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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는 왜 ‘유치한 성장 서사’에 빠질까
[미디어비평] 애니메이션 ‘달빛천사’
2020년 07월 23일 (목) 22:10:37 윤재영 PD yjy62155@gmail.com

<달빛천사>는 어린 소녀 루나가 가수로 성장하는 이야기다. 타네무라 아리나의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각색한 것이다. 2004년에 애니메이션 채널 투니버스를 통해 방송된 이후 지금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작년 이화여대 축제에서 <달빛천사>의 주인공 루나 역을 맡은 성우 이용신이 애니메이션 OST를 불렀다. 이후 이용신은 <달빛천사> 15주년 기념 OST 앨범을 발매하며 콘서트까지 열었다. 이 앨범은 발매를 위한 크라우드 펀딩에 사상 최고액인 26억 원을 모으며 화제가 됐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작년에는 <달빛천사>가 투니버스에 재편성됐다. 원작 만화책도 지난 1월 애장판으로 다시 출판됐다.

16년이 지나도 인기 있는 애니메이션

   
▲ 애니메이션 <달빛천사> 스페셜 DVD는 출판 크라우드 펀딩에서 1억7천만 원 이상을 모금했다. © 텀블벅

<달빛천사>가 사랑을 받는 데는 OST도 한몫했다. 그동안 TV 애니메이션 노래는 오프닝과 엔딩에 2개 정도 삽입됐지만, 주인공이 가수인 애니메이션이어서 삽입된 노래가 많다. ‘나의 마음을 담아’ '뉴 퓨쳐(New Future)' '마이 셀프(My Self)' '이터널 스노우(Eternal Snow)' '러브 크로니클(Love Chronicle)' '스마일(Smile)' 등 6곡이 소개됐다. 노래 가사를 통해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어서 애니메이션을 보는 데 더욱 몰입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에 담긴 성장 서사

<달빛천사>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영웅 스토리텔링 구조를 따르고 있다. 영웅서사는 주인공이 모험을 떠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온갖 고난을 겪지만, 결국 삶의 깊은 심연에 도달하면서 의미 있는 주체로 성장한다는 이야기다. 역경을 뚫고 나가는 과정에 조력자나 멘토의 도움은 필수다.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 루나는 12살 소녀로 가수를 꿈꾸지만, 목에 악성종양이 생겨 큰 목소리를 낼 수 없다. 타토와 멜로니라는 저승사자를 만나 자신이 1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듣는다. 죽음을 알게 된 루나는 가수가 되어 어릴 적 헤어진 에이치 오빠를 찾으려고 한다. 에이치와는 각자 자기 꿈에 다가간 뒤 다시 만나자고 약속한 사이다. 초자연적인 조력자 타토는 마법을 걸어 루나가 꿈을 이룰 수 있게 건강한 16살 소녀로 ‘변신’하도록 도와준다.

   
▲ 12세의 병약한 소녀 루나(왼쪽)는 저승사자의 도움으로 건강한 몸으로 변신한 뒤 16세가 되어 풀문(오른쪽)이라는 이름의 가수로 데뷔한다. © 투니버스

가수로 성장해가던 루나는 에이치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루나는 깊은 절망에 빠진다. 에이치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수가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타토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선 루나는 풀문으로 살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자신의 행복임을 깨닫는다. 루나는 오디션 대기실에서 다른 참가자로부터 “우승자가 이미 내정돼 있다”는 말을 듣는다. 망설이다가 결국 노래를 부르게 되고, 데뷔까지 한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달의 여신 루나에서 이름을 따와 풀문(보름달)이란 예명도 지었다. 첫 관문은 통과했지만, 가수 활동을 하면서 시련이 펼쳐진다. 악성 팬에게 괴롭힘도 당하고, 라이벌 가수 마도카의 음해를 받으며, 루나의 영혼을 회수하려고 하는 사신 이즈미를 만나기도 한다. 역경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주는 조력자 또는 멘토로 매니저와 의사가 등장한다. 호흡곤란으로 쓰러질 때는 사신 타토가 나타나 루나를 풀문으로 변신시켜 준다.

루나는 원래 1년 뒤에 죽을 운명이었지만, 16세 건강한 풀문의 모습으로 ‘변신’해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악성종양이 심각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수술을 받으면 노래를 못 부르게 될 줄 알았지만, 수술을 받고도 노래를 부를 정도로 회복된다. 1년의 모험 끝에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13살 루나는 그 이전 12살이던 자신보다 더욱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새로운 도전과 경험을 했기에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기 삶의 의미도 깨닫는다.

귀엽지만 유치하지 않은 캐릭터

주인공이 12세이고 어린이들이 보는 만화여서 그들이 좋아하는 요소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멜로니와 타토의 의상은 빨간색과 파란색 등 채도가 높고 선명한 색을 이용했다. 풀문의 머리색이나 이즈미의 의상도 선명한 노란색이다.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동물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것도 특징이다. 타토는 고양이, 멜로니는 토끼, 이즈미는 강아지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다.

   
▲ 멜로니(왼쪽)와 타토(오른쪽)는 각각 토끼와 고양이로 변신한다. © 투니버스

루나는 밝은 캐릭터이지만, 꽤 어두운 서사를 갖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고로 사망하고, 보육원에서 지내다가 10살이 지나서야 할머니와 살게 된다. 할머니는 루나가 좋아하는 음악을 경박하다며 가수가 되려는 꿈에 반대한다. 목에 악성종양이 생겨 수명도 1년 밖에 안 남은 상황이다. 죽는 것은 무섭지 않지만, 노래를 못 부르게 되는 건 무섭다고 말하는 아이다. 어린 나이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애늙은이 캐릭터다. 수명이 1년 남았지만, 꿈을 향해 도전하는 것이 헛된 노력일 거라고 좌절하지 않는다. 꿈을 향해 노력하는 설레는 마음을 갖고 있다.

루나는 니체의 ‘아모르파티’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운명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것을 받아들이고 적극 자신의 삶을 사는 모습이다. “운명은 모든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닥쳐오지만, 이에 묵묵히 따르는 것만으로는 창조성이 없다. 필연성을 긍정하고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서 전력을 다해 사랑할 때 비로소 인간성이 발휘된다.” 니체의 말이다. 루나는 자기 삶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꿈을 향해 나아가려고 애쓰면서 밝은 모습을 잃지 않는다. 루나가 노래를 부르는 이유, 삶과 죽음에 관해 고민하는 모습은 자연스레 시청자들에게도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90년대생 ‘어른이’들이 지금까지 <달빛천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유치한 그림 속에서 철학적인 질문이 담긴 서사가 있기 때문이다. 만화 원작자 타네무라는 <달빛천사>를 통해 ‘삶과 죽음, 그리고 그에 따른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런 주제는 루나가 부르는 노래에도 담겨있다. OST '러브 크로니클(Love Chronicle)'에는 루나가 에이치의 죽음을 알게 된 고통을 가사에 표현했다. 아직 좋아하기 때문에 ‘기억’이 ‘추억’으로 바뀌는 것을 미루고 싶은 마음을 담고 있다.

“내리는 비가 무거워 고개를 숙인 내 마음 한구석에

영원토록 그대가 남아 있겠죠.

그대의 마음 알아요. 하지만 서둘지 말아요.

애써 그대 모습을 잊고 싶지 않아요. 아직...”

2020년 <달빛천사>가 갖는 의미

<달빛천사>와 관련된 캐릭터 상품들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어릴 때 갖고 싶어 했지만 가지지 못했던 ‘어른이’들이 이제는 구매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단순히 물건을 수집하는 취미를 넘어, 어릴 적 순수했던 추억을 되돌아보고 싶어 하는 심리와 맞닿아 있다. 루나처럼 내 자신의 꿈에 올곧게 도전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하고, 순수하게 자기 꿈을 향해 나아가는 가수 풀문을 어느덧 동경하게 만든다.

<프로듀스 101>의 투표 조작 사건을 보면, 루나의 첫 오디션에서 경쟁자 마도카가 한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오늘 오디션에서 뽑힐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대. 이 오디션은 아침 뉴스나 와이드 쇼에서 대대적으로 다룰 거야. 그런 주목을 받으며 ‘몇 만명 중에서 뽑힌’ 사람은 그만큼 유명해지는 거지. 신인을 홍보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잖아.”

   
▲ <프로듀스 101>은 엠넷의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연습생 101명 중 팬들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11명이 아이돌로 데뷔하게 된다. 2016년 시즌1을 시작으로 2019년 시즌 4까지 진행했다. <프로듀스 101> 시리즈 투표 조작으로 구속된 제작진 2명은 지난 5월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 엠넷

80년대생에게 아이돌은 ‘이상’이었지만, 90년대생에게 아이돌은 ‘자기 표현’이다. <프로듀스 101>에서 시청자는 특정 가수 연습생에게 자신을 투사해 그를 지지하고 그가 점차 발전하는 모습을 응원한다. 경쟁사회에서 그가 스타로 성장하는 과정은 나의 ‘대리만족’을 넘어 ‘나 자신의 것’이 된다. 시청자는 ‘지지’를 넘어 그를 ‘키우는’ 일에 적극 개입하려 든다. 팬덤이 형성되는 심리이자 과정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온 이들은 신분·재력과 관계없는 공정한 경쟁 시스템을 원했지만, 배신당했고 꿈은 좌절되었다.

자기 꿈을 순수하게 좇던 90년대생 ‘루나들’에게 현실은 가혹하다. 애니메이션 속 루나처럼 노래 실력으로 오디션에 뽑히고 데뷔를 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회는 정의롭지 않다. 명문 사학 부정 입학, 공공기관 채용 비리, 입찰 비리 등은 그 반증이다. 만화 속 루나가 역경 속에서도 살아가는 이유는 가수가 되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삶의 의미였기 때문이다. 90년대생 ‘루나들’도 그러하다. 삶의 의미, 꿈을 짓밟지 않는 공정성을 다시 믿어도 될까?

 

[윤재영 PD]
단비뉴스 미디어콘텐츠부장, 환경부, 시사현안팀 윤재영입니다.
연약한 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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