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광장] 강사법 핑계로 과목 축소하자 “사라진 수업 복구해라”

“이러다간 졸업 못 한다. 사라진 수업 복구해라.”
“수업 듣고 싶어, 수업 하고 싶어.”

토요일인 23일 오후 3시. 서울 광화문 프리미어 플레이스 빌딩 앞에서 열린 ‘강사구조조정 저지와 학습권 보장 결의대회’에는 강사 말고도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경희대 등 대학생 20여명이 참석해 '강사구조조정으로 수강과목수가 줄어 학생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며 ‘수업과목 원상복구’를 요구하고 나섰다.

‘강사제도 개선과 대학 연구교육 공공성 쟁취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강사공대위)가 개최한 이날 집회에 학생들도 합세해 '시간강사 대량 해고로 학생들이 2차 피해를 입고 있다'며 ‘수업과목 복구투쟁’에 들어간 것이다.

▲ 23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강사구조조정 저지와 학습권 보장 결의대회’에서 강사와 대학생 등이 수강과목 원상복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 박동주

“강사법 핑계로 강사 해고, 과목 줄어 학습권 침해”

집회에서 노동자연대 학생그룹의 박혜신 씨는 "대학들이 강사법 시행을 핑계로 강사들을 해고하면서 수업과목이 대폭 줄어들었다"며 "학생들이 들어야 할 수업을 듣지 못하고 직격탄을 맞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졸업에 필요한 수업을 못 듣고 다양한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됐다"며 "선생님 수는 줄고 강의 규모가 커지니 강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연세대생 박여찬 씨는 "연세대의 2019년도 1학기 계약 예정 시간강사 수는 작년 1학기와 비교해 64%가 줄어 들었다"며 "이에 따라 연세대 신촌캠퍼스의 선택교양 과목 수업 수가 66% 감소하는 등 수강과목이 대폭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전공과목도 줄어든 곳이 많은데, 사회학과, 건축공학과, 성악과의 전공과목과 경영학과의 전공필수과목 등이 각각 30% 정도 줄어 들었다는 것이다.

중앙대생 이찬민 씨는 "이번 학기 시간강사가 작년보다 264명이나 줄어 개설강좌 수가 130여개 줄어들었다"며 "시간강사가 맡고 있던 과목을 전임교원들이 맡게 돼 전임교원들의 수업 부담이 늘어나면서 수업의 질 저하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또 경희대생 김보경 씨는 "2016년에 예고없이 영어 강의 53개가 없어졌는데 올해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시민교육'이란 수업이 ‘세계시민교육’이란 과목으로 통폐합되는 등 절반 가량 과목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같은 경희대 휴학생 김준오 씨는 "다음 학기 복학을 준비중인데 벌써 수강신청을 걱정하고 있다"며 "비싼 등록금을 내고 수업도 제대로 못 듣게 됐다"고 말했다.

▲ 연세대 ‘강사법 관련 구조조정 저지 공동대책위원회’가 지난 14일 학교 정문 앞에서 강사 해고 및 수강과목 감축을 통한 수업구조조정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연세대 강사법 관련 구조조정 저지 공동대책위원회

연세대 선택교양 214개서 131개로 감축…개설 과목은 학생 넘쳐

실제 <단비뉴스> 취재팀이 서울의 대학들을 취재한 결과 상당수 대학들이 이번 학기에 수강과목 수를 대폭 줄여 학생들이 듣고 싶은 과목을 듣지 못하거나 졸업에 필요한 전공필수과목을 듣지 못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연세대 강사공대위에 따르면 신촌캠퍼스의 경우 선택교양강좌가 작년 1학기 214개 과목에서 이번 학기에 131개로 줄었다. 이중에서도 학생들이 폭넓게 듣고 공부해야 할 역사, 과학, 사회윤리, 문화 등의 선택교양 수는 기존 120개에서 41개로 66%나 감소했다. 1학년 교양과정부 학생들이 수업을 받는 연세대 국제캠퍼스는 선택교양강좌가 단 한 개만 개설됐다.

강좌수가 줄어 들면서 학생들의 수강신청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과목수 감축에 따른 개설과목 수강생 증가로 강의실이 넘쳐나 서서 강의를 듣는 학생들도 있다고 공대위측은 밝혔다. 글쓰기 수업의 경우 2018년도 1학기에는 20명이던 수강 정원이 이번 학기에는 30명으로 늘어나 글쓰기 수업의 필수 과정인 첨삭지도 회수가 줄게 됐고, 수업시수도 종전 4시간에서 3시간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연세대 강사공대위 관계자는 "강좌 수가 줄어들면서 남은 과목들의 수강생 수가 많이 늘어 났다”면서 “강의 질 저하 등으로 학생들 학습권이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공대위가 최근 800여명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87%가 "강의의 양적 변화로 강의의 질적 저하가 초래된 것으로 느꼈다"고 답변했다.

고려대에선 과목 줄어 ‘수강신청 거래’까지 등장

“형법 비싸게 구해봅니다 ㅠㅠ.”
“미디어학입문 이명선 교수님 꺼 삽니다.”
“손승호 교수님 ‘도시와 국토’, 손용석 교수님 ‘인간과 동물’ 양도해 드려요.”
“강정원 교수님 ‘스페인라틴아메리카 정치와 사회변동’이랑 강정원 교수님 ‘스페인어권사회의 이해’(삽니다). 교환.”

신학기 수강신청이 진행되고 있던 지난 3월 초 고려대 학생 커뮤니티 ‘고파스’ 게시판에는 수업과목 감축으로 듣고 싶은 과목을 신청하지 못한 학생들이 수강과목을 구한다는 글들이 대거 올라왔다. 과목 수 축소로 수강신청에 실패한 학생들이 그 과목을 신청하는데 성공한 학생들에게 과목을 양도해 달라거나 양도한다는 내용과 함께 자신이 신청에 성공한 과목을 신청에 실패한 과목과 교환하자는 등의 글들이 줄줄이 올라 왔다.

고려대 총학생회가 조사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고려대에서는 이번 학기에 교양강좌와 전공과목을 합쳐 모두 300여 강좌가 폐지됐다. 이 때문에 졸업에 필요한 전공필수과목 등을 수강신청하는 데 실패한 학생들이 해당 과목을 수강하지 못해 애를 먹는 사례가 많았다는 것이다.

고려대 경영학과에 다니는 박모(23) 씨는 “경영학과에서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재무관리 강의 수가 줄어 수강신청을 못하게 됐다”며 “작년에 들었던 것이 점수가 좋지 않아 재수강을 하려고 했는데 점수를 올릴 기회를 놓쳐 버렸다”고 말했다. 실제 고려대 경영대학은 작년 1학기에 비해 ‘오퍼레이션스 관리’는 9강좌에서 6강좌로 줄었고, ‘조직행동론’이 8강좌에서 7강좌로, ‘경영정보 시스템’이 8강좌에서 7강좌로 줄었다. 또 ‘재무관리’가 10강좌에서 6강좌로, ‘국제경영론’이 9강좌에서 7강좌로, ‘마케팅원론’이 11강좌에서 6강좌로 축소되는 등 중요 과목 대부분이 강좌 수가 줄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강신청에 실패한 학생들이 자신이 꼭 들어야 하는 과목을 신청하는 데 성공한 학생들에게 수강과목을 급히 산다거나 양도해달라는 글을 올리는 등 수강신청 과목 거래가 이뤄지는 일까지 벌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 고려대학교 학생 커뮤니티인 ‘고파스’ 게시판에 올라온 수강신청과목을 구하는 학생들의 게시물. © 고파스

이런 시도 등을 하고도 수강신청에 실패한 학생들은 휴학을 결심하는 등 후유증이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대 미디어학부에 재학중인 홍모(21) 씨는 졸업에 필요한 전공필수과목 한 과목을 이수하지 못해 이번 학기에 등록을 했는데 수강신청에 실패해 다시 휴학을 했다. 미디어학부의 과목 개설 수는 2017년 1학기 44개에서 2018년 1학기에 30개로 줄어든 데 이어 올해는 29개로 줄었다.

▲ 23일 결의대회’에 참석한 학생들이 ’수업 듣고 싶어, 하고 싶어’라는 문구를 쓴 풍선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 박동주

대학당국 “강좌 감축은 커리큘럼 개편, 강사법과 무관” 주장

강사 수 감축에 따른 수강과목 축소에 대한 학생들의 항의에 대학당국은 “강사법 시행과 무관한 일”이라며 “시대 변화에 부응하기 위한 과목 조정”이라고 주장했다. 연세대 대학본부측은 “강사법을 이유로 한 강좌 감축은 없다”며 “글로벌 리더를 양성하고 시대 흐름에 부응하는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과목 조정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본부측은 “강사법이 시행되는 오는 2학기에는 인위적으로 수업을 줄이지는 않을 것”이라며 “연세대 커리큘럼 체계의 본질적인 부분을 치열하게 고민하겠다”고 덧붙였다.

대학들의 시간강사 해고와 그에 따른 강좌 수 감축은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경희대 등 일부에서 시작됐지만 이들 대학을 시발점으로 다른 대학으로 번져나갈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여 정부당국의 감독과 대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한국은 보수·진보의 기울어진 언론 지형과 극성스런 가짜뉴스 등으로 건전한 여론형성이 힘든 사회입니다. 제대로 이슈화가 안 되니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갈등이 잠복하는, 이른바 ‘Non-issue, Non-decision Society’가 바로 한국입니다. 주요 정책이나 법을 결정할 때 공론화 또는 숙의 과정이 한국에서 특히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시민단체와 학계 또는 소수자의 건강한 목소리조차 기성 언론은 외면하기 일쑤입니다. <단비뉴스>가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여론광장]을 개설합니다. (편집자)

편집 : 홍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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