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의 시선2]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태일 형을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다. 윤리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를 보여주었다. 말 안 듣는 학생들을 자리에 앉혀 두려는 방편이었다. 화질은 떨어졌지만 청룡영화제 작품상, 감독상 등 많은 상을 받은 영화에 나는 금방 빠져 들었다. 영화 속 태일 형은 따뜻한 동네 형, 오빠였다. 가난한 집 장남으로, 어린 시절부터 가족 생계를 위해 우산을 팔고 구두를 닦으며 돈을 벌었다. 일하는 부모를 대신해 동생들을 보살폈다.

평화시장에서 일할 때도 배곯는 열두세살 여동생들을 돌봤다. 도봉산 자락에서 동대문까지 걸어 다니며 차비를 아껴 어린 견습공들에게 풀빵을 사주기도 했다. 통금 시간에 걸려 경찰서에 연행돼 그곳에서 자기도 했다. 미싱사로 일하던 때 여공들의 고된 노동일을 도와주고 싶어, 월급이 반 밖에 되지 않는 재단사가 된다. 재단사는 노동자를 채용하고 이들을 관리하는 권리가 있었다. 좁은 공간에서 하루 16시간 먼지를 마시며 일하는 여공들은 피를 토했지만, 작업장은 피 묻은 손조차 씻을 곳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 전태일은 따뜻한 동네 형이었다. 그는 자신이 힘들어도 친구를 먼저 도왔다. 자신이 먹지 못해도 동생을 먼저 먹였다. ⓒ KBS <그때 그 뉴스>

작업환경 개선에 애쓰던 그가 어느 날 근로기준법이란 노동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국민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그가 법을 공부하는 데 꼬박 3년이 걸렸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모르던 자신들을 ‘바보’라 부르며 ‘바보회’를 만들고 근로기준법을 전혀 지키지 않는 공장의 실태를 노동청에 고발하고 개선을 요구했다. 언론과 사람들에게도 호소했다. 노동청과 공장주는 결탁하고 있었고 세상은 노동자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태일 형은 해고당했고 노동자들의 마지막 시위조차 경찰의 진압으로 무산되었다. 그는 근로기준법 책과 자기 몸에 불을 붙인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태일 형의 분신 장면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분노와 절박함에 가득했던 그의 외침, 그의 몸짓은 지금도 생생하다.

<송곳>으로 다시 만난 전태일

태일 형을 다시 만난 건 대학 시절, 웹툰 <송곳>을 통해서다. <송곳>은 비정규직 노동 문제를 그린 작품이다. 만화 속 주인공들에게서 태일 형이 보였다. 주인공 ‘이수인’은 프랑스 대형할인점 관리직원으로, 회사가 자신의 비정규직 직원들을 정리해고하자 노동조합을 결성해 그들을 돕는다. 노동자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다. 육사 시절 ‘이수인’은 대대장의 대통령 선거 특정 후보 투표 강요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회사 점장의 지독한 해고 지시에도 직원들을 지켰다. 주머니 속을 뚫고 나오는 송곳처럼 불평등한 처사에 양심을 걸고 행동했다.

만화는 흥행하여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나는 그것도 챙겨봤다. 판타지 만화가 아닌 노동현실이 그대로 반영된 드라마를 보자 마음에 불편함이 밀려왔다. 끝까지 해결되지 않는 드라마 속 노동문제는 속을 답답하게 했다. 일하는 직원들은 회사에 계속 부당한 해고와 지시를 받았다. 그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고, 발버둥칠수록 회사측에 더욱 짓밟혔다. 노동현장은 태일 형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40년이 지났는데, 노동자들은 자기 권리를 위해 여전히 싸우고 있다. 수많은 노동자의 죽음 이후에도 산재는 거듭되고 또 다시 노동자들은 목숨을 잃는다.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가도 기업에게는 이익이 돌아갔다.

▲ <송곳> 웹툰은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주머니 속을 뚫고 나오는 송곳처럼 불평등한 처사에 양심을 걸고 행동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전태일을 닮았다. ⓒ 스브스뉴스

뉴스에서 보는 노동자의 고통을 드라마에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 드라마는 치킨을 먹으며 편히 누워 보는 나를 혼내는 느낌이었다. 시청률도 점점 줄어들었고 나도 마지막 회를 보지 않았다. 그렇게 태일 형은 또 기억에서 사라졌다. 노동 문제는 여전히 나와 먼 이야기였다. 서울 기숙사에서 편하게 공부하고, 학사장교로 직업군인을 지망하는 나에게, 노동 문제는 판타지 만화였을 뿐이다.

노동문제는 내 일이었다 

대학 졸업 후, 집을 떠나 독립을 준비했다. <송곳>에서 ‘구고신’ 노무사가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라고 말했듯이,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딛자 내 풍경도 달라졌다. 영화 제작부 막내로 촬영현장에서 밤낮으로 소품을 나르는 친구가 보였다. 그녀는 촬영현장에서 벌어지는 여성 비하와 인신공격에 우울증이 왔고 극단적 선택을 생각하다 우리나라를 떠났다.

공고를 나와 공장에서 하루에 열두세 시간 아주머니들과 같이 노동하는 동생이 보였다. 학비를 벌기 위해 주말 없이 배달의 민족 오토바이를 위험하게 모는 동생이 보였다. 사고 위험은 곳곳에 숨어있었다. 일을 할수록 몸과 정신에 골병이 들어갔다. 대기업 친구도, 공무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기업 영업사원 친구는 일이 힘들어도 누구에게도 힘들다고 말하지 못했다. 상사와 회사 분위기가 무서워 며칠 동안 혼자 끙끙댔다. 그는 결국 매일 야근하다 쓰러졌고 지금은 일을 그만두고 약을 달고 다닌다. 동료 장교는 초임 장교 업무에 부담이 커 바다에 뛰어내리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우리는 며칠 동안 그를 수색했지만 찾지 못했다. 같이 막내 일을 하던 동료였기에 큰 충격이었다.

내가 선 자리를 다시 돌아보았다. 주변에 힘든 노동을 하지만 대우받지 못하는 친구들은 많았고, 나는 아무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이들이 바로 노동자였다. 그때서야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 씨, 구의역 김 군 등 어린 나이에 안타깝게 죽은 친구들이 보였다. 비정규직 근무자 김용균 씨는 홀로 밤새 일을 하다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졌다. 그 현장은 안전시설을 갖추지 못했고  ‘2인 1조’ 근무 규칙도 무시됐다. 그는 기계에 끼어 숨진 지 4시간여 만에 발견됐다. 당시 24살. 구의역 김 군의 작업환경도 같았다. 그는 스크린도어 오작동 신고를 받고 홀로 정비하다 열차에 치어 숨졌다. 위험한 선로 작업 때 그를 지켜봐 줄 사람은 없었다. 평소에 밥도 제대로 먹지못해 컵라면을 가지고 다녔다. 당시 19살.

▲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작업중 사고로 숨진 김용균 씨의 광화문광장 분향소. 그는 홀로 밤새 일을 하다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졌다. ⓒ 연합뉴스

두 김 군의 죽음은 사고 당시만 반짝 여론의 관심을 받았다. 죽음은 이어졌다. 건설현장에서 떨어져 숨진 김태규 씨, 외식업체에서 현장실습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동균 군 등 산재사망자수는 계속 증가한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태일 형의 외침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현장에서는 반향이 없다. ‘노동자들이 죽어갈 때, 너는 어디 있었냐’는 물음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책임을 정부와 기업의 일로 떠넘겨온 내 모습이 보였다. 태일 형은 3년 동안 혼자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며 ‘나에게 글을 알려줄 대학생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이라 염원했다. 태일 형이 그렇게 애타게 찾던 친구가 바로 ‘나’였고 ’우리’였는데 우리는 외면했다.

하루 평균 산재사망자수 5.6명

OECD 통계가 제공되는 1994년부터 2016년까지 23년간 한국은 두 차례(2006, 2011년)만 빼고 ‘산재사망률 1위’를 기록했다. 2015년 10만 명당 산재 사망자는 영국이 0.4명으로 최저이고, 한국은 영국보다 20배 이상 많은 10.1명이다. 고용노동부 통계를 보면 2018년에만 업무 관련 사고나 질병으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 수는 2,142명이다. 더 심각한 건 산업사고 발생률은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이다. 죽지 않은 산업사고는 은폐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산업재해를 숨기려는 회사와 싸워가면서 산재를 신청하기 어렵다. 서울대 산학협력단이 발표한 ‘산재은폐추정액은’ 최대 3218억원이다.

국가와 기업은 ‘효율성’과 ‘이익’을 목적으로 산업현장에서 발생하는 위험의 책임을 외부로 돌린다. 산업재해 피해는 약자인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돌아간다. 이들은 동료가 추락사 한곳에서 계속 일한다. 동료가 쓰러진 곳에서 이어서 일한다. 휴식시간, 점심시간 등 산업안전보건법은 그들을 지켜줄 그늘이 되지 못한다. 산재가 발생해도 회사에 손해가 가기 때문에 병원에 잘 보내지 않으려 한다. 현장에서 제일 아래 있는 일용직 노동자들은 근로조건 계약서도 작성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 한국 하루 평균 산재사망자수 평균 5.6명. 오늘도 꼬박꼬박 하루 5명 이상이 산재로 가족 곁을 떠난다. ⓒ KBS

전태일 50주기에 노동계는 전태일 3법 발의 운동을 시작했다. 여전히 근로계약서 없이 장시간 저임금에 시달리며 안전과 생명까지 불안한, 현재진행형 노동현장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논의되던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 적용’, ‘모든 노동자의 노조할 권리 보장’, ‘중대재해기업 처벌법 개정’을 담았다. 진보정당, 시민사회, 종교계에서도 힘을 보태고 있다. 국민에게도 10만명 이상 동의를 얻었다.

태일 형은 여전히 살아서 말한다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 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지난 추석, 곳곳에 울려 퍼진 나훈아의 신곡 ‘테스형’의 가사다. 소크라테스의 삶과 나훈아의 질문은 코로나19로 힘든 우리를 위로했다. 전태일의 삶도 지금 힘든 노동자를 위로한다. 밤낮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더 힘든 곳에서 기계처럼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태일 형이 있었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여전히 친구가 되어주지 못하는 우리를 보고 태일이 형은 뭐라 말할까? ‘태일 형, 세상이 왜 이래. 모르겠소 태일 형.’

전태일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치며 분신한 지 50년, 현장에서 노동자들은 여전히 기계처럼 일하다 죽어간다. 하루에도 5명이 산재로 죽는다.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 씨’, ‘구의역 김 군’이 죽은 곳에서 다른 김용균이, 김 군이 같은 곳에서 떨어지고, 같은 곳에서 죽어간다. 전태일이 인간다운 대접을 요구하며 자신의 온몸을 던졌지만 또다른 전태일들이 노동현장에서 여전히 고통받는다. 사람이 쓰러져 가는데 나 혼자 살기 위해 모른 척할 순 없다. 어린 노동자들을 위해 자기 모든 것을 던져 그들을 도운 태일 형의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다’라는 외침을 살려 내야 한다. 그가 만들고자 한 사람대접 받는 노동현장을 지금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태일 형이 실현하려 한 근로기준법을 제대로 준수하는 회사는 지금도 찾기 어렵다. 50년이 지났는데 그가 꿈꾸던 세상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이제야 태일 형을 똑바로 마주한다. 그는 나를 애타게 찾았지만, 나는 형과 다르다고 말한 내가 부끄럽고 미안하다. 그는 마지막 일기에 죽을 각오로 불쌍한 형제들을 돕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죽는 순간까지 깜깜한 하늘에 갇힌 노동자들에게 꼭 인간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열어주겠다고.

"나는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야 한다불쌍한  형제의 곁으로… 내가 돌보지 않으면   나약한 생명체들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조금만 참고 견디어라너희들을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바치마너희들은  마음의 고향이로다."(1970 8 9전태일의 마지막 일기)

 

 

▲ 전태일은 분신 3개월 전에 일기장에 죽을 각오로 불쌍한 형제들을 돕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 KBS <역사저널 그날>

[청년기자들의 시선1]이 하나의 현상과 주제에 관한 다양한 시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시선2]는 현상들의 관계에 주목해 현상의 본질을 더 천착하고, 충돌하는 현상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 새로운 비전을 모색한다. 이번 주제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다. 1970년 11월 13일 22살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치며 자신을 불살랐다. 그는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혹사당하는 어린 견습공들에게 풀빵을 사주며 사람이 대접받는 노동환경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났지만 노동현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또다른 ‘전태일들’이 죽음 앞에 놓인 오늘, 노동의 의미와 노동자의 삶을 기록한다. (편집자)

편집 : 이성현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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