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집 재밌는 곳] 부산 황령산 봉수대 전망쉼터

1592년 5월 23일, 해 질 무렵, 부산 황령산 봉수대 봉수군 배돌이는 다급하게 산꼭대기로 뛰어 올라갔다. 바다를 내려다보니 적선들이 부산포를 향해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 1만8700명이 배 7백 척에 나눠 타고 부산포로 쳐들어온 것, 즉 7년을 끈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 부산시 남구 대연동 황령산 정상 부근에 있는 봉수대의 모습. 부산에서 가장 바닷가 가까이에 있는 이곳에 봉수대를 설치해 외적의 침입을 급히 조정에 보고했다. © 박서정

임진왜란 첫 보고 올린 황령산 봉수대

봉수군 배돌이는 바로 봉수대로 올라가 다섯 연대(煙臺) 중 네 곳에 불을 지펴 연기를 피웠다. 적이 침입하면 네 개의 연기나 횃불을 올리게 돼 있는 규정에 따라 조정으로 급보를 올린 것이다. 부산포 바닷가에 있는 황령산 봉우리에서 네 가닥 연기가 피어오르자 북쪽 동래에 있는 계명봉 봉수대로 급보가 전달됐다. 이십여 분 지나 계명봉 봉수대에서도 네 가닥 연기가 올랐고, 북쪽의 양산 원적산(지금 천성산) 봉수대로 전달됐다. 이렇게 발신된 적 침입 급보는 직봉로(直烽路)인 경북 영천∙의성∙안동의 봉수대를 거쳐 충주 등지를 지나 한성의 목멱산(木覓山, 지금 남산) 봉수대로 전달됐다.

황령산 봉수대와 함께 바다로 쳐들어오는 적을 발견해서 급보를 올리는 부산 서쪽 다대포 봉수대 등에서 한성의 목멱산까지 봉수가 전달되는 데는 열두시간 정도가 걸렸다. 부산포에서 한양까지 평균 30리(12km)마다 하나씩 모두 40여 개 봉수대를 거쳐 전달됐다고 하니 봉수대 한 곳에서 평균 18분쯤 걸린 셈이다. 전 봉수대에서 올라온 연기나 횃불을 보고 연대 아궁이에 불을 지펴 연기를 피우는 데 그만한 시간이 걸렸다.

▲ 부산 황령산 봉수대 전망쉼터 주차장에서 올려다본 황령산 정상 부근. 지금은 KBS와 MBC 전파송신탑이 옛 봉수대 구실을 대신한다. © 박서정

배돌이가 올린 봉화는 간봉로(間烽路)를 통해서도 전달됐다. 황령산 동쪽 해운대에 있는 간비오산 봉수대가 황령산 봉수대 신호를 받아 동해안의 기장∙울산∙영덕을 거쳐 안동·충주를 지나 한성의 목멱산으로 전달했다. 직봉로로 전달되는 보고가 중간에 끊어지는 사고 등에 대비해 별도로 보조 코스인 간봉로를 통해 한 번 더 급보를 올린 것이다. 목멱산에 도달한 ‘왜군침입’ 급보는 즉시 지금 국방부인 병조를 거쳐 대통령비서실 격인 승정원을 통해 선조에게 보고됐다. 부산 황령산과 다대포 봉수대에서 올린 급보가 왜군 침입 바로 다음 날 오전 조정에 알려진 것이다.

▲ 황령산 정상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금련산 정상에 올레KT 중계소가 서있다. 옛날 봉수대 구실을 통신중계탑이 대신하는 셈이다. © 박서정

조선 이전부터 왜구 침입 알리던 최전방 보루

황령산 봉수대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석성 봉수대, 간비오산 봉수대와 함께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세종 7년인 1425년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동쪽 해운대에 있는 간비오산 봉수대와 북쪽 범어사 동북쪽의 계명산 봉수대와 연락하였다고 한다.

봉수는 밤에는 횃불(烽, 봉)로, 낮에는 연기(燧, 수)로 적의 출몰과 침입 등 위급한 상황을  전달하는 군사 목적의 통신수단이었다. 낮에는 섭나무와 짐승의 똥 등을 태워 진한 연기를 나게 해 신호를 전달했고, 밤에는 횃불을 피워 올려 응급상황을 알렸다.

평상시에는 홰를 하루에 한 번 올려 별일이 없음을 알렸다. 조선 시대 한양 사람들은 통금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목멱산 봉수가 올라오면 하루가 무사히 지나갔음을 알고 잠자리에 들었다.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두 번 이상 홰를 올렸다. 왜적이 해상에 출몰하거나 적이 국경에 나타나면 연기나 횃불을 두 번 올렸다. 왜적이 해안에 가까이 접근하거나 적이 변경에 접근하면 세 번, 우리 병선과 접전을 하거나 국경을 침범하면 네 번 올리고 왜적이 상륙하거나 적이 국경을 침범했을 때는 다섯 번을 올렸다. 비가 오거나 안개나 구름이 끼어 전달이 제대로 안 될 때는 포를 쏘거나 뿔 나팔을 불고 징을 쳐서 알렸다.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는 봉수군이 말을 타고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서 위급상황을 전했다.

▲ 황령산 봉수대의 연대(煙臺, 왼쪽)와 연대 아래 있는 아궁이(오른쪽). 모두 다섯 개 연대와 아궁이가 있어 정해진 규정에 따라 필요한 수만큼 연대 아궁이에 불을 지펴 연기나 횃불을 올렸다. © 박서정

봉수대는 위치나 임무에 따라 경봉수(京烽燧)와 연변봉수(沿邊烽燧) 및 내지봉수(內地烽燧)로 구분했다. 경봉수는 서울에 있던 봉수로서 전국에서 올라오는 봉수가 최종 집결하는 목멱산 봉수대를 말한다. 연변봉수는 국경이나 해안의 최전선에 설치된 것으로, 적의 침입과 같은 위급상황을 경봉수대로 알리고 국경을 지키는 수비대 역할도 했다. 내지봉수는 연변봉수와 경봉수를 연결하는 내륙지방의 봉수로서 전국에 직봉과 간봉을 합쳐 623곳의 봉수대가 그물망처럼 연결돼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5개 직봉로가 있었다.

제1로는 함경도 경흥의 우암 봉수대서 출발 회령과 길주 북청 영흥 안변 철원을 거쳐서 양주 아차산 봉수대에서 목멱산 봉수대로 연결됐다. 제2로는 부산 다대포와 황령산에서 출발해 경주와 안동 충주 용인을 거쳐 성남의 천림산 봉수대에서 목멱산으로, 제3로는 평안도 강계의 여둔 봉수대에서 시작돼 의주와 정주 평양 개성을 거쳐 한성의 무악산 동 봉수대를 거쳐 목멱산으로 이어졌다. 제4로는 평안도 의주의 고정주 봉수대에서 출발해 서해안을 따라 순안 해주 연평도를 지나 한성의 무악산 서봉수대를 통해 목멱산 봉수대로 전달됐고, 제5로는 전남 순천의 돌산 봉수대에서 진도 해남 영광 공주 천안 안산 김포 강화를 지나 서울 개화산 봉수대를 거쳐 목멱산 봉수대로 연결됐다. 제1로에는 122개의 직봉 봉수대가 있었고, 제2로에 44개, 제3로에 79개, 제4로에 71개, 제5로에 61개의 직봉 봉수대가 있어 이들 봉수대를 거쳐 서울 목멱산 봉수대로 급보가 전달됐다.

이중 제1로와 3로, 4로는 북방 변경에서 몽골∙여진∙중국 등의 침입을 알리는 봉수였고, 제2로와 5로는 일본 왜구들의 침입을 알리는 것이었다. 당시 전국에 수백 개 봉수대가 설치돼 있어 저마다 아무 곳에서나 봉수를 올리면 어디서 위급상황이 발생했는지 알 수 없어 봉수 전달 코스를 명확하게 구분해 두었다. 봉수 전달 코스 중 한성 목멱산 봉수대 전달 직전 중계지가 중요했던 이유다. 경기도 양주의 아차산 봉수대에서 연기나 횃불이 오르면 함경도 경흥에 위급상황이 발생했음을 인지할 수 있었고, 성남 천림산 봉수대가 홰를 올리면 부산포에 왜구가 침입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악산 동 봉수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면 펑안도 강계에 적이 침입했다는 뜻이었고, 개화산 봉수대에서 봉수가 오르면 전남 순천에 왜구가 나타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 조선시대 국경지대에서 적 출현 등을 알리는 봉수가 전달되던 5대 직봉로(왼쪽). 오른쪽은 1660년대 후반의 봉수대를 표시해놓은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인데, 효종 때 북벌 계획의 일환으로 봉수대의 분포와 군사 자료 등을 수록했다. © 박서정

이런 봉수제도 아래서 황령산 봉수대는 일본 왜구나 왜적의 침입을 알리는 남해안 최전방 감시초소 겸 통신부대였다. 부산 서쪽 다대포 봉수대의 적 동향 보고를 구봉 봉수대를 통해 전달받아 직봉로인 계명산 봉수대와 간봉로인 간비오산 봉수대로 중계하는 부산 봉수망의 중심이었다.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황령산 봉수대는 동래부사가 직접 관장하면서 별장(別將) 10명과 감고(監考) 1명에 봉군(烽軍) 100명을 근무하게 했다.

지금은 방송∙통신 중계탑이 봉수대를 대체

봉수는 빛을 이용한 통신 방식이다. 따라서 봉수대는 사방이 트여 있으면서 높은 곳에 있어야 했다. 1894년 우리나라에 근대적인 전화 통신이 도입되면서 봉수대는 역사 속으로 퇴장하고 봉수대가 있던 자리에는 현대적 통신수단인 마이크로파 통신 시설이 들어섰다. 전자파 통신도 빛과 같이 직진하는 전파를 사용하기 때문에 신호를 보내는 쪽과 받는 쪽 사이에 장애물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전자파를 이용하는 통신 기지국이나 중계소는 옛날 봉수대가 설치돼 있던 곳에 세워진 경우가 많다. 황령산 봉수대 옆에도 KBS와 MBC의 전파송신탑이 서 있고, 황령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금련산 정상에는 올레KT 통신중계소가 있다.

▲ 황령산 정상에 있는 전망대. 이곳에 올라서면 사방이 툭 트여 부산 전역을 동서남북으로 모두 조망할 수 있다. © 박서정

사방이 탁 트인 곳에 들어선 봉수대는 주변 경관을 조망하는 데 최고 전망대가 될 수밖에 없다. 황령산 봉수대도 부산 전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전망 포인트다.

황령산 봉수대로 올라가는 길은 두세 가지가 있다. 부산 지하철 1호선 시청역에서 내려 4번이나 6번 출구로 나와 연제구 1번 버스를 타고 13개 정류장을 거쳐 물만골에서 내린다. 여기서부터 황령산 정상으로 연결된 도로를 따라 1.5km쯤 걸어 올라가면 황령산 봉수대 전망쉼터 주차장에 도착한다. 걸어 올라가는 것이 힘든 사람은 자기 차나 렌터카를 이용하면 되고, 시청역에서 택시를 타면 3.7km 정도로 택시비 5천 원 안팎이면 올라갈 수 있다. 주차장에서는 멀리 해운대와 광안리 앞바다와 부산항 일부만 보인다. 걸어서 황령산 정상까지 300m 정도 올라가면 봉수대 전망쉼터와 봉수대가 나온다. 올라가는 숲길을 따라 데크가 놓여 있고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한여름에도 뙤약볕을 피해 올라갈 수 있다.

광안대교 등 부산 명승지가 한눈에

 
황령산 정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광안대교와 주변 도심지 모습.(사진 위에서 첫번째와 두번째). 황령산 앞 금련산 등성이 너머로 해운대 신시가지 고층빌딩군과 누리마루 APEC 하우스가 보인다.©박서정

해발 427m의 황령산 정상 전망대에 오르면 부산 전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 눈을 돌리면 해운대 동백섬에 있는 누리마루 APEC 하우스와 해운대 신시가지 고층빌딩이 아슴푸레하게 보인다. 동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하얀색 광안대교가 그림처럼 펼쳐지고 오른쪽으로 이기대와 오륙도, 태종대 등 부산의 관광명소가 모두 눈에 들어온다.

남쪽으로는 부산항 대교가 아른아른하게 보이고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부산 구도심인 남포동과 광복동, 용두산공원이 아득하게 들어온다. 서남쪽으로는 다대포와 을숙도가 보이고 낙동강이 길게 아련히 보인다. 서쪽으로는 서면을 중심으로 부산의 금융 중심인 부산국제금융센터 건물이 눈에 들어오고 미군 하야리아 부대 터를 환수해서 조성한 부산 시민공원과 어린이대공원이 보인다.

부산은 산이 많은 항구도시라 황령산에 올라와 보면 산들이 멀리 아물아물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바로 앞에는 황령산보다 조금 낮은 해발 403m 금련산이 있고 금련산 정상 부근 도로변에는 구름고개 카페가 젊은 연인들을 끌어들인다. 북동쪽으로는 643m 장산이 해운대 신시가지를 앞자락으로 품고 태산처럼 버티고 서 있고, 북쪽으로 801m 금정산이 아득하게 보인다. 북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642m 백양산이 우뚝 솟아 있고, 바다 건너 영도에는 구름에 덮인 396m 봉래산이 눈길을 끈다.

 
황령산 정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부산 북항대교와 영도 봉래산. 그리고 하얀 줄기처럼 가느다랗게 보이는 낙동강. © 박서정
 
미군 후방 지원기지였던 하야리아 부대 터를 환수해 조성한 부산시민공원과 부근 도심지의 모습. 큰 빌딩 뒤로 보이는 녹지가 공원이다. © 박서정

황령산은 낮에 올라 부산 시내를 내려다보는 재미도 있지만, 밤에 올라오면 야경이 일품이다. 황령산 정상 쉼터 카페나 금련산 정상 근처 구름고개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감상하는 부산의 야경은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즐거움을 준다. 보통 도시의 야경은 시내 한가운데 있는 마천루나 고층빌딩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경관이라 아주 가깝고 손에 잡힐 듯한데 황령산 정상에서 보는 부산의 야경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만든다. 높은 산 정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심의 빌딩들이 뿜어내는 불빛을 보고 있노라면 꿈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기분이 든다. 밤에 데이트하는 젊은 연인들이 많이 찾는 이유다.

▲ 황령산 정상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부산의 야경. © 박서정

편집 : 박서정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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