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의 시선2] 기자/피디가 간다 ② 한국사회의 좌표

거대 함정의 안전은 항해사에게 달려있다

해군 장교 시절, 내 직무는 축구장 크기 함정을 이끄는 항해사였다. 매일 기상과 해류를 파악하여 배의 진로를 안내했다. 함정은 무게가 수천 톤이 넘어 자동차처럼 갑자기 방향을 바꾸거나 속도를 낮추기 어렵다. 해류와 조류에도 영향을 받는다. 특히 남해와 서해를 항해할 때, 항해사의 역할은 중요했다. 수로가 좁은 데다 섬과 암초가 많기 때문이다. 항해의 안전이 항해사의 역량에 달려 있다.

항해사는 안전한 항해를 위해 배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위치는 교차방위법으로 산출한다. 등대나 섬 등 물표 3개를 정하고 상대적 방위를 이용해 배의 위치를 측정한다. 최신 GPS, 레이더 기술도 있지만, 교차방위법은 비상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위치측정법이다. 측정을 하려면 세 명의 전문요원이 필요하다. 나침반으로 주위 물표의 방위를 측정하는 방위측정수, 측정된 방위를 지도에 표시하는 위치산출수, 둘 사이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통신수이다. 모두 전문교육을 받고, 오랜 경험을 필요로 한다. 나는 위치산출수였다.

▲ 교차방위법은 3곳의 물표를 정하고 상대적 방위를 통해 배의 위치를 파악한다. 학섬의 탑 10도, 빨간 등대 90도, 산봉우리 200도, 세 개의 방위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우리 배가 있다. ⓒ 이성현

위치가 산출되면 항해 지시가 떨어진다. “9시30분 함정 위치보고! 현 침로 140도, 침로선 왼쪽 30, 권고침로 145도, 유향/유속 300도 3knot.” (현재 위치, 항로 140도이며 계획된 침로의 왼편 30m 벗어나 항해 중. 145도로 항해 권고. 300도에서 3knot 조류가 흐름.) 

연안 협수로를 지날 때 항해사의 안내는 3분마다 계속된다. 안내가 잘못 되면 대형사고가 난다. 다른 선박과 충돌하거나 암초에 부딪혀 좌초될 수 있다. 항해사가 정확하게 안내하려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바다의 기상과 조류를 살피며, 주변 물표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함정의 안전과 승무원의 생명은 항해중인 그 자리에서 가장 적절한 물표를 찾아 정확하게 방위각도를 계산해내는 능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바다에는 수만 갈래 바닷길이 있다

나는 서해, 남해, 동해를 모두 누볐다. 울릉도에서 해가 뜨는 걸, 백령도에서는 해가 지는 걸 봤다. 이어도까지 가봤다. 바다를 통해서는 동서남북 어느 방향이든 향할 수 있다. 바다를 통해 배는 5대양 6대주, 어디든 갈 수 있다. 바다는 내게, 내가 정하는 방향과 목표에 따라 어디든 갈 수 있다고 가르쳐줬다. 망망대해로 나가면 배는 마음껏 바다를 누빌 수 있다. 배는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갔다. 배는 바다에서 길을 잃지 않았다. 배가 가는 길은 곧 새 바닷길이 됐다. 장엄한 바다는 나를 압도했고 내가 살아 온 지난날을 돌아보게 했다.

내가 살아온 길은 좁고 답답했다. 12년 동안 학교에서 주입식 교육을 받으며, 모든 시간과 노력은 ‘대입’ 하나로 평가받았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취업을 위해 다시 영어와 기타 자격증을 따야 했다. 결혼, 자식교육, 노후준비 등 모든 게 객관식 정답으로 평가받는, 한 방향으로 난 길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하고 싶은 일도 다 접고 살았다. 대입에 실패한 뒤 하고 싶었던 음악에 도전하지 못했고, 영화 전공이 맞지 않을 때도 좋아하는 문학을 공부하지 못했다. 

▲ 바다에는 수만 갈래 바닷길이 있다. 배는 바다에서 길을 잃지 않았다. 배가 가는 길은 곳 새 바닷길이 된다. ⓒ Pixabay

무궁무진한 바닷길은, 나만의 바닷길을 찾게 했다. 분명한 방향만 있으면, 마침내 배는 멋진 항해를 할 수 있다. 암초가 나오면 항로를 바꾸고, 달릴 힘이 떨어지면 멈춰서 쉬어 가도 괜찮았다. 바다는 내게, 세상에 더 많은 길이 있다는 걸 알려줬다. 수평선 넘어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 가운데 떠 있으면서 내가 참 작다는 사실을, 그러나 나의 길은 무한하다는 걸 깨달았다. 더 이상 정해진 길을 벗어나는 게 두렵지 않았다. 나도 멋진 인생 항해를 할 수 있다는 기대가 생겼다.

방향을 잃어버린 한국사회

남과 북, 좌와 우로 나뉜 한국사회에 부는 바람과 파도가 매섭다. 지난 9월 연평도 인근 해역에서 북한군의 총격에 숨진 해양수산부 소속 공무원 이 모씨 사건을 보자. 죽음은 왼쪽과 오른쪽, 남쪽과 북쪽으로 편가르기로 판단되었다. 그가 ‘어느 방향으로 갔느냐’에 따라 도박 빚을 피해 도망친 월북자가 되기도, 정부의 무능으로 구하지 못한 국민이 되기도 했다. 아들의 편지마저도 정치적 도구로 이용당해 조롱받았다. 그는 자녀 둘을 둔 40대 가장이었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술자리도 좋아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의 삶이, 삶의 방향이 정쟁이나 이념갈등으로 결정되어선 안 된다. 남북은, 좌우는 그가 어디에 위치했고 그처럼 또 다른 삶이 희생되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배가 항해할 때는 전방위 360도를 1도까지 세분해 침로를 정한다. 왼쪽과 오른쪽, 남과 북을 나누는 방향은 배에 탄 승무원의 안전과 생명이 최우선이다. 그동안 개인의 삶은 무시됐다. 남북이나 영호남이란 지역, 좌우나 이념 정치 집단이 끌고 가는 방향이 개인의 세세한 삶의 방향을 지배해 왔다. 분단과 전쟁을 통해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뉜 진영은 왼편으로 틀어 빨갱이를 만들고 오른편으로 틀어 꼴통보수를 만들었다. 남과 북으로 구분한 방향이 위를 향하면 공산주의자가 되고 아래를 향하면 자본주의자가 되었다. 5.18 의거, 세월호 사건뿐 아니라 여순사건, 제주4.3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현대사의 아픔들이 아직도 방향과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 

바다는 세상이고, 배는 국민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국민에게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고 올바른 길을 안내하는 항해사가 필요하다. 국민이 탄 배의 안전을 책임지고 새 바닷길을 열어야 한다. 항해사가 기상과 해류를 살피고 물표로 방향을 잡아 배의 안전을 도모하듯이, 우리 사회를 둘러싼 흐름과 물표를 잘못 진단하면 배는 좌초한다. 항해사는 주변 상황을 분석해 현재 한국의 좌표를 계산해내고, 의제를 설정해 나아갈 길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있는가

갈등과 분열이 심각한 한국사회가 방향을 잃지 않고 올바른 바닷길을 개척하려면 한국의 위치부터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위치를 진단하기 위해 먼저 뚜렷한 3가지 물표를 정해야 한다. 한국사회의 물표는 현재를 드러내는 ‘불평등’과 미래를 상징하는 ‘4차산업사회’, 그리고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가치인 ‘민주주의’다.

우리 사회의 직각 방향에는 고착된 ‘불평등’ 물표가 있다. 경제는 성장했지만 문제도 쌓였다. 부는 계속해서 부를 쌓고 먹고 살기 위해 기계적으로 일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은 계속된다. 불평등이 만연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부의 불평등은 교육격차, 기술·능력 격차를 낳았다. 격차는 다시 중산층도 무너뜨려 하층민으로 전락시킨다. 하층민은 생계마저 걱정해야 한다. 2020년 최저시급은 8590원이지만,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는 8억원을 넘는다. 인간은 돈과 자리, 계급으로 평가받는다. 불평등, 빈부격차에 대한 불안과 분노는 이젠 넘볼 수 없는 상류층보다 낮아진 하류층을 향한 혐오와 차별로 드러난다. 불평등 해소 없이 미래는 없다.

▲ 영화 <기생충> 흑백판 포스터. 이 영화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끔찍하고 처절하게 드러낸다. 봉준호 감독은 ‘지금 우리는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있고,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묻는다. ⓒ 연합뉴스

우리 앞에는 ‘4차산업’이라는 미래 물표가 있다. 일자리는 AI와 로봇으로 대체될 것이고, 공유경제로 초래된 미래사회는 새로운 노동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요구한다. 온라인으로 연결되는 사회는 기초생활자의 생계를 위협하고, 삶의 여건이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저출생, 노령화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눈 앞에 닥친 기후 위기는 지구와 생태계, 대량생산에 대량소비해온 지금까지 삶의 방식을 변경하도록 요구한다. 

경제학자 가이 스탠딩은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에 “프레카리아트(Precariat, 불안정한 노동자)를 보호할 장치가 시급하다”고 조언한다. 불안정한 노동자는 비정규직, 실업자, 퇴직고령자 등 생계를 위해 불안정한 노동에 얽매인 노동자를 말한다. 한국에서도 배달 플랫폼 노동자, 하청 노동자, 프리랜서 등 불안전 계층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불평등과 불안전이 계속되면 미래사회는 초계급사회가 되고 0.01%가 나머지 99.99% 프레카리아트를 지배하게 될지 모른다. 새로운 노동과 일자리를 위한 대책과 실행은 미래로 가는 첫걸음이다.

우리 뒤에는 ‘민주주의’ 물표가 있다. 35년의 일제강점기, 분단과 한국전쟁 그리고 경제성장과 독재정권을 겪고 한국은 민주공화국이 되었다. 힘든 근·현대사를 거친 뒤 우리는 헌법 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라고 선언했다. '민주'와 '공화'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가치, 방향성이다. ‘민주’는 잃어버린 사람의 가치를 찾아내는 일이고 ‘공화’는 우리가 함께 살아간다는 철학과 정신을 실현하는 일이다. 그러자면 사람이 있는 따뜻한 자본주의, 원칙이 있는 정치, 희생을 실현하는 종교가 돼야 한다. 우리는 아픔을 함께 안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  

항해사 피디, 내가 간다

피디는 항해사다. 국민이 탄 배의 안전을 책임지고 바닷길을 개척한다. 배가 순항하려면 항해사의 역량이 중요한 것처럼, 우리 한국도 순항하려면 PD의 역할이 중요하다. 우리 사회를 둘러싼 물표를 잘못 진단하면 우리 공동체는 목표를 잃는다. PD는 항해사가 되어 늘 주변의 상황을 분석해 한국의 위치를 알려줘야 한다. 다큐멘터리를 예술로 승화시킨 지가 베르토프 감독은 ‘키노아이(Kino-eye, 카메라-눈)’를 선언했다. 

“나는 ‘불안전한 인간의 눈’을 대신해 ‘완전한 눈’인 카메라를 통해 세계의 느낌’을 포착한다.”

‘키노아이’ 선언은 카메라를 통해 진실을 포착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베르토프는 1929년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통해 이를 실현해냈다. 그의 말은, 세상을 담지 못하고 카메라만 들고 있는 나를 반추하게 한다. 

아직 초임 항해사 PD로서 내가 보여주려던 물표를 전달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막노동자로 살아온 할아버지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처음 상영했을 때, 할아버지의 쓰라린 아픔을 전달하지 못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웠다. 진실을 카메라로 보여주려면 엄청난 열정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3개월간 시골 집에서 지내며 할아버지를 밤낮으로 바라봤다. 머릿속에 맴도는 피사체를 치열하게 사랑하기 위해 잠을 줄였다. 의도를 갖고 다가갈 때 나오지 않던 할아버지의 진심이 손자로서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같이 슬퍼할 때 나왔다. 감동이 전해졌다. 

카메라를 들고 세상을 담는 사람으로서, 수많은 물표를 소개할 생각에 설렌다. 세상을 바다로 삼아 한국 근·현대사의 물표를 롱테이크로 찬찬히 담아내기, 사람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클로즈업해서 진실을 드러내기, 다가올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몽타주하기…. 수만 가지 바닷길 중에, 올바른 길을 보여주겠다. 한국사회 전방위에 떠있는 물표를 탐색하며 올바른 길을 안내하는 항해사 PD, 내가 간다.


[청년기자의 시선] 시즌2를 시작한다. 시즌1이 하나의 현상과 주제에 관한 다양한 시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시즌2는 현상들의 관계에 주목해 현상의 본질을 더 천착하고, 충돌하는 현상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 새로운 비전을 모색한다. 이번 주제는 ‘기자/피디가 간다’이다. 언론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언론이 오늘의 세상과 우리 삶을 제대로 기록해 사회적 어젠다를 제기해야 하지만, 진영과 이익 논리에 빠져 ‘기레기’에서 ‘기더기’까지 전락했다. 언론이 바로 서지 못하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참 기자/피디를 열망하는 언론학도가 세상에 외친다, 이 땅의 건강한 저널리즘을. (편집자)

편집 : 김은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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