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들의 시선] ③

가짜뉴스와 조국사태를 둘러싼 받아쓰기 논쟁은 오늘 우리 언론상황을 압축적으로 상징한다. 서초동 집회장의 ‘손석희는 돌아오라’는 손 팻말과 KBS∙알릴레오 간 논쟁은 변화하는 언론환경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두 장면이다. 과연 이 땅에 언론은 있는가? 이 시대 진정한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 [청년기자들의 시선] 두 번째 주제는 ‘언론’으로, ‘기자∙피디는 누구인가’ 묻는다. ‘회사원, 로베스피에르, 리얼리즘, 불, 고수’ 다섯 키워드로 오늘의 언론을 바라본다. (편집자)

<키워드 하나, 회사원>

기자는 회사원일 뿐이다.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언론사에 소속돼, 밉보이지 않고 좋은 인사고과 점수를 받으려 애쓰고 있다. 세월호가 기울었을 때 기자들은 단독보도에 눈이 멀어 유가족의 슬픔을 무시하고 이들에게 마음이 찢어지는 질문을 던졌다. 속보 경쟁에 매몰돼, 사실 확인이 안 된 정보를 무분별하게 퍼뜨려 국민의 마음을 헤집어 놨다. 신문은 대기업의 사외보(社外報)에 불과하다. 2015년 삼성 분식회계 논란이 일었을 때, 몇 신문만 관련 내용을 실었다. 대다수 신문은 삼성 폴더블폰의 경이로움, 삼성이 지닌 혁신 정신을 보도했다.

▲ 삼성 분식회계 논란이 일었을 때, 장충기 문자 사건이 이슈였을 때 이를 다룬 신문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 pixabay

기자와 신문사가 자본에 종속돼 이윤만 추구할 때, 언론의 정도는 신문사의 사시(社是)로만 존재하게 된다. 올바르지 않은 것을 보고도 침묵하게 되는 것이다. 2017년 장충기 문자 사건이 이슈였을 때, 이를 다룬 신문사는 거의 없었다. 삼성의 비위를 거스르면 광고와 협찬이 끊기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대신 광고비를 대가로 삼성에 우호적인 기사를 내보냈다. 신문이 올바른 여론을 끌어가기보다 이윤 추구에 더 목매게 될 때, 기사 출고 가치 판단은 대기업과 언론사간 갑을 관계 종속에서 나온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터 드러커가 기업의 목적을 특이하게 언급한 적이 있다. "기업의 존재 목적은 이윤 추구가 아니라 고객을 만들어내 만족시키는 데 있다. 이윤은 목적이 아닌 결과다. 이것을 혼동하는 데서 많은 문제가 생겨난다." 기자들이 소속된 신문사들 중에는 이윤과 고객만족을 혼동하는 데가 많다. 신문사와 기자는 신규 독자를 끌어들이지 못하고 기존 독자들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구독이라는 낡은 수익 모델에서 나오는 이윤이 점점 줄어드니 광고나 사업으로 이윤을 남겨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경영 악화는 이윤만 좇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했다.

다양하고 이색적인 실패가 없다

대기업 사외보를 내는 신문사는 이윤을 남기는 수익모델을 개발하고, 회사원인 기자는 기사를 팔아야 한다. 이윤을 남기지 못하는 수익모델은 쓸데없고, 읽히지 않는 기사는 아무 의미 없다. 기사를 생산하고 나르는 기자와 신문사는 수요자, 즉 구독자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 팔리지 못하고 이윤을 남기지 못하는 기사는 효용 가치가 없다. 독자가 만족할 만한 컨텐츠를 생산해야 한다. 뉴스 소비 행태는 온라인으로 옮겨 갔다. 모바일 뉴스 이용률은 80%를 넘었다.

▲ <뉴욕타임스>는 인터랙티브(interactive) 기사 ‘스노우폴’을 통해 독자를 만족시키고, 자본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다. ⓒ pixabay

<뉴욕타임스>는 그래프와 인포그래픽, 쌍방향 소통 툴과 디지털 플랫폼을 개발해, 독자에게 감각적으로 다가갔다. <뉴욕타임스> 기자는 기사 작성과 더불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기사를 읽을지 연구한다. 뉴스룸에서는 그래픽 디자이너와 프로그램 개발자, 기자가 협업으로 뉴스를 제작한다. 인터랙티브(interactive) 기사 ‘스노우폴’은 그 결과물이다. 기사는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사진과 글이 나와 읽는 이로 하여금 기사에 빠져들게 한다. 클릭하면 영상이 재생되고 음성이 나오는 등 독자에게 교감하는 느낌을 준다. ‘스노우폴’ 이후로 인터랙티브 기사는 시장에서 사장돼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런 시도 자체에 의미가 있다. 어떻게든 독자를 만족시켜 자본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한국 기자와 신문은 디지털 시대에 맞게 독자 중심의 가치로 무언가를 시도해 실패한 적이라도 있었던가?

(박동주 기자)

<키워드 둘, 로베스피에르>

오늘의 신문은 우드로 윌슨의 환생이다. 윌슨은 1913년부터 1921년까지 미국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1차세계대전 승전국의 대표이자 세계 최강국 리더로서 세계평화라는 도덕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지금 이 땅의 언론은 자신이 가진 펜의 힘으로, 사회정의구현이라는 자신만의 도덕적 이상을 관철하고자 한다. 자신들의 이상을 끊임없이 기사화하며 세상을 자신의 의도대로 끌고 가려 한다.

▲ 오늘 이 땅의 신문은 우드로 윌슨의 환생자다. 겉으로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저변에는 음험한 이중성이 깔려 있다. ⓒ flickr

세계는 윌슨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윌슨이 만든 국제연맹이지만 미국은 가입도 못했다. 국제연맹은 몇 년 지나지 않아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 독일은 더욱 지독한 2차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언론이라고 다르겠는가? 자신들의 이상을 끊임없이 기사화하고 세상이 그렇게 변하기를 바란다. 대통령과 권력자를 비판하고, 정책을 비난하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다. 언론이 매번 부르짖는 경제위기론은 시민들의 정서를 악화시켜 오히려 경제위기를 조장한다는 평가마저 듣는다.

왜 그럴까? 윌슨과 신문의 저변에는 음험한 이중성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윌슨은 세계평화를 논하면서 노동자를 탄압하고 KKK단을 옹호했다. 언론은 사회정의를 주장하면서 자기 편이 아닌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어 비난하고 깔아뭉갠다. 현대차, 한국철도공사 같은 대기업이나 공기업 노동조합원들은 평균연봉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귀족노조, 자유시장주의의 역적’이 되고, 조국 전 장관의 편법적 지위 세습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적폐, 검찰개혁에 반대하는 수구’가 된다. 이념만 맞으면 불법과 편법도 거침없이 옹호한다. 언론이 부르짖는 대의에 비해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다.

신문기자는 로베스피에르의 재림이다. 로베스피에르를 비판하는 자들도, 혁명을 향한 그의 의지와 순수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드물다. 로베스피에르의 격렬한 반대자였던 보뵈프조차 “민중이 도달해야 하는 정의와 행복이라는 목표를 추구한, 민중을 관대하게 지키려 한 최초의 보호자”라고 그를 평가했다. 신문기자도 마찬가지다. 영상과 인터넷이 대세가 된 시대에도 기자가 글의 힘으로 대중을 움직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자신이 쓴 글로 세상을 바꾸고, 사소한 정의일지라도 최선을 다해 실현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 신문기자는 로베스피에르의 재림이다. 한때 순수하고 청렴했지만 변질되고, 이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 wikimedia

청년 로베스피에르는 순수하고 청렴했다. 그의 별명 ‘incorruptible’은 ‘부패하지 않는 자’라는 뜻이다. 인권에도 관심이 높았다. 사형제와 재산몰수형의 폐지를 주장했고 부당한 차별에 반대했다. 기자도 다르지 않다. 기자가 되겠다고 공부하던 언론고시생들은 다들 순수하고 청렴했다. 이념은 달라도 불의에는 함께 분노했다. 김영란법 때문에 접대를 옛날처럼 못 받게 됐다고 분개하는 언시생은 본 적이 없다.

언론은 윌슨과 로베스피에르의 실패를 반복할 것인가

로베스피에르는 피에 굶주린 독재자가 됐다. 주변국들은 프랑스 토벌 연합군을 결성했고, 반혁명주의자들은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스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는 수많은 병사를 강제징집하고 동지들을 수없이 죽였다. 신문기자는 ‘기레기’라 불린다. 온라인, 모바일 기반으로 바뀐 언론환경은 기자 집단 전체의 생존을 위협한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자들은 속보경쟁에 매달리고, 어뷰징을 자행하며, 정파성을 과도하게 표출한다. 언시생 시절의 순수성과 청렴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우드로 윌슨이 환생한 신문, 로베스피에르가 재림한 기자, 오늘 우리 언론의 두 얼굴이다.

(양동훈 기자)


편집 : 임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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