정말 힘들게 살았거든요. 할아버지가 중앙아시아를 떠돌며 막노동과 일용직을 전전한 것처럼요. 하지만 힘들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꼭 좋은 성적을 내서 돌아가야 하겠다는 각오도 생기더라고요.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특별했던 대회예요.”

김 씨는 여자 10m 공기소총 부문에 출전해 1차전에서는 메달권에 근접했지만, 라운드를 거듭하며 점수가 떨어져 7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안고 아쉬움 속에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간 그는 사격선수 활동을 그만두고 그동안 공적을 인정받아 카자흐스탄 정부에서 연금을 받게 됐다. 

   
▲ 김 씨가 지난 2014년 인천아시안패러게임을 마치고 카자흐스탄으로 귀국한 뒤 자신의 출전을 치하하는 플래카드 밑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양수호

2019년 세 번째 ‘일시 귀국’

김 씨는 작년 2월 세 번째 조국 땅을 밟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할아버지 나라에 와서 살겠다는 일념으로 3년짜리 방문체류비자를 받고 들어왔다.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카자흐스탄 정부가 지급하는 연금도 포기했다.  

“연금을 포기하면서까지 조국에 돌아오고 싶었어요. 떠올리기 싫은 기억도 많지만 그래도 할아버지의 나라로 꼭 돌아와 살고 싶었거든요. 한국이 카자흐스탄보다 살기 좋은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조국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더 크죠. 그래서 고려인 동포들이 많이 들어오는데 한국에 들어오기도 살기도 만만치 않아요.”

   
▲ 김 씨의 할아버지(왼쪽), 아버지(오른쪽), 고모(가운데). © 양수호

김 씨의 한국 생활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우리말이 서툴러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것이 답답하다. 그는 고려인 동포 중에서는 우리말을 좀 하는 편이라 통역 일을 하고 있지만 기본적인 의사소통 정도에 머물러 있다. 일자리 찾기도 쉽지 않은데 처음 들어왔을 때 다친 오른손이 마비돼 산업체 취업은 거의 불가능하다. 여기에 비자 문제가 그의 장기체류를 막고 있다.

“고려인 지원센터에서 일하다 보면 한국어 소통과 임금체불 비자 문제로 많은 고려인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한국말을 조금 할 수 있어 애로를 호소하러 온 고려인 동포들 이야기를 듣고 통역을 하고 상담을 해주고 있지만 제 문제도 솔직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어요.” 

내후년이면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김 씨의 비자는 방문취업비자(H2)로 유효기간 3년이 지나면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가 비자를 갱신해 다시 들어와야 된다. 장기체류가 가능한 재외동포비자(F4)를 발급받으려면 기술자격증을 따거나 산업체에서 1년 이상 성실하게 근무해야 하는 등 일정한 조건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그는 오른손을 다쳐 기술자격증을 따는 것이나 산업체 취업 자체가 어려워 재외동포비자를 받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 김 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할머니는 카자흐스탄 출신이다. Ⓒ 양수호

여기에다 코로나19 사태로 비자 갱신을 위해 한 번 국적국으로 나가면 다시 들어 오는 것이 보장되지 않는 문제까지 겹쳤다. 정부가 지난달 26일 '방역강화 대상 국가 동포 애로사항 한시적 구제방안'을 발표했으나 재입국 허가 대상을 '국내 초중고 재학생과 그 부모'로 한정해 김 씨는 그 혜택도 받지 못한다.

”아직 기간이 좀 남아 있지만 비자 갱신이 걱정입니다. 기술자격증 시험을 봐서 한국에 오래 머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생각대로 잘 될지 모르겠어요. 사고로 다친 오른손을 사용할 수 없어 기술자격증 따기나 취업이 쉽지 않아서…” 

   
▲ 김 씨는 다친 오른손을 사용하지 못해 왼손으로 핸드폰을 조작한다. Ⓒ 양수호

김 씨는 나름대로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기술자격증을 딸 방법을 찾아 보고 있지만 여의치 않으면 2022년 2월에는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가야 한다. 떠나고 싶어 떠난 것이  아닌데,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는 조국. 인터뷰를 마친 김 씨의 눈에는 할아버지의 나라로 돌아오고 싶다는 간절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지도자가 무능해 나라가 쇠락하면 백성들이 여기저기 떠돌게 된다. 무능한 군주 때문에 국운이 기울고 봉건 지주와 관리들의 수탈이 극심해지던 1863년, 함경도 지방 농민 13가구가 두만강을 몰래 건너 연해주 포시에트로 이주했다. 이렇게 시작된 유랑민의 행렬로 1870년대 중반에는 1만명이 넘는 조선 백성들이 연해주 곳곳으로 넘어갔다. 그나마 국경 너머 조국이 건너다 보이는 곳에서 다시 돌아갈 날을 기다리던 이들은 1937년 스탈린 정권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이역만리 먼 곳으로 쫓겨났다. 110~130년이 지나서야 선조들이 꿈에도 그리던 조국으로 고려인 3세와 4세들이 속속 귀국하고 있지만, 이 나라는 그들에게 또 하나 싸늘한 이방(異邦)이다. <단비뉴스>가 조국에 돌아와 차별당하고 홀대받는 고려인 후세들의 귀국 후 정착 실태와 문제점을 취재했다. (편집자)

편집 : 이나경 기자

[양수호 기자]
단비뉴스 기획탐사팀, 시사현안팀 양수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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