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대 위기와 혁신] ⑪ 사회참여에도 차별의 시선

“서울대는 조국의 학교라서, 고려대는 조국 딸의 학교라서, 부산대는 조국 딸이 입학한 의학전문대학원(의전원)이라서 재학생들이 (촛불시위와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전남지역 국립대 신문방송학과 졸업반인 김원기(25‧가명)씨는 조국 전 법무장관의 딸이 ‘금수저’ 배경을 활용해 명문대에 진학했다고 해서 벌어진 최근 논란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방대생 입장에서는 ‘스카이(서울‧고려‧연세대)’ ‘의전원’ 등 엘리트 교육기관 입시를 위해 논문‧인턴과 같은 고급 ‘스펙(세부조건)’을 쌓는 일이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린다는 것이다.

명문대생이 외치는 ‘공정’ 지방대생은 ‘먼 나라 얘기’

▲ 지난 8월 서울대 재학생들이 교내 광장에서 조국 당시 법무장관 후보자의 사퇴를 촉구하며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 Ⓒ JTBC 뉴스

그는 “주변을 보면 지난 박근혜 탄핵 촛불시위 때는 짧은 시간이라도 참여하는 학생이 많았지만, 조국 논란에 대해서는 깊이 알지 못하거나 관심 없는 학생이 많다”며 “명문대와 전문직 진입을 대상으로 논의되는 공정과 정의가 우리와 별로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지난 8월 28일 조국 전 장관 딸의 ‘인턴 후 논문 제1저자 등록’ ‘유급 이후 장학금 수령’ 등 의혹에 문제를 제기하는 촛불집회를 열면서, 외부 세력의 개입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학생증과 졸업증명서를 통해 신원을 확인했다. 그러자 ‘서울대 구성원이 아니면 집회에도 참가할 수 없는 거냐’는 비판이 대자보 등을 통해 제기되기도 했다.

충북지역 국립대 언론정보학과 4학년 이형민(25‧가명)씨는 조국 사태와 관련 “개인의 노력만으로 모든 걸 극복하라고 하는 사회도 원망스러웠지만, 노력을 쏟아 부어도 ‘사다리 오르기’가 불가능한 사회의 진짜 모습을 본 것 같아 속상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사회를 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습관화한 무기력 같은 게 있어 쉽지 않다”며 “우리 같은 지방대생의 목소리에 권위가 실릴 거라는 자신도 없다”고 덧붙였다.

이씨의 말처럼 지방대생 다수는 민주시민으로서 정치‧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데도 차별과 소외를 느낀다. 사회 공론장에서 주된 논의가 지식과 학벌 자원을 가진 명문대 출신 중심으로 이뤄지고, 지방대 출신의 요구와 의견은 밀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이 시국선언 돼 있는데, 무슨...” 악성 댓글

2016년 말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 때 지방대생들의 시국선언이 폄하 당한 일이 대표적 사례다. 그해 11월 충청권 사립대의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있다는 인터넷 기사에는 “지잡대(지방의 잡스런 대학)는 좀 조용하자” “잡대는 자기 인생이 시국선언 돼있는데 무슨...” “시국선언이 뭔지나 아나” 등 악성 댓글 수백개가 달렸다. 그러자 기사에 거론된 대학의 재학생은 교내 익명 페이스북 페이지에 “(댓글을 읽고) 끝없이 커져가는 자괴감은 무거운 족쇄가 되었다”고 탄식했다.

“지방대는, 아니 지잡대는 시국선언을 하지 말랍니다...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관심 받으려고 하지 말랍니다. 허탈했습니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났고 다른 사람의 시선이 두려워졌습니다. 조용히, 숨어 있던 의심이 커져갔습니다. 그래도 공부를 한 애들이 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건가?”

▲ 2016년 말 국정농단 사태 당시 지방대 학생들이 시국선언을 했다는 기사에 악성댓글이 달리자 해당 대학의 학생이 페이스북에 긴 글을 올려 심경을 토로했다. Ⓒ 페이스북

해당 학교 사회계열 재학생으로 시국선언을 주도한 김수형(28‧가명)씨는 “당시 전국 대학생들의 참여가 (탄핵 정국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명문대와 지방대의 목소리가 사회에 다르게 전달된 것은 사실”이라며 “시국 선언의 내용보다 지방대가 사회적 목소리를 냈다는 일이 더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아쉬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실제로 언론의 관심도 명문대 학생들에게 집중됐다. <오마이뉴스>가 2016년 10월과 11월 시국선언을 한 전국 115개 대학을 대상으로 특정 포털사이트 제휴매체의 언론보도 현황을 분석한 결과, 3653건의 뉴스 중 상위권 10개 대학에 대한 보도가 54%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4년제 대학은 모두 220개다.

부산 동명대 이정민(22) 신문방송국장은 “청년이나 대학생 이슈에 대해 지방대 학생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언론에서 별로 관심을 두는 것 같지 않다”며 “서울지역 대학생의 목소리가 대부분인 기사들을 볼 때마다 ‘왜 우리 지방에 있는 학생들에게는 질문을 안 하지?’라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총학생회, 교내언론 등 공론장도 부족한 지방대

지방대에는 총학생회, 정당 청년조직 등 학내나 사회 문제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도 미비한 경우가 많다. 대구의 한 사립대에 다니며 2015~16년 더불어민주당 지역 대학생위원장으로 활동한 박찬승(25)씨는 “대학생 정당 활동도 주로 서울 중심으로 이뤄지고 중요한 행사나 포럼, 회의 대부분이 서울에서 개최돼 지방대 학생들은 많은 불편을 겪는다”고 말했다. 그는 “정당 내에서도 학벌주의가 작용해 의원이나 당직자들이 지방대 학생보다는 서울지역 대학 출신을 더 신뢰하고 좋게 본다는 느낌을 은연중에 받은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 지난달 4일 충북지역 한 사립대에서 총학생회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학생들. Ⓒ 임형준

전남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이수형(25‧가명)씨는 “단과대 학생회는 투표율을 채우지 못해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운영된 지 오래됐고 총학생회도 학생들의 소극적 참여로 대표성을 잃었다”며 “함께 목소리를 낼 조직이 없으니 정치사회, 학내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생은 매우 드물다”고 말했다. 충북의 한 사립대에서 10년 전 총학 임원으로 활동했고 지금도 학생회 후배들과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는 이지영(35‧가명)씨는 “역대 총학이 연고에 따라 단일 후보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대학 교직원과 동문, 친인척으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아 학생들의 다양한 의견을 제대로 수렴할 만큼 체계를 갖추지 못했던 게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학내 언론도 마찬가지다. 최근 서울, 지방할 것 없이 대학신문과 교지 등 학내 언론이 취약한 상황인 것을 감안해도 지방대의 사정은 특히 더 어렵다. 학교 당국에서 인력과 자금을 지원해 주지 않아 아예 교내 언론을 갖추지 못한 경우도 많다. 교내 지원금 축소나 편집권 침해에 대항한 학생들의 언론 운동도 서울 등 수도권에 비해 드물다. 서울대의 ‘스누라이프’, 고려대의 ‘고파스’처럼 학생들이 온라인에서 자유롭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대학 커뮤니티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최근에는 익명 페이스북 페이지 ‘대나무숲’이나 대학 커뮤니티 앱 ‘에브리타임’ 등이 사용되고 있지만 체계적인 공론장 역할을 하기에는 부족하다.

정현진(21) 창원대신문 편집국장은 “교내 언론이 침체돼 있다 보니 학생들도 언론 활동에 별로 관심이 없고,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 교내 언론사를 이용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부산 한 사립대 신문방송국장 진대식(22‧가명)씨는 “서울의 유명한 학교들은 교내 인터넷 커뮤니티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SNS, 에브리타임도 활성화돼 있지만, 우리 학교는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도 게시글 수와 댓글 수, ‘좋아요’(SNS 공감 표시), 공유 횟수가 많이 저조한 편”이라고 말했다.

부산지역 사립대 신문방송학과 학회장으로 활동했던 취업준비생 왕범준(28‧가명)씨는 “지방대생 스스로도 인터넷 공간에서 마음껏 의견을 펼치기에 말솜씨와 필력이 부족하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명문대에도 글을 잘 쓰는 사람, 못 쓰는 사람이 있고, 지방대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명문대 학생이 잘 쓴 글을 보면 ‘역시 그 대학 학생은 모두 이렇게 잘 쓸 거야’라는 선입견을 갖게 되고, 지방대생이 서툴게 쓴 글을 보면 ‘이래서 지방대 소리를 듣는 거야’라는 편견을 갖게 돼요. 글쓰기 능력은 개인의 차이인데...”

▲ 고려대 온라인 커뮤니티 ‘고파스’(좌)와 대구지역 사립대 커뮤니티앱 ‘에브리타임’(우)의 자유게시판 화면. 서울 상위권 대학은 대부분 학생들이 활발하게 참여하는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지만, 지방대는 페이스북 페이지나 모바일앱에서 제한적으로 공론 활동을 펼치는 경우가 많다. Ⓒ 임지윤

“민주시민교육으로 시민적 자존감 길러야”

학벌이 민주시민의 자격과 역할까지 침해하는 현상이 한국에 유독 심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민교육이 희망이다(2017)>의 저자 장은주(55) 영산대 성심교양대학 교수는 우리나라가 ‘잘못된 능력주의 속에서 시민적 자존감을 잃어버린 사회’라고 진단한다. 그는 지난 10월 24일 <단비뉴스> 전화인터뷰에서 “능력지상주의는 능력 있는 승자만 존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대접하면서 그렇지 않은 절대 다수의 패자는 ‘2등 시민’으로 격하시킨다”며 “이 때문에 많은 지방대 출신이 자존감을 상실하고 사회정치적 무기력에 빠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 과도한 능력주의를 부추기는 교육을 지양하고 미래 세대가 충분한 시민적 자존감을 갖추도록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은주 교수. Ⓒ 장은주

"우리 사회는 명문대를 다니지 않거나 좋은 성적을 보여주지 못한 사람에게 ‘너는 우리 사회 에서 제대로 인정받고 존중받으며 살아갈 위치에 있지 못하다’는 인식을 보냅니다. 이에 따라 지방대생은 크게 자존감을 상실하고 일상적인 삶뿐 아니라 사회정치적인 분야에서도 무기력감을 갖게 됩니다. 이는 많은 지방대생들이 사회 정의, 공정 관련 문제에 대해 ‘나의 문제’로 느끼질 못하고,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 당당한 주체로 나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장 교수는 “학생들이 어린 시절부터 민주시민이라는 자각을 갖고 사회에 대한 책임과 참여를 일상화하면서 시민적 자존감을 높일 수 있도록 돕는 체계적 교육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임미리(51)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도 같은 날 전화인터뷰에서 “과거 역사를 보아도 늘 명문 교육기관 출신의 엘리트들이 역사를 기록했고 그 사회 지배적 집단의 사고가 공론장에 영향을 미쳤다”며 “현재 한국 사회에서도 소수 명문대 출신이 언론과 학문 영역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공론장에서 명문대 출신의 의견이 주목받고 지방대는 소외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 임미리 고려대 교수는 지방대생이 스스로 공론장에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는 한편 언론이 자신들의 의견을 대변하도록 적극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임미리

교수는 또 “지방대생이 사회와 교육 변화를 위해 스스로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내고 계속해서 자신을 대변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시에 언론이 사회 전체의 공정과 정의를 얘기할 때 실제 지방대 출신이 이 사안을 보는 관점을 담을 수 있도록 지방대생의 목소리를 실어달라고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영국의 옥스퍼드, 케임브리지와 미국의 하버드 등 선진국 명문대학은 대부분 수도가 아닌 지방의 작은 도시에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지방에 있는 대학을 교육의 품질과 상관없이 ‘지잡대’ 등으로 싸잡아 부르며 멸시하고 차별하는 풍토가 심하다. 지방대생들이 편입 등을 통해 서울로 ‘탈출’하는 행렬도 끊이지 않는다. 저출산 추세로 학생 수가 점점 줄면서 지방대 중 상당수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것이란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 세명대 저널리즘연구소와 <단비뉴스>는 심층기획 ‘지방대 위기와 혁신’을 통해 서울 중심의 불균형 발전과 왜곡된 학력 경쟁 등이 낳은 지방대 소외의 실상을 조명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편집자)

편집 : 양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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