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대 위기와 혁신] ⑨ 악순환 낳는 문화 격차

경북 구미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박혜은(23·성균관대 글로벌경영)씨는 학교 수업 틈틈이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긴다. ‘그냥 재밌어 보여서’ 무용학원에서 ‘걸스 힙합 댄스’를 배우고, 카페에서 여는 일일 요리강좌에도 가본다. 고향 친구들이 서울로 놀러오면 관광 안내원을 자처해 ‘요즘 뜨고 있는’ 맛집과 카페 순례에 앞장선다. 박씨는 “서울에는 다양한 콘텐츠의 소극장 연극이 많고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화제가 되는 맛집이나 카페들을 쉽게 찾아갈 수 있어서 고향 친구들이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지방대생들이 날 잡아 상경하는 이유는

▲ 소극장 연극과 음악 공연 등이 다채롭게 열리는 서울 혜화역 부근 대학로. 지방대생들이 문화 탐험을 위해 찾는 ‘젊은이의 거리’ 중 하나다. ⓒ 장은미

박씨의 친구들처럼 지방의 문화적 인프라(기반)에 결핍감을 느끼고 애써 서울을 찾는 지방대생들이 적지 않다. 경남 창원의 경남대에 다니는 배지한(23·미디어커뮤니케이션)씨는 “여기선 친구들과 술 먹거나 카페 가는 정도가 전부인데 서울엔 다양한 문화 활동이 많아 방학마다 서울에 간다”고 말했다. 그는 마포구 홍대 거리에서 버스킹(거리 음악공연)을 감상하고 옷가게에 들러 최신 유행을 파악하는 것 등을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같은 학교 홍성혁(24·전기공학)씨는 독립서점이나 전시회를 찾아 1년에 두세 번 정도 서울에 간다고 밝혔다. 그는 “책을 통해 타인의 상상력과 생각을 엿보는 것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에 서울에 가면 대형서점과 독립서점들을 두루 찾고 서점에서 열리는 부대행사에도 참여한다”며 자신의 학교 부근과 마산 시내를 통틀어 이렇다 할 서점이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러 종종 서울에 간다는 박성일(23·경남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씨는 “인디가수 위수와 박재범 콘서트 등을 다녀왔는데 뭐라 표현하기 힘든 ‘힐링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그는 “버스를 타고 왕복 8시간씩 걸려 서울을 오가야 하는 게 힘들지만 부산과 대구 등 광역시에서도 가보고 싶은 공연이 연간 1번 정도밖에 없어 감내한다”고 덧붙였다.

복합 문화공간 독립서점, ‘서울 185 울산 2’

독립서점은 개인이 운영하는 책가게로, 일반적 출판과정을 거치지 않은 개성 있는 저작물도 판매하고 독서모임, 북토크, 낭독회 등을 열면서 복합문화공간으로 부상하고 있다. 독립서점 안내 사이트인 퍼니플랜에 따르면 2018년 12월 기준 전국의 독립서점은 416곳인데 이 중 서울이 185곳으로 약 44%를 차지했다.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2017년 서울인구는 976만명으로 전체인구의 약 19%지만, 독립서점은 절반 가까이가 서울에 몰려 있는 셈이다. 반면 인구 115만명인 울산시와 26만명인 세종시에는 독립서점이 각각 2곳, 1곳밖에 없다.

▲ 독립서점 정보 사이트인 퍼니플랜에 따르면 국내 인구의 약 19%가 사는 서울에 복합문화공간인 독립서점의 44%가 몰려 있다. ⓒ 권영지

다양한 예술영화를 상영하기 때문에 ‘수준 높은 문화공간’으로 꼽히는 독립영화관도 상황이 비슷하다.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서 제공하는 전용상영관 현황(멀티플렉스의 독립영화상영관 표함)에 따르면 독립영화관은 전국 57곳 중 서울이 25개로 절반에 가깝고, 부산과 경기도가 각 7곳, 인천과 대구가 각 3곳이 있다. 이어 경북, 광주, 대전, 충남은 각 2곳, 강원, 경남, 전북, 충북은 각 1곳에 불과하다. 독립영화관은 단일 상영관이라 하루에 상영할 수 있는 영화의 수가 제한적이다. 25곳에서 상영하는 영화 중 선택해서 볼 수 있는 서울과 1곳밖에 없는 지방의 선택권에는 큰 차이가 있다.

대학생들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길거리공연의 지역별 격차를 알아보기 위해 사진과 동영상을 주로 공유하는 인스타그램에서 버스킹 공연 해시태그(#)를 검색했다. ‘#홍대버스킹’은 8만2천여개 이상의 게시물이 나왔으나 ‘#부산버스킹’과 ‘#대구버스킹’은 각각 1천개 내외에 그쳤다. 지역의 대표적 버스킹 장소인 부산 광안리와 대구 동성로 등을 해시태그 검색하니 각각 100개로 뚝 떨어졌다.

문화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발간하는 ‘문예연감’의 17개 시도별 공연 및 전시 활동 집계를 보면 2017년 총 3만7227건 중 서울이 1만3217건으로 3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 다음으로는 경기 지역이 4025건이었다. 문예연감은 “서울 및 경기 지역 중심으로 문화 예술의 상당 부분이 발생하며 이 같은 현상은 모든 장르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연감에 따르면 국내 문화예술 활동의 상당부분이 서울과 경기, 인천 등 수도권에 집중된다. ⓒ 박선영

‘홍대·신촌·혜화’ 활기와 대조적인 지방 대학가

서울 홍대와 신촌 등 대학가에서는 정해진 무대 없이 공연자와 관객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버스킹 공연이 수시로 열린다. 혜화역을 중심으로 반경 1킬로미터(km) 안에 소극장 150여개가 몰린 대학로는 공연문화의 집결지다. 이런 환경은 서울에 사는 대학생들이 경제적, 시간적으로 유리한 환경에서 문화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

▲ 지난 16일 늦은 밤에도 홍대 거리는 많은 젊은이들로 붐볐다. 자유롭게 둘러앉아 길거리 공연을 감상하는 청년들. ⓒ 장은미

서울의 한 대학에서 연극영화를 전공하는 여학생(20)은 “매 주말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공연을 보러 다닌다”며 “세부전공을 뭘 할지 고민 중인데 공연을 보러 다니며 천천히 정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기획전시 관람을 자주 다닌다는 최동천(26·고려대 생명과학)씨는 “홍대 가까이 살면 쉽게 최신 유행 패션과 버스킹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것처럼 서울에 살면 (전반적으로) 문화접근성이 좋은 것 같다”며 “여러 문화적 영역을 다양하고 폭넓게 접한 경험은 앞으로 일을 할 때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면 지방대생들은 빈약한 문화 인프라 때문에 당장 여가생활에도 결핍을 느끼고, 향후 취업 등에도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란 불안을 느끼고 있다.

지난달 22일 이른 저녁 대구시 북구 경북대 북문 주변. ‘젊음의 거리’라는 알림판이 무색하게 한산했다. 방학 중이라 오가는 학생 수가 줄기도 했지만 술집, 식당, 카페 등 요식업소 외에 이렇다 할 문화공간이 눈에 띄지 않았다. 인근의 영진전문대에서 경영회계서비스를 전공하는 이성은(20) 씨는 “여가 시간에 친구들과 카페 다니는 것 외에 딱히 문화생활이 없다”고 말했다.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한 경북대생(29)은 “일 때문에 서울에 있다가 졸업을 위해 내려왔는데 서울에 있다오니 새삼 ‘우리 학교 앞에 뭐가 없네’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 대구 경북대 북문 부근의 ‘젊음의 거리’. 이름과 달리 이렇다 할 청년문화 활동이 눈에 띄지 않고 식당, 카페, 술집 등 ‘먹고 마시는’ 가게의 간판들이 두드러져 보였다. ⓒ 장은미

음악 공연에 관심이 많다는 민수빈(22·가명·경북대 생명공학)씨는 문화생활을 위해 서울 등 수도권까지 가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민씨는 “최근 (영국 가수) 에드 시런 내한공연을 보러 인천 송도에 가고 싶었는데 교통비와 숙박비가 엄청나 포기했다”며 “가까운 곳에서 다양한 공연을 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창원대 문경록(24·국제관계학)씨는 “지역에선 할 수 있는 게 밥 먹고 카페 가거나 만화방, 피씨(PC)방 가는 정도인 것 같다”며 “서울에는 전통과 현대가 결합한 분위기 속에 다양한 문화 활동이 가능한 테마 공간들이 있는데 지방에서는 그런 곳을 찾기 힘들다”고도 아쉬워했다.

‘지역에서 문화하기’의 어려움 심각

지역에서도 열심히 문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상당수가 ‘살아남기의 어려움’을 호소한다. 서울 등에 비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북 전주에서 공연예술 전문단체 ‘용’을 운영하는 홍성용(34) 대표는 지난달 21일 <단비뉴스> 전화인터뷰에서 지방에서 배우를 구하고 공연 수익을 내는 것이 힘들다고 호소했다.

“지방에서 연극 전공을 했더라도 서울로 가려는 친구들이 많아서 배우 구하기도 힘들어요. 최근 배우 5명이 나오는 공연을 했는데 작품 제작에 3천만원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관객이 500명 왔어요. 티켓값이 2만원이니 공연을 해도 마이너스였던 거죠.”

대구의 예술전용관 동성아트홀의 이인호(46) 매니저는 지난달 23일 <단비뉴스> 인터뷰에서 “몇 년 전 박근혜 정부블랙리스트에 올라 자금난을 겪다가 부도처리가 돼 일시 폐관됐다가 지금의 대표님이 인수했다”며 “살아남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정부나 지자체가 지역 문화를 지키겠다는 의지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 지난달 15일 부산시 금정구 부산대 부근 거리 풍경. 식당, 카페, PC방 등으로 빼곡하고 이렇다 할 문화시설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 권영지

어느 나라든 수도와 지방에 어느 정도 문화 격차는 있지만 ‘국토 불균형 발전’이 심각한 우리나라는 그 정도가 특별히 심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선진국일수록 지방분권의 진전, 지방자치단체의 강력한 지원정책 등으로 수도와 지방, 대도시와 소도시의 문화격차가 크지 않다.

영국 수도 런던에서 자동차로 3시간 40분쯤 걸리는 웨스트요크셔주의 리즈는 인구 77만명의 중소도시다. 여행지 정보를 제공하는 트립어드바이저(tripadvisor)에 따르면 리즈대학교 주변에는 극장 9곳, 전문박물관 8곳, 공연장 35곳, 전시장 22곳 등이 있고 주민과 대학생들의 문화활동이 활발하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영국은 런던 이외 지역에 문화발전기금을 집중 투자해 지역 재생과 박물관, 미술관 건립 등을 지원한다. 지역 간 균형발전을 도모한다는 취지다.

동성아트홀 이인호 매니저는 “문화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개인화하는 사회에서 공동체성 회복에 도움을 준다”며 “문화강국이 진짜 선진국”이라고 말했다.

문화 빈곤과 ‘떠나는 발길’의 악순환을 막으려면

빈곤한 문화 인프라는 청년들을 지역에서 떠나게 만들고, 지방대학의 가치를 더 떨어뜨리는 악순환 요인 중 하나다. 경남발전연구원이 2017년 발표한 <경상남도 청년 실태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의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5년 이내 경남을 떠나겠다’고 밝힌 사람이 응답자의 33.4%였고, 이유는 일자리(43.5%)가 1위, 문화 수준(28.5%)이 2위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경제성장 측면에서 국토 균형발전 전략과 함께 세심한 문화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문화평론가인 성북문화재단 권경우(49) 문화사업부장은 지난달 24일 <단비뉴스> 전화인터뷰에서 “지자체와 대학이 협력해서 청년들이 졸업 후에도 지역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데 앞장서야 한다”며 “공장을 짓는 산업도 중요하지만 지역사회에서 큰돈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 결국 문화”라고 말했다. 그는 “지자체가 지금처럼 '이상한 축제'에 돈을 쏟기보다 오랫동안 가능한 ‘청년‧문화‧예술’ 키워드를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드웨어 보다 훨씬 중요한 게 사람이에요. 지역 대학 전문가나 지역 활동 예술가나 기획자,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 전문가들 이런 사람들을 잘 찾아서 논의 테이블을 만들고, 역할과 권한을 위임해주는 과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장기적인 실행과 정착이 가능하겠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지역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서로의 짐을 덜면서 같이 가는 것, 그런 네트워크를 만들어 나가는 게 해결의 열쇠죠.”

▲ 권경우 문화평론가는 지자체가 ‘이상한 축제’에 돈을 쓰는 대신 지속가능한 ‘청년‧문화‧예술’ 키워드를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권경우

권 부장은 또 지역 청년들이 특정한 문화현상에 휩쓸려가기보다 주체적으로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입장에 섰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덧붙였다. 그는 “홍대도 좋지만 내가 사는 곳을 도외시하고 다른 곳만 선망하고 추구하면 문제가 된다”며 “지역에서 본인들이 직접 문화를 생산하는 경험을 해야 결국 문화도 (지방이 서울에 종속되지 않고) 민주화될 수 있고 다양성이 생길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토연구원이 2014년 발표한 <지역 간 문화격차 해소방안 보고서>에 참여한 국토환경‧자원연구본부 박태선(55) 선임연구위원은 지난달 22일 <단비뉴스> 전화인터뷰에서 “인접한 A, B, C라는 지역이 있다고 할 때 어떤 시설을 각각 만들기보다는 이용 빈도와 거리, 편의시설 연계 등을 고려해 적절한 곳에 지역 공동의 복합문화시설을 만들고, 각 지역별 특성을 고려한 문화시설 네트워크 구축 등을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자체에서 지역주민들이 원하는 문화 활동과 콘텐츠를 파악하는 동시에 양적인 시설뿐만 아니라 문화의 질적 수준도 유지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영국의 옥스퍼드, 케임브리지와 미국의 하버드 등 선진국 명문대학은 대부분 수도가 아닌 지방의 작은 도시에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지방에 있는 대학을 교육의 품질과 상관없이 ‘지잡대’ 등으로 싸잡아 부르며 멸시하고 차별하는 풍토가 심하다. 지방대생들이 편입 등을 통해 서울로 ‘탈출’하는 행렬도 끊이지 않는다. 저출산 추세로 학생 수가 점점 줄면서 지방대 중 상당수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것이란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 세명대 저널리즘연구소와 <단비뉴스>는 심층기획 ‘지방대 위기와 혁신’을 통해 서울 중심의 불균형 발전과 왜곡된 학력 경쟁 등이 낳은 지방대 소외의 실상을 조명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편집자)

편집 : 장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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