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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이 없는 것 말고는 다 좋았다
[맛있는 집 재밌는 곳] 서울 낙산순성길
2020년 07월 26일 (일) 21:59:18 이정헌 기자 93jhun@gmail.com

오늘날 사람들은 서울의 지리를 대개 한강을 경계 삼아 강북과 강남으로 구분한다. ‘강남불패’의 부동산 신화가 지역 구분에도 기여한 듯하다. 서울은 본래 내사산에 둘러싸인 분지에 가까웠다. 김정호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수선전도>를 보면, 한양 도성을 중앙에 두고 사방에 내사산인 북악산∙타락산∙목멱산(남산)∙인왕산을 두르고 있다.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조선 왕조’를 개창한 뒤 계룡산과 무악을 거쳐 마침내 도읍지로 결정한 곳이 한양이다. 왕권의 기틀을 닦고자 태조는 곧장 축성에 나섰다. 태조 5년인 1396년, 1~2월 두 달 동안 민간인 11만8070명이 한양 도성을 쌓았다. 산세를 타고 세워진 성벽이 18.6km에 이르는데, 한양 사람들은 도성 전체를 한바퀴 도는 ‘순성놀이’를 즐겼다.

동쪽 성곽을 아우르고 솟아오른 산이 낙산이다. 두 개의 구릉이 마치 낙타의 등과 같다 하여, 타락산으로도 불렸다. 오늘날은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성곽길’이 뻗어 있어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최근 내가 낙산순성길을 찾아간 이유이기도 하다.

   
▲ 김정호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수선전도>는 도성을 중앙에 두고 주변을 두른 내사산을 묘사하고 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성북구와 종로구를 종단하는 낙산순성길에는 오를 수 있는 길이 많다. 기다란 성벽 곳곳에 샛길을 품고 있다.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을 거쳐 오를 수 있고, 동대문(흥인지문)에서 출발해 거꾸로 오를 수도 있다. 낙산의 양 종점을 주파하고자 한다면,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출발할 것을 권한다. 낙산순성길에 오르기 전에는 골목 풍경을 간직한 3.6.9 성곽마을을 둘러볼 수 있다. 심야의 꼬불꼬불한 골목길은 '이정표'의 존재를 무색케 한다. 이 길이 맞을까? 스산한 밤길에 괜스레 불안감이 엄습해오지만, 주택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긴장감을 덜어준다. 뒤집어보면 나야말로 심야의 낯선 인기척이다. 행여라도 실례가 아닐까 발걸음을 빠르게 옮긴다.

   
▲ 한적한 낙산순성길. 중앙공원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불어난 물처럼 많아졌다. Ⓒ 이정헌

성벽을 따라 걸으며 역사를 읽다

낙산의 성벽은 단조롭다. 표면강화와 석재보강 등 보존처리를 거친 탓에 ‘옛 느낌’은 거의 없다. 색감과 질감은 깔끔 떠는 도시 여인을 닮았다. 잘 닦아놓은 길도 그렇다. 길을 걷다 보면, 길게 자란 잡초가 다리를 간지럽힌다. 이름 모를 풀들은 하나같이 길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마치 자신을 알아 달라는 것처럼. 잡초에도 이름이 있으련만 아는 이는 거의 없어 보인다. 반면 성벽을 쌓은 석재에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성곽 공사와 관련된 내용을 새긴 ‘각자성석(刻字城石)’이 그것이다.

태조 때 건설한 성곽은 전체 구간을 일정하게 나누어, 구간별로 천자문의 자호를 새겨 넣었다. 180여 미터씩 전체 97개 구간이다. 1422년 세종 4년에 쌓은 석재에는 군∙현의 이름이 함께 새겨져 있다. 성벽이 무너지면 담당 군∙현민들이 서울로 올라와 성을 다시 쌓았다. 일종의 공사 책임제다.

태조 때 건설한 성곽은 세종∙숙종∙순조 등을 거치며 개축과 보수를 거듭했다. 시기마다 다른 석재를 사용해 변화의 추이가 성벽에 그대로 나타난다. 태조 때 성벽은 잔돌을 사용해 석성을 세웠다. 세종 때 하부에 대형 석재를 쌓은 뒤 잔돌을 활용했고, 숙종 때는 잘 다듬은 정방형 석재를 담장처럼 쌓았다. 현대에 이르러 성곽은 보강됐지만, 조선시대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각기 다른 형태와 크기와 질감을 가진 석재가 하나의 성벽을 이루고 있다.

 
한양 도성의 성벽은 시기별로 다른 석재를 사용해 그 차이가 뚜렷하게 구분된다. Ⓒ 이정헌

인근 창신동 주민들과 대학로 학생들이 이곳을 자주 산책한다.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 덕분이다. 홀로 걷는 내 앞에 손을 마주 잡은 연인이 길을 가는가 하면, 두 팔을 크게 저으며 빠른 걸음으로 운동하는 주민들도 눈에 띈다. 하지만 낙산순성길 중간쯤 되는 ‘낙산공원’에 이르면 상황이 반전된다.

서울 야경을 보며 품은 생각들

낙산공원 한쪽 테두리를 지나는 성벽에는 凸 모양 구조물이 설치돼 있다. ‘여장’이라는 건데 사람들은 그 너머 야경을 보기 위해 까치발을 세운다. 아버지에게 목마 탄 아이는 여장 너머 야경을 보고는 “우와” 하며 감탄한다. 서로 바라보기 바쁜 연인은 가려진 야경에 개의치 않는다. 나 홀로 여장 사이 일정한 간격으로 벌어진 타구에 목을 내밀고 신세를 한탄한다. 그래도 야경은 아름답다.

성곽길을 따라 걷는 것은 ‘남산을 향하는 일’이다. 같은 야경을 보는 곳인데, 선망이라도 하듯 남산 타워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남산은 서울 야경의 꽃이다. 그곳에서는 도성 안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다. 서울의 야경을 찾는 사람들이 남산으로 향하지만, 그 자체로도 빼어난 풍경이 된다. 남산은 목멱산으로도 불렸다. 외산인 관악산 사이에 한강을 두고 있다. 배산임수의 내산으로, 한양 도성 안팎을 두루 살필 수 있는 명승지다. 낙산순성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다음 탐방지로 남산을 살피게 된다.

 
성곽길에는 오르내림이 있다. 내리막길은 여장이 낮아지는 구간인데, 성벽과 도심의 야경을 한번에 볼 수 있다. Ⓒ 이정헌

멀어질수록 초라해지는 성곽길

수도를 휘감는 성벽은 왕권의 안정성을 의미했다. 태조가 서둘러 도성을 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도성이 무너지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다시 세워졌다. 굳건한 성벽은 왕조의 흥망성쇠와 궤를 함께했다. 오늘날 성곽은 다르다. 관광과 여가를 위한 공간으로만 활용된다. 2.3Km 구간을 걷는 동안 살펴본 표지판의 내용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한양도성을 지켜주세요’ 그리고 ‘각자성석’. 콘텐츠가 없다. 산책로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중앙공원에서 거리가 멀어지면 닦이지 않은 성곽길을 걷게 된다. 내리막길은 옆구리가 터진 마대 자루가 계단을 이루고 있다. 길 위에 흩뿌려진 모래는 어수선하다. 누가 노상방뇨라도 한 걸까?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사람들 발길이 뜸해 흥인지문에 이르기까지 마주친 사람이 10명이 채 안 됐다. 발 디딜 틈 없던 낙산공원 성곽길과 대조된다.

   
▲ 낙산순성길 끝에 이르면 낮은 지대에 흥인지문이 나타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도성의 정동방과 서남쪽이 낮고 허하다고 했다. Ⓒ 이정헌

왜 이곳에 성곽을 세웠을까?

흥인지문이 지척인 성곽길 막바지에 이르렀다. 느티나무 아래서 갑자기 내리는 빗줄기를 피하며 성곽을 이곳에 세운 이유를 생각해봤다. 한양도성을 쌓기로 한 태조는 외성의 적절한 둘레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도읍을 찾느라 온통 진이 빠졌는데, 이번에는 성곽이 문제였다. 하루는 밤에 큰 눈이 내렸다. 오늘날 성곽의 바깥쪽은 눈이 쌓이는데, 안쪽은 눈이 녹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태조가 눈을 따라 성터를 정했다고 한다. <택리지>의 내용이다.

해는 동쪽에서 뜨며 햇볕을 내리쬔다. 당연히 낙산의 동쪽 산기슭은 아침에 눈이 녹았을 것이다. 반면 반대편 기슭은 그늘이 질 테니 눈이 녹았을 리 없다.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다. 태조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곳 낙산이 주산인 북악산의 좌청룡으로 명명된 것은 역시 풍수지리 덕분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사방을 둘러싼 산이 높으면, 지리상 좋지 않다고 했다. 낙산은 낮은 산세 덕분에 해가 너무 늦게 솟지 않고 너무 일찍 빠지지도 않는다. 두 구릉처럼 보이는 낙산 사이로 아침에 머리를 드는 태양이 한양의 중심을 곧장 비췄을 것이다. 태조는 내사산이 감싸는 신성한 한양과 그곳을 비추는 태양이 고개를 내미는 낙산 능선에 주목했던 것은 아닐까? 조선의 융성을 암시하듯, 매일 아침 낙산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궁궐을 비췄을 테니 말이다.


편집 : 권영지 기자

[이정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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