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관념과 현실’

▲ 최유진 기자

“관념이 곳곳에 범벅돼 있다.” 전공 교수님의 칼 같은 한마디였다. 학부생 때, 내가 쓴 소설은 그렇게 혹평을 받았다. 마음이 찌르르했다. 내 밑천을 꿰뚫어 본 평이었기 때문이다. 망연한 얼굴을 한 나에게 교수님이 던진 해답은 “가정법원에 가보라”는 것이었다. 이혼하는 이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려면 이혼소송이라도 지켜보라는 말이었다.

휴학을 결심했다. 책이 아니라 넓은 세상을 보고 들으며 머리를 채우겠다는 각오였다. 평소 즐겨보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취재작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잦은 밤샘 근무에 박봉인 ‘막내’ 생활은 고됐다. 그래도 몸만 그럴 뿐, 마음은 충만했다. 그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해야 할 말’이기도 했다. 온종일 다른 사람의 생활을 들여다봐야 하는 일이었다. 출연자 섭외부터 촬영 영상 녹취록 작성까지 남이 어떻게 사는지 묻고 듣는 일이 전부였다. 언뜻 ‘나’를 잃은 시간 같지만, 실은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아가는 나날이었다.

평범한 직장인의 하루가 시작될 때, 내 일과가 끝났다. 대흥역 2번 출구 24시간 만둣집에서 혼자 허기를 달랬다. 연신 하품하는 주방 아주머니가 신경 쓰였다. 새벽 첫 버스를 탔다. 내 부모쯤으로 보이는 한 무리가 서로 고갯짓하며 수월하게 자리에 앉았다. 바닥에 돗자리때기를 깔고 앉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을 지켜보며 뻘쭘하게 서있었다. 낯선 풍경이었지만 마음속 깊이 새겼다. 언제든 떠올려보고 감사해야 할 분들이라 생각했으니까. 누구든 그래야 한다고 여겼으니까.

“이분들의 삶의 고단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겠습니까? 이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 있었습니까?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습니까?”

2012년 노회찬 의원이 진보정의당 당대표를 수락하면서 한 연설이다. 그는 새벽 4시 구로에서 출발해 강남으로 가는 6411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청소노동자들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대중 정당은 달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때 실현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정치인들만 들을 말이 아니다. 신뢰성과 공영성 위기를 자초한 언론인에게도 일침이 될 말이다. 스스로 권력이 된 언론은 제대로 대중을 만나고 있는가? 지금 그 만남은 너무나 피상적이다. 지난 봄 한국방송 취재기자가 강릉을 고성으로 조작한 ‘산불특보’는 충격이었다. 열악한 외주제작사 ‘막내’들도 백방으로 전화하고 답사하며 취재원과 촬영지를 찾는다. 수신료를 받는 공영방송의 기자가 쉽게 보도 공적을 세우려 했다는 데서 분노와 허탈감을 느꼈다. 실수가 아니라 고의가 담긴 ‘허위보도’는 대중을 깔보는 데서 비롯된다. 정당도, 언론도 이 사회 어디쯤 있는가? 바로 대중 ‘위’에 있다. 눈 맞추기 어려우니 제대로 된 교감은 애초부터 어렵다. 지난 1월 독일 법원은 ‘가짜뉴스’를 보도한 기자에게 우리 돈으로 1600만원쯤 되는 벌금형을 선고했다. ‘조국 사태’와 관련해서도 날마다 ‘소설’을 써대는 한국의 상당수 기자에게는 얼마쯤 벌금을 물려야 할까?

▲ 기자는 쉽게 보도 공적을 쌓으려 하기 보다 힘들더라도 현실을 들여다보고 진실만을 전해야 한다. © Pixabay

매일 녹초가 돼 쓰러진다. 그때는 ‘막내 작가’였고, 지금은 ‘저널리즘스쿨 학생’이다. 그곳은 서울이었고, 여기는 제천이다. 달라진 건 그뿐이다. 마음은 여전히 더 낮은, 더 절실한 누군가를 찾아 떠난다. 내가 전하는 메시지가 더는 관념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현실에서 떠오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 마음가짐을 세상에 밝혀둔다. ‘좋은 기자가 되겠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윤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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