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 장은미 기자

한 지상파 예능프로그램에서 ‘재벌3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흔쾌히 ‘못난이 감자’ 30톤을 사들이면서 “안 팔리면 제가 먹죠”라는 여유까지 보였다. 이틀 뒤, 전국의 이마트에서 900g당 780원에 판매한 감자는 2일 만에 전부 팔렸다. 지난해 12월 13일 네이버 포털 사이트의 경제면에서 많이 본 기사 12개 중 7개가 이 내용으로 도배됐다. 기사들은 정용진 신세계백화점 부회장의 ‘키다리 아저씨’ 면모를 강조하며 칭송했다. 수 천 개의 댓글도 앞다퉈 그를 칭찬했다. 다음 날에는 그가 감자옹심이를 만들었다는 SNS 내용이 많이 본 기사에 올랐다. 그가 일상적 모습을 올리는 개인 SNS도 비슷한 분위기다. 댓글들에 따르면 그는 ‘멋있고 카리스마 있고, 사려 깊은’ 사람이다.

지난해 12월 20일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137만원짜리 점퍼가 완판 조짐’이라는 기사가 많은 주목을 받았다. 전날 그의 개인 일정이 보도된 영향도 컸지만,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서 그의 옷차림이 활발히 공유됐기 때문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때 청문회에 등장해 입을 가리고 슬쩍 바른 그의 립밤 역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이재용은 연예인 지드래곤의 조합인 ‘재드래곤’으로 불리며, 선망어린 시선을 받는다. 지난 13일 <뉴스타파>는 그가 프로포폴을 상습 투약했다고 보도했는데 그런 어두운 측면은 오래 가지 않는다. 아버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쁘띠거니’로, 친근한 이미지를 쌓았다. 그는 몇 년 전까지 ‘재벌총수 선호도’ 1위를 차지했다. 재벌을 향한 시선은 이렇게 우호적이고 따뜻하다. 그들의 삶을 동경하고, 닮고 싶은 욕망이 묻어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이들에게 이토록 우호적일까? 우선 언론이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 2017년 8월 <시사IN>은 일명 ‘장충기 문자’를 통해 삼성그룹이 기자들을 관리하는 실태를 폭로했다. 주요 언론사 간부들은 삼성 그룹에서 비싼 와인을 받거나, 삼성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도울 방법을 모색하며 협조했다. 언론을 통제하던 독재 정치의 권력이 사라진 자리에 경제권력이 등장했다. 교묘한 경제 권력은 언론을 자발적으로 굴종시켰다. 삼성그룹 법무팀에서 일한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는 출간 당시 언론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다. <미디어오늘>은 당시 기사를 통해 “국내 최대 광고주의 보복성 광고 중단 방침에 <한겨레><경향>마저도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은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고 했다. 경제권력에 관한 한 '좋은 뉴스는 크게, 나쁜 뉴스는 작게'라는 법칙을 언론이 충실히 따른 결과다.

▲ 지난 13일 <뉴스타파>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향정신성 수면마취제인 프로포폴을 상습 투약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언론들은 삼성 측의 주장을 큰 제목으로 뽑거나 최소한의 보도만을 하는 등 축소 보도 의혹을 받고 있다. 누리꾼들도 근거 미흡 등을 들면서 이재용 부회장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 뉴스타파

경제민주주의 실현이 요원한 법과 제도도 문제다. 2007년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그룹 경영권 불법 승계 폭로를 하면서 삼성이 검찰 등 사법부를 관리하고 있음을 밝혔다. 하지만 2009년 이건희 회장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조세 포탈 혐의 역시 집행유예에 그쳤다. 2013년 정의당 심상정 의원의 폭로로 시작된 삼성의 노조 와해는 수사가 이뤄진 지 6년 만에 겨우 판결이 났다. 재판부는 삼성이 노조 운영에 개입해 노조를 방해한 적극적 행위를 ‘유죄’로 판단했다. 헌법에 명시된 노동권을 무시하고 선대가 남긴 ‘무노조경영’ 유언을 삼성은 3대에 걸쳐 금과옥조로 지켜왔다. 노동부는 제대로 관리감독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삼성은 재계 1위 기업으로, 대학생들이 가장 가고 싶은 기업으로 꼽힌다.

우리사회에 만연한 천민자본주의도 재벌에 대한 존경심을 높인다. 독일 사회학자 베버는 고리대금업과 같은 자본의 운영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태도를 비판했다. 노동이 아닌, 돈이 돈을 버는 시대다. ‘금수저’로 태어나거나, 부동산 투기와 같은 불로소득이 아니면 이 사회에서 ‘돈 자랑’ 하기는 어렵다. 노동의 가치는 폄하된다. 믿을 만한 것은 돈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심지어 돈을 버는 방법이 탈법적이어도 상관없다는 식이다. 법률소비자연맹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10억을 주면 교도소에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둘 중 하나가 ‘그렇다’고 답했다.

정용진이 재벌 3세가 아니라, 그저 전문경영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전화 한 통으로 흔쾌히 감자를 사주는 ‘키다리아저씨’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용진이 추진했던 ‘삐에로 쇼핑’과 H&B스토어 ‘부츠’는 폐점 또는 축소될 예정이다. ‘정용진 소주’로 불리던 ‘푸른밤’도 2018년 127억 원 영업 손실을 기록했다. 2012년 이재용이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하자 시민단체 경제개혁연대는 그의 업무 능력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과거 벤처붐이 일었을 때, 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인터넷 사업에 뛰어들었다. 14개 관련 기업의 실질적 책임자였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다. 당시 삼성계열사들은 이재용의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주식을 30%정도 ‘비싸게’ 매입했다. 이것이 시장주의자들이 외치던 자본주의 논리인가? 언론은 경제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할 말을 하지 못한다. 법과 제도는 그들의 반시장적 행위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연대 대신 그들의 품에 안기고 싶어하는 것 같다. 마냥 부자를 우러러 보는 사회에선 병든 자본주의를 고치려는 어떤 처방도 효력이 없다.


편집 : 장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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