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가짜뉴스’

▲ 장은미 기자

“문재인은 빨갱이라던데.” 2017년 대통령 선거 며칠 전이었다. 문득 꺼낸 엄마의 말에 아연실색했다. 단박에 가짜뉴스라는 느낌이 왔다. 내 가족이 쉽게 가짜뉴스를 믿어서 놀랐고 당황스러웠다. 가짜뉴스가 생각보다 폭넓고 깊게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몇 년 간 언론사 시험공부를 한다면서도 정작 내 가족에게 제대로 된 뉴스를 보여주지 못했구나 하는 자괴감도 밀려왔다. “그런 이야기 어디서 들었어?” “카톡으로 엄마 친구들이 이것저것 보내줬어.”

‘문재인은 빨갱이’라는 말은 쉽고 단순하고 명쾌하다. 가짜뉴스는 구호처럼 또는 직관적으로 쉽게 받아들이게끔 구성된다. 그가 빨갱이가 아닌 이유를 말해주는 데는 훨씬 더 많은 근거와 시간이 필요하다. 문재인의 일생을 엄마에게 구구절절 설명했다. 1시간 내내 그가 빨갱이가 아닌 이유를 말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엄마가 친구들에게 ‘문재인은 빨갱이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가짜뉴스를 접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대화를 마쳤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가짜뉴스와 가장 많은 영향을 주고받은 것은 태극기집회다. 그들에게 박근혜가 잘못을 했냐고 물어보면 화를 낼 것이다. 박근혜는 잘못이 없고 JTBC나 <한겨레> 등이 빨갱이고, 그들이 박근혜를 죄인으로 만들었다고 당당하게 말할 것이다. 누군가 그들에게 그렇게 말할 근거를 제공하고 그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그들은 가짜뉴스의 유통자이자 소비자가 되고, 이는 악순환의 고리로 고착됐다. 또 누군가 이를 이용해 돈을 벌고 정치적 목적을 달성했다.

최근 이낙연 총리가 가짜뉴스 근절을 말하자 야당은 ‘표현의 자유’ 운운하며 반발했다. ‘거짓’은 지켜야 할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겠다는데 반발을 한다는 자체가 그를 통해 자신들이 얻는 이익이 있어서다. 가짜뉴스가 나쁜 이유는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교묘히 조작하기 때문이다. 가짜뉴스는 합리적 토론의 장을 해친다. 성숙한 시민의 자유로운 토론을 방해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 같은 것보다 다름에 집착하는 순간, 공동체에 '차별과 혐오'라는 광기의 서막이 오른다. ⓒ pixabay

“적과 동지의 이분법에 포획되는 순간 공동체는 파시즘적 광기에 사로잡힌다.” 철학자 강신주의 말이다. 이분법은 상대방에게 비합리적 적개심을 갖게 만든다. 같은 지역에 살면서 같은 연고지 야구팀을 응원하는 평범한 소시민이 파시즘적 광기에 사로잡히는 순간, 유대인을 가스실로 몰고간 나치 친위대와 다를 바 없게 된다.

<한겨레>가 ‘에스더 기도운동’과 관련한 가짜뉴스 공장 보도를 했다. 난민이나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 단체가 그들을 배척하기 위해 80%의 진실에 20%의 거짓을 섞어 그럴듯한 뉴스를 만들고 세력을 결집했다. 타종교인 이슬람과 동성애를 혐오하기 때문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들은 이슬람과 동성애자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57년 전에 쓴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 자크 데리다의 <광기의 역사 30년 후>, 그리고 지금 한국사회의 광기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오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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