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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속에는 가짜뉴스가 없다
[상상사전] '가짜뉴스'
2019년 01월 02일 (수) 17:44:57 나혜인 기자 nahyein8@gmail.com
   
▲ 나혜인 기자

어렸을 때 어른들이 즐겨 보던 오락 프로그램 ‘가족오락관’에 ‘고요 속의 외침’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헤드폰을 쓰고 옆 사람에게 제시어를 전달하는 게임인데, 25년 장수 프로에서 14년이나 명맥을 유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입 모양만 보고 제시어를 전달하다 보니 마지막 사람은 엉뚱한 단어를 내뱉기 마련이어서 시청자들이 즐거워했다. 개그맨 허참이 진행했는데 방송사고에 가까운 것도 나왔다. ‘왁자지껄’이 ‘왕자지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고요 속의 외침’은 가짜뉴스가 생산·전파되는 과정과 닮았다. 사실에서 출발해 사실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100% 가짜’인 가짜뉴스는 없다. 거짓 정보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되,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지점을 흔들어 만들어진다. ‘이낙연 총리가 사망한 베트남 주석에게 예를 표했다’는 사실에서 ‘베트남’만 ‘김일성’으로 바꾸면 그럴듯한 가짜뉴스가 되는 것처럼.

사실 ‘고요 속의 외침’이라는 제목은 관찰자 관점에서만 맞는 말이다. 실제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옆 사람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끄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 ‘소음 속의 외침’을 하는 셈이다. 원래 제목처럼 고요 속에서 외치는 소리는 왜곡될 이유도, 여지도 없다.

최근 부랴부랴 가짜뉴스와 전쟁에 나선 ‘관찰자’ 언론이 놓치고 있는 점도 이와 비슷하다. 전통 뉴스 플랫폼을 완벽히 무시하고도 SNS에서 파급력을 키워나가는 가짜뉴스에 대항해 언론은 크게 두 가지 고육책을 쓰고 있다. 하나는 팩트체크, 곧 ‘사실확인’이라는 저널리즘 본연의 가치에 더욱 집중하는 것, 다른 하나는 가짜뉴스의 뿌리를 찾는 것이다. 둘 다 의미 있지만, 근본적인 답은 아니다.

   
▲ 언론은 가짜뉴스가 왜 세상에서 ‘먹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 Pixabay

사실 확인은 태초부터 저널리즘의 의무였다. 가짜뉴스가 창궐한다고 해서 새로 찾아 나설 가치가 아니다. 많은 전문가는 언론의 ‘팩트체크’ 노력이 가짜뉴스를 믿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가짜뉴스 확산은 ‘확증편향’을 바탕으로 한다. 신문이든 방송이든 유수 언론사 대부분이 팩트체크팀을 꾸려 관련 보도를 내고 있지만 그러면 대중은 언론 자체를 불신해 버린다. 최근 세력을 넓히고 있는 극우 보수 유튜버도 그렇게 태어났다. 사람은 원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한겨레>의 ‘에스더’ 특종 같은 ‘가짜뉴스 뿌리 찾기’는 민주주의를 해치는 가짜뉴스를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경로로 생산했는지 낱낱이 밝혀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문제는 ‘왜’가 없다는 점이다. 거짓임을 알면서도 돈과 정치적 세력화를 위해 가짜뉴스를 생산했다는 분석은 단순히 범행 동기를 밝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언론이 가짜뉴스를 정말 뿌리 뽑고 싶다면 보다 구조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사익을 위해 거짓 선동을 일삼는 세력은 분명 나쁘지만, 이들이 뿌리는 가짜뉴스는 대개 조금만 들여다보면 진실을 알 수 있을 만큼 논리가 빈약하다. 진짜 문제는 이렇게 허술한 가짜뉴스를 믿고 싶고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 환경, 곧 ‘불평등’에 있다.

가짜뉴스는 불평등이 낳은 대중의 분노를 교묘하게 부추기는 자극제다. 확산하는 양상은 조금씩 달라도 가짜뉴스는 기본적으로 가상의 ‘적’을 소재로 한다. 위로는 기득권부터 아래로는 소수자까지 지금 내 삶을 불행하게 만든 ‘악마’가 필요하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도 마찬가지다. 태극기부대에는 ‘친북좌파’ 정권이, 백인 블루칼라에게는 힐러리와 이민자가 가짜뉴스 소재다. 적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동시에 확실한 ‘내 편’도 필요하다. 그래서 가짜뉴스를 믿는 사람들은 쉽게 결집하고, 언론 등 이를 방해하는 세력은 논리와 상관없이 불신의 대상이 된다.

가짜뉴스에 놀란 언론이 소홀히 여겼던 저널리즘의 가치에 집중하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 지면과 전파를 통해 다시 ‘불평등 해소’를 외치는 일이다. 추락한 사회 신뢰를 이성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길은 결국 반비례 관계에 있는 빈부격차를 줄이는 데 있다. 겉으로 보기에 ‘고요 속의 외침’을 하고 있는 가짜뉴스 수용자들이 실은 진실을 들을 수 없는 소음에 시달리고 있다. 이제 언론은 방관을 멈추고 이 소음을 고요하게 멈추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가짜뉴스를 퇴치하는 방법이 결국 저널리즘에 있다는 말은 이래서 옳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이자영 기자

[나혜인 기자]
단비뉴스 환경부 나혜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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